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야만 깨어날 수 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365
https://www.youtube.com/watch?v=1ufZcULu_cQ&feature=emb_title
영화 <사마에게>는 여러가지로 영화 <가버나움>을 떠오르게 만든다. 영화가 다루는 요소가 일차적으로 곤경의 당사자라는 점, 극이 아니라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점처럼 영화 내적인 요소에서 둘은 유사하지만, 영화를 둘러싼 외부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가버나움>의 경우 우리는 이와 같은 불길한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혹시 이 영화가 이른바 ‘빈곤 포르노’인 것은 아닌지. 김지미 영화평론가가 제기한 내용처럼, “일단 이 영화가 야기하는 일차적 불편함은 형식에서 기인한다. 관객의 감정을 쥐어짜내기 위한 공식처럼 감상적인 배경음악을 기계적으로 활용하고,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의 존재에 동의했는지 알 수 없는 피사체들의 무기력한 눈빛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사운드와 이미지의 조합이 요구하는 감정이 너무 선명해 민망할 지경이다.”(김지미, “<가버나움>, 베이루트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계, 씨네21) 대체로 영화가 제기하는 내용에 관하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영화의 형식에 관하여는 끝내 경계를 거두지 못했다.
영화 <사마에게>는 어떨까. 빈곤과 불행을 과도하게 전시함으로써 특정한 감정을 도출해내려는 ‘빈곤 포르노’라는 규정을 <사마에게>로 가져다대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자연스러운 의문일까. 나는 먼저 이 점을 고민했다. 그러면서 <가버나움>과 <사마에게>의 한가지 차이점이 문득 떠올랐다. <가버나움>이 철저히 외부인의 시선으로 레바논 사회를 들여다봤다면, <사마에게>의 시선은 명백히 고통을 겪(고있)는 사건의 당사자라는 것. 그러니까, 외부자가 특정한 목적(모금 마련, 동정심 유발 등)을 달성하기 위해 불행을 과도하게 전시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면, <사마에게>는 고통의 당사자가 그 자신의 삶을 있는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벗어날 수 있진 않을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영상 속 주인공이 자신의 포르노를 직접 과시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 영화가 ‘빈곤 포르노’인지 아닌지에 관한 기준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가 외부인/내부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선정적인가, 아닌가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사마에게>는 선정적인가? 그렇다. 선정적이다. 선정성이라는 것이 본래 무엇인가. 부채질할 선(煽),감정정(情). 선정성은 곧 어떤 류의 감정을 부채질한다는 것. 어떤 감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유도하거나 부추긴다면 그것은 선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감정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선동이 되고. 선정과 선동, 둘 모두 개인의 자율성(감정과 행동을 통제하는)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이라고 할만하다. 대개 ‘신파영화’라고 하는 영화가 ‘깊이가 없다’라는 차원을 넘어, ’비윤리적이다’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 감정을 창출해내는 과정이 마치 공산품을 제조하듯이 ‘제조공정’이라는 것이 메뉴얼로 관습화되어 있기 때문만 아니라, 의도한 감정 외의 다른 감정이 개입될 여지를 아예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런 장면/영화는 ‘지시적’이다. 지시받지 않은 감정은 존재할 수 없다.
<사마에게>는 지시적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특정 감정을 ‘가리키는’ 장면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가 지시하지 않은 감정마저도 느꼈다. 그럴때마다 나는 영화의 ‘자극적인’ 장면으로 끌려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영화가 나를 뒤로 물러나게 만드는 듯한 감정도 느꼈다. 마치 ‘당신은 내 삶을 살아본 적 없잖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지독한 담담함같은. 나는 이 영화에 대한 ‘불행 포르노’라는 불길한 눈초리를 거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로 했다. 그러자 영화는 내가 예감할만한 감정 외에 훨씬 다층적인 감정을 건넸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흘리는 피, 유산된 아이, 생명을 얻은 아이, 그리고 알레포. 영화를 보면서 내 감정은 이런 요소들에 감응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일까 고민했다. 아마도 그것은 바로 내 이중적인 해석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함께 했다.
먼저 피. 시시각각 감행되는 정부군의 포격으로, 그곳 사람들은 언제 누가 다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늘 긴장하며 일상을 산다. 끊임없이 매일마다 누군가가 피흘리는 모습을, 너무 많이 흘려 숨진 모습을, 와드 감독은 다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피는 그렇게 알레포 사람들의 일상으로 고요히 스민다. 특히 많은 피를 마주하는 사람은 함자인데, 그는 알레포에 남은 마지막 병원 의사로 포위된 20일동안 890건의 수술, 총 6천명의 환자를 치료했다고. 그러느라 병원 바닥에는 저마다 다친 사람들이 흘린 피들이 군데군데 범벅이 되어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검붉은 피가 어둡고 절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정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이상할 정도로 뭉클한 감정이었다. ‘그러니까 저기에, 생명의 증거가 있구나.’ 같은. 저렇게 명료한 생명의 증거를 보면서도, 어떻게 사람을 파괴할 수 있는지, 으스러뜨릴 수 있는지. 그래서 권력자들은 눈 먼 장님이다. 보면서도 못 본다.
그리고 알레포. 영화가 나를 뒤로 물러나게 만든 순간이 또 한번 있다. 정부군에 의해 포위된 이 도시에서 매순간 어떤 생명이 스러지고, 바로 그순간 어떤 생명은 새로 태어난다. 뱀과 뱀이 각자의 꼬리를 무는 것처럼, 죽음과 탄생이 순환된다. (영화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다루면서, 동시에 갓난아기가 새롭게 탄생하는 모습도 많이 담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감정의 매무새를 다잡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동정하고만 있었구나. 이것이 나도 모르게 그들을 참혹한 존재라고 단단히 규정했던 것이구나’라고 반성하게 되었다. 그럴 때, 카메라는 갓난아기의 웃음을 담는다. 이곳에서도 생명이 존귀하게 살고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느끼는 행복과 기쁨, 환희와 아픔을 이곳에서 역시 모두 느끼며 살아간다고. 영화는 그렇게 나를 정중하게 꾸짖었다.
그러니 <사마에게>에서, 절망과 아픔을 다룬 ‘슬픈영화’라는 규정이 비껴나도록 해주자. 이건 절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영화이지, 영원히 절망에 머무는 영화가 아니니까. 기어이 절망을 뚫고 나아가서 생존하겠다는 결연한 희망이 영화에 깊게 배어있다. 신형철은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 책에서 ‘잠’과 ‘깨어있음’의 변증법을 이렇게 인용한다. “‘잠은 밤을 가능성으로 변모시킨다. 깨어 있음은 밤이 오면서 잠이 된다. 잠을 자지 않는 자는 깨어 있을 수 없다. 깨어 있음은 항상 깨어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왜냐하면 깨어있음은 ‘깨어남’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블랑쇼, «문학의 공간», 재인용) 그는 인용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므로 이런 역설이 성립한다. ‘항상 깨어 있으면 진정으로 깨어날 수 없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32.)
잠과 깨어남을 ‘절망과 희망’의 관계에 대입시키자. 자야만 깨어날 수 있다. 절망에 있어야만 희망할 수 있다. 항상 희망에 있는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그 희망을 더 확실하고 명료하게 경험하기 위해 절망에 들어앉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은 안다. 이 말이 굉장히 공허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고통의 당사자에게는 경멸스러운 문장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이 생각이 그들의 존귀한 생명을 가치에 걸맞게 예우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피가 죽음의 표시가 아니라, 생명의 증거인 것처럼. 황폐와 죽음을 겪었으면서도 끊임없이 도시와 사람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그곳 사람들 저마다의 선의처럼.
글 아트렉처 에디터_이정식
Artlecture.com
Create Art Project/Study & Discover 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