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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May 08. 2020

천카이거의 패왕별희

역사라는 무대, 연기하는 개인

2020.05월 재개봉 특집

https://artlecture.com/article/1617




안타깝게도 사랑은 오직 그 시절 그곳에만 존재하고 지금 이곳엔 죽음만 존재하는 것 같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https://www.youtube.com/watch?v=O6GI7YSZGVA&feature=emb_title



인간은 목표삼은 바가 충족돼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 다른 의지를 설정하며 이에 허기지고, 그 결핍을 충족하고자 발을 내딛으며 지금의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의해 정신적인 결핍을 극복하고자 발생하는 혁명이란 언제나 필연일 것이다. 혁명은 과오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 현재에 대한 불만족, 지난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현재의 괴리 등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거대한 사건일 수 도 있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서서히 차근차근 일어날 수 도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혁명과 혁명으로 오도된 것을 구분해야 한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혁명의 근저가 되는 봉기를 반란으로 두는 반면, 이 같은 정신적인 반란에 비하여 물질적인 것을 좇는 폭동은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위고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혁명과 혁명이 아닌 것을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오주의와 문화대혁명은 어떠한가. 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맑시즘의 유물론과 종교 및 역사에 대한 부정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벌어진 인류사에서 가장 큰 반달리즘 운동, 언뜻 보기에는 과거의 정신으로부터 현재, 미래로 급도약하는, 실도 많지만 득도 많을 것 같은 운동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책이 불태워지고 텅 빈 책장에 붉은 소홍서만이 획일적으로 빼곡히 채워지는 것은 과연 풍부한 정신성을 장려하는 행위인가? 또한 우리가 쌓아올린 무수한 역사에는 현재의 선택에 있어 한 발 물러서야 할 과오 또한 빼곡히 적혀져있기 마련이거늘, 그것을 통째로 불살라버린다면 우리는 억겁의 세월 동안 선조들이 겪었던 과오들을 다시금 비경제적으로 수행하고 새로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더불어 우리의 제약이란 과거의 축적으로부터 비롯하기에, 역사의 주름이 펴진다면 어쩌면 인류는 더 젊어지고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이후에 인민의 자유란 보장되었는가? 역사에는 구멍이 났고, 개인들의 정체성은 느슨해짐과 동시에 모호한 공백이 가득 찼다. 반면 제도는 더욱 빽빽하게 무수한 규율들이 사슬처럼 얽혀있어, 빈약한 정체성 속에서 인민들은 제도의 사슬에 묶여 정신적인 도약을 행하지 못하는 노예가 된 것이다. 문혁이 박살내어버린 인류의 유산, 천카이거는 그 중에서도 예술의 상실에 주목하며 <패왕별희>를 만들어낸다.





*감독소개

천카이거는 장예모, 톈좡좡과 함께 중국 5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특히 천카이거의 장편데뷔작인 <황토지>는 1985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은표범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중국 5세대의 시작을 선언했다고 평가받는다. 21세기 이후로 상업영화로 전향한 천카이거에게서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지속하던 작가주의적 색채를 포착하긴 어렵지만, 분명 초기작들은 자본 및 정치권력의 영향력이 비교적 적은 고유의 색채를 느낄 수 있다. 5세대를 둘러싼 시대적 특징으로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의해 마오쩌둥 시기에 불가능했던 ‘표현의 자유’가 일련 해방을 맞았지만, 여전히 당에 의해 검열을 받았기에 ‘절반의 자유’만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천카이거의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주로 군인이나 선생이요, 그들이 향하는 곳은 낙후되고 뒤처진 전원이며, 이 같은 구성 속에서 당정이 추구하는 일련의 계몽적 색채가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체제에 대한 비판이 결코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규범, 관습 등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의 삶을 바라지만 그것이 언제나 거대 구조에 의해 짓밟히는 상황을 에둘러서 우회적으로 비판해내곤 한다. 그리고 대약진운동 및 문화대혁명에 의해 파괴되어 버린 고유의 민속, 역사, 전통을 다시금 복권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그 포악한 시도가 미처 닿지 못한 지역, 민족의 삶에 눈 돌리곤 하였다. 특히나 천카이거는 그렇게 눈 돌리며 포착한 문화와 예술은 자연스럽게 삶을 반영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적으론 폐쇄적인 관습 내지는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가 개개인의 삶을 침탈한다는 입장을 반복하였다. 또한 5세대 감독들의 특징이라 한다면 관습에 얽매이는 내러티브 영화의 한계를, 편집 및 이미지 그 자체에 뛰어넘는다는 것인데, 천카이거 또한 마찬가지다. 기성배우들을 등용하기 이전에는 비전문배우들을 사용하여 마치 중국에서 네오리얼리즘을 펼쳐내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이를 통해 현실과 보다 밀착하려는 그간에는 당정에 의해 이뤄지지 않았던 시도를 보여준다. 한편 천카이거가 리얼리즘에만 천착한 것은 아닌데, 타르코프스키 내지는 앙겔로풀로스를 연상케 하는 롱테이크와 결합된 익스트림 롱 숏를 통해, 자욱한 안개와 험준한 산골짜기들이 포착되는 숭엄하고도 경이로운 풍경을 구성한다. 또한 개인의 내면에 상응하는 듯한 비가시적인 영역을 표현주의적인 색채와 초현실적인 미장센으로 가시화하는 환상적인 숏들도 빼놓을 수 없다.



*연출

이 같은 천카이거의 초기 스타일을 생각해 봤을 때 본 작품은 거대자본이 투입되며 보다 상업영화와의 절충을 보이는 중기시기에 위치해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시적이고 암시적인 연출을 통해서 자신의 예술론을 설파하던 초기 스타일에 비한다면, 보다 직접적이고 친절한 방법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논한다. 초기작에서 삶 그 자체가 예술화됨으로써, 예술과 현실의 결별 불가능을 논하던 천카이거는 이제 대사를 빌려 그것을 논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고유한 형식적 성취는 이어지고 있다. 일단 본 작품은 롱 테이크가 도드라진다. 그의 초기 스타일을 생각할 때 이는 리얼리즘을 부각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보인다. 특히 인물의 등 뒤에서 동선을 따라가는 연출은 특히나 그렇다. 하지만 이를 리얼리즘으로만 국한시킬 순 없으리라. 이전의 작품들은 주로 예술 중에서도 음악이나 시를 다뤘다면, 본 작품은 연극을 다루는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만의 특색이라 볼 수 있는 무수한 잘림 대신에 택한 롱 테이크는, 현실 속에서도 나뉘지 않는 연극의 시간과 배경이 연상된다. 즉 본 작품의 롱테이크는 연극적인 효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부에는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향이 이뤄지는데, 이것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의 이행이 아니라, 가상적인 형식과 현실적인 형식의 교차로 봐야 할 것이다. 흑백과 컬러처럼 영화는 연극과 현실을 줄곧 오가며, 그것의 모호한 경계를 다뤄낸다. 그리고 어둠이 자리한 무대를 비추는 밝은 빛처럼, 영화는 어둠과 빛의 대비가 도드라진다. 역경 속에서도 언제나 빛은 충만하여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듯 말이다. 예술의 육화에 다름 아닌 그들의 발걸음 자체가 빛이 되기도 하며, 버려진 아기에게 불을 비추는 것처럼 일련의 인간성이 빛에 상응시키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영상미는 안개가 끼고, 먼지가 떠오르며, 연기가 피어오르듯 모호한 질감을 보여준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를 비추는 불투명한 형식일까, 아니면 폐쇄적인 역사에 상응하는 형식인 것일까.



*구조와 개인

불투명하고 모호한 영화의 질감은 곧 시대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되는 존재의 역경에도 상응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장국영이 연기하는 두지는 그 본래의 이름 대신 배우로서 데이라 불리며, 때로는 그가 분하는 배역인 별희라 불린다. 두지라는 이름은 초반부에만 가능했으며 결말에서야 겨우 회복된다. 이러한 이름들은 개인이 선택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 다른 누군가에게 덧씌워진다는 것도 지적해야 하리라. 마치 홍등가에 머물던 어머니는 두지를 소년이 아닌 소녀로 길러내고, 또한 극단에 보내기 위해 ‘육손이’이던 그의 손가락을 과감하게 잘라버린다. 이 같은 바에서는 타인에 의해 왜곡되는 존재의 초상이 드러난다. 극단 내에 모든 소년들이 그 존재가 뚜렷하지 않다. 모두 획일화된 민머리는 개성을 찾기 어려우며, 배우로 거듭나기 위한 고압적인 교정과 체벌을 견뎌야만 한다. 경극이 시대적으로 유행이던 시대, 과연 아이들은 이를 주체적으로 선택했을까, 주체적이지 않다면 그 소년들은 경극 바깥의 존재를 회복할 수 있는가. 이러한 존재의 억압 속에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띠는가. 두지는 배역을 연기하며 대사를 줄곧 틀리곤 한다. 두지가 대사에 자전적인 삶을 투영하기에 이 같은 실수가 반복되듯 보인다. 이 같은 두지의 모습을 통해, 현실과 온당 분리되기 어려운 예술의 관계를 드러낸다. 이 같은 현실과 일련의 교두보에 다름 아닌 예술은, 또한 실재로는 온당 실현할 수 없는 꿈을 간접실현하게 해준다. 두지가 시투와 함께 머무는 그 욕망을 말이다. 현실 속에서의 실현은 극의 전체에 거쳐 불발된다. 극의 초반에서 ‘거대한 연’들에 아이들이 매혹된 것도, 너무도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극단 바깥으로 나아가 해방감을 맛보고 싶던 열망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하지만 영화 속에서 안과 밖은 언제나 엄히 구분된다. 창문과 병풍, 어항 등을 통해서 언제나 그들은 뛰쳐나가기보다는, 내부에서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다. 밖에서는 싸늘히 눈이 내리고, 징벌이 가득하니, 자유 대신에 헌납한 생존일 것이리라.





*경계

안과 밖은 곧 예술과 현실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들의 연극은 내부에서 이뤄지며, 그곳에서 두지와 시투는 배를 꼬집는 장난을 친다. 실재로 만져지는 촉각, 경극 속에서 둘의 관계임과 동시에 현실 속에서 두지가 시투에게 성취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이렇게 가상으로서 내부는 현실과 오묘하게 교차되어 있다. 그리고 외부에서 이 같은 꿈을 깨뜨리는, 누군가가 도착한 듯한 경적소리가 들려온다. 내부에서의 가상은 촉각성이 결부되어 현실인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 그 자체인 청각의 침범에 장난은 지속될 수 없다. 하지만 예술이 현실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지가 무대를 감상하는 것은 극의 초반에 두 번에 거쳐 반복된다. 하나는 어머니와 함께 바라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의 친구와 찰나적으로 맞은 해방에서 비롯한 주체적인 감상이었다. 전자에서는 어머니의 열망이 투영되어 두지의 삶이 뒤바뀌었고, 후자에서는 두지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의 삶이 뒤바뀐다. 예술은 온당 현실이 아니지만, 최소한 삶의 이정표를 뒤바꿀만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기도 한다는 것이리라. 어머니의 선택에 어쩔 수 없이 매를 맞던 아이는, 이제 스스로 매 맞기를 선택한다. 천카이거 이전 작품들에서처럼 그들의 삶과 분리된 요소들을 노래함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던 인물들의 모습처럼, 본 작품에서 소년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훈련을 하는 이유도 현실과 분리될 수 없는 예술의 관계와 관련된다. 경극의 절제된 움직임과 섬세한 연기는 유약한 실재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랴. 고도로 정밀한 그들의 경극은 실재로도 갖은 역경을 이겨낸 기개를 드러내며, 연극 속 초인의 모습은 곧 실재로도 초인이다. 그렇다면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선전예술은 어떠한가. 거기에는 진실이 결여되어 있다. 거짓 초인들이 실재의 초인들을 대체하려 한다. 실재 초인들의 요소들을 모두 불태우며 그 자리를 대체하려 한다. 하지만 천카이거가 추구하는 예술은 현실을 가리킨다. 두지와 시투가 결별함에 더 이상 『패왕별희』를 상연할 수 없고, 두지는 혼자 경극계에 남음에 시투 없이 행할 수 있는 경극을 연기해야 한다.



*과오의 극복

예술에서만 간접적으로 성취되는 꿈이라곤 하지만 개개인들이 결코 현실 속에서 낙담해 버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전체의 이름으로 폭정 하는 공동체를 거부함에, 그리고 거대한 권력을 답습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두지는 청나라 왕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음이 암시된다. 현재의 중화민국을 부정하고, 지나간 역사인 청나라를 긍정하고 당시에는 가능했을 폭정을 현재에 다시 불러온다. 두지를 둘러싼 위엄 넘치는 축조물들만큼이나 거대한 강자들은 약자들을 유린하고 지배한다. 하지만 두지는 이 같은 구시대의 악습을 반복하지 않는다. 육신에 새겨진 상흔을 안고 바깥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온다. 힘겨워 보이는 두지의 눈에 버려진 간난 아기가 포착된다. 거대한 건축물들과 작고 나약한 인류들의 대비, 두지는 이 나약한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강자라면 외면하거나 지배했을 그 아기, 샤오쓰를 다른 친구들과 함께 길러낸다. 그것은 하나의 연대이다. 시투와 주샨의 관계도 그렇다. 그들이 약혼식을 하던 날 주샨은 2층에서 무수한 남자 손님들에게 위압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시투가 뛰어내리라는 그 말을 믿고, 시투를 신뢰하며 약혼식을 거행하게 된다. 한편 영화가 다루는 무수한 역경의 역사 속에서도 문화대혁명이 가장 냉혹하게 그려지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연대의 불가능에 있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까지는 서로에 대한 감정적인 교감에 따라서, 배신이나 실망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서로가 희생하고 의존이 되어줌에, 투옥이나 아편 중독과 같은 혼자서 극복이 역경들을 이겨냈다. 하지만 문혁에 이르러 이 같은 감정의 고양을 불러일으킬 예술은 상실되어 버렸고, 혁명의 이름으로 청나라 왕족이 행한 악습 등을 더욱 악랄하게 반복함에, 개개인은 생존 그 자체도 위협받는 상황이다. 이에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서로를 배반하고 음해해야 했던 시대, 진실 대신 거짓만이 범람하고, 모든 긍정적인 감정 대신 비탄과 절망이 자리했던 시기로 20세기 중반의 중국을 비판한다.



*연극성

천카이거가 음악을 다룸에 영화는 보다 형식성과 리드미컬함을 추구하였고, 시를 선택함에 암시적이고 모호하며 닫혀있지 않은 연출이 추구하였다. 본 작품에서도 연극을 택하여 그 요소들을 사용하는 영화가 전개되고 있는데, 천카이거는 연극의 무엇에 주목하고 있는가. 사부는 경극을 지속함에 둘은 결코 헤어져서도 안 되고, 각고의 노력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된다고 통렬히 꾸짖는다. 그러한 이유는 연극의 현존성과 단발성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닌가. 대본이나 무대는 분명 반영구적일 수 있다. 하지만 어제의 실연과 내일의 실연은 결코 같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다수의 연극들이 하나로 동일하고자 배우들은 각고의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리라. 즉 현실에 맞춰서 변화해가는, 결코 같지 않지만 한편 똑같기도 한 연극의 특성에 감독은 주목한다. 어느 날에는 완전하게 분장하지만, 일제 시대에 급박하게 진행해야만 하는 경극에서 분장은 배제되듯, 한 번의 실연은 단발적이고 휘발적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무대 위에 놓인 것은 별희가 아니라 두지다. 우리의 경탄은 배역으로서 별희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그것을 연기하는 두지에게 주목한 것인가.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영화와 연극의 차이를 전자에 주목하는 것은 배우의 현존성이 사라진 영화라고 보았고, 후자에 주목하는 것이 현존성이 강조되는 연극이라고 보지 않았던가. 이런 관점에서 두지가 사랑하는 대상은 결국 패왕이 아니라 시투다. 또한 그렇게 연극처럼 흘러가버릴 애상을 알기에 붙잡고자 하는 것이리라. 문혁을 앞두고 다시 떨어지기가 두렵다고 말하는 주샨에게 시투는 여전히 받아줄 것이라 말한다. 이후에 제 발로 술집에서 나왔음에도 쫓겨난 여인을 연기한 주샨은 시투와 연극을 행하는 것이다. 현재의 그녀는 당시 그날의 연극을 재현하는 게 불가능하단 걱정이 불현듯 샘솟은 것은 아닌가. 하지만 주샨은 휘발된 것을 유사하게 반복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는 반면, 두지에게는 부재한다. 휘발적인 것을 붙잡을 수도 없고, 지나간 것을 반복하려는 시도조차도 부정됨에 두지는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리. 이렇게 연극의 특성 중 단발성이나 실재성, 유동성에 집중하는 천카이거는 그것과 사랑을 엮어낸다.



*시대의 상징

이후 천카이거는 경극을 빌려 여러 요소가 조화로운 매체가 종합예술임을 정의하고, 이를 통해 직접적이고 적나라하여 각 요소들의 조화가 무너진 선전에 동화된 연극을 배격한다. 이 같은 입장은 천카이거 초기 작품들도 그랬다. 음악과 시를 다룸에도 그것은 여전히 본 요소들의 일부만을 가져온, 궁극적으로 ‘영화’였다. 음악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리드미컬한 형식이랄지, 오묘하고도 암시적인 시의 미학은 연출로서 편입된 것이지, 그것만을 직접적으로 읊어대지 않았다. 그리고 본 작품도 경극에 의해 영화의 매체성이 압도되는 작품이 아니다. 본 작품의 영화적 성취는 연극의 관객으로서는 볼 수 없는 뒷무대를 비춘 것이나, 경극의 장면들과 다른 숏들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며 연극성을 탈피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영화의 또 다른 인상적인 구성은 시대가 넘어감에 따라서 지나간 시대의 유사한 상황을 편집으로 이어붙인 연출이다. 앞서 언급한 연극 감상이랄지 자살, 법정 씬들과 같은 장면들은 시대에 거쳐서 두 번씩 반복된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천카이거가 그렇게 유사한 장면들을 이어 붙임으로써, 이 같은 과오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만 시간만 흘러갈 뿐인 아둔한 20세기 현대사를 암시적으로 가리킨다. 구조 속에서 절망을 느끼고 목을 매고 사망하는 개인들의 자살은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반복되고, 나를 희생하여 상대방을 변호하던 과거의 법정은 이제 나의 생존을 위해 상대방의 음해와 폭로로 변질되며, 극복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퇴락한다. 퇴보하는 역사를 드러내는 연출인 오버랩과 더불어, 시대가 거듭함에 따라서 나타나는 상징들이 있다.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으로의 이행은 갓 난 아기였고, 일제의 침략은 두지와 시투의 결별이었으며, 해방은 사부님이 죽고 새로운 시대를 맞는 것이었다. 또한 중화민국의 폭정은 주샨의 유산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지 못한다는 것을, 문혁은 자라난 갓 난 아기인 샤오쓰가 자신을 키워준 역사를 배반하고 이념의 바람잡이가 되는 것으로 역사의 메타포를 구성했다. 문혁을 악랄하게 여기는 것도 샤오쓰가 자신을 살려주고 길러준 이들을 적으로 삼고, 그들에게 칼을 겨눴기 때문이다. 한편 그것은 천카이거의 자전적 이야기의 투영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문혁 당시에 홍위병으로 가담했던 경험이 있는 천카이거는,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와 반목했다고 한다. 이에 자신의 치기 어렸던 시절과 역사를 반성하는 상징으로도 읽혀진다.


이 같은 부모를 전복하는 패륜에 다름 아닌 문혁에 이르러 모든 것은 불살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한 그들은 다시 한 번 연극을 시연한다. 늙어버린 그들이 행하는 연극은 이전처럼 완벽할 수 없다. 마지막까지 천카이거는 예술과 삶을 이어놓는다. 그리고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데이로부터 두지로의 해방이 이뤄진다. 물론 그 해방은 곧 두지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연극과 현실은 언제나 긴밀했으니, 특히 사부가 마지막까지 연극을 시연하며 사망한 것을, 늙은 두지와 시투의 마지막 연극에 상응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살아서의 해방이라면 문혁과 결별한 덩샤오핑의 개혁체제를 비호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죽음이라면 천카이거가 아슬아슬하게 검열을 피해 남겨낸 당대의 비판일 가능성도 있다. 이전 작품들에서 이뤄진 간접적 체제비판처럼 말이다. 이렇게 천카이거는 경극을 통해서 중국의 20세기를 관통한다. 여러 역사 중에서도 혁명의 이름으로 오도된 폭동이야말로 그들의 정체성에 멍에와, 애정의 옆자리에 공백을 만들었다. 본 작품에서 문혁이 가장 날카롭게 다뤄지는 이유는 천카이거가 샤오쓰라는 배역을 통해서 자전적인 역사를 투영하기 때문이요, 그것은 부모로서의 역사가 키워낸 강아지가 늑대로 돌변하여 패륜을 저질렀다고 보는 입장을 띠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사는 곧 당대의 생활세계를 담아낸 예술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전 작품에서처럼 천카이거는 예술과 현실의 밀접한 관계를 둘 사이의 미묘한 경계로서 풀어낸다. 그리고 당대까지의 작품세계를 정리하는 듯한, 조화를 강조하는 종합예술이라는 일련의 주장을 설파한다. 다만 그것의 아리송함이라면 오직 상업성이나 오락성에만 천착하는 그의 근작들 또한, 직접적이고 적나라하며 진실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과거의 자신이 행하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이전 작품들과 천카이거가 매너리즘으로 향하는 변곡점이 된 본 작품과의 대비를 펼쳐낸다면, <패왕별희>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다만 그렇게 엄격하게 보지 않는다면 여전히 천카이거 최후의 작가성이 드러난 수작에 다름 아니다. 또한 장국영의 기일인 만우절에 감상하는, 특히 <해피 투게더>와 더불어 어쩌면 가장 자전적이었을지도 모르는 본 작품을 통해 마주하는 그의 초상에는 어딘지 모를 쓸쓸함과 수심이 더욱 깊이 스며있는 듯하다.




글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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