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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Jul 17. 2020

같지만 다른 미지의 얼굴들 - 부천국제영화제 상영 특집

후카다 코지, <옆얼굴>(A Girl Missing)

https://artlecture.com/article/1764


2020년 부천국제영화제 상영특집

영화제소개: https://artlecture.com/project/5140



“사람들은 외상적 체험을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지탱해 왔던 토대가 흔들리는 사건으로 경험하면서 완전한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때 그들의 정신은 현재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를 포기하고 지속적으로 과거에 매달립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우리는 아주 강렬한 측면을 마주할 수 있는 영화를 때때로 만나곤 한다. 먼저 이제는 프랑스 영화의 고전이 된 아녜스 바르다의 데뷔작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에서의 옆얼굴이 있다. 두 연인이 다뤄진다. 하지만 두 연인이 살아온 세계가 다르고, 또 그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다르다. 미술을 전공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이를 마치 피카소와 브라크가 선도한 20세기 초반의 큐비즘 회화가 연상되는, 측면과 정면의 결합으로 보여준다. 정면을 향하고 있는 이는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이를 바라보지만, 이들의 시선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서로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3차원의 영화이지만 회화의 2차원성을 강조한 큐비즘을 빌려온 것을 생각할 때, 정면과 측면의 두 인물들은 서로 다른 '시점'에 놓이는 것이리라. 또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에서 나타난 측면과 뒷모습도 인상적이다. 고다르는 관객들의 몰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작품을 향한 비판적 거리두기를 강조한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이어올지에 대한 미학적 모색으로 이 같은 옆얼굴을 제시하였다. 그녀의 측면과 뒷모습은 관객들의 투영을 거부하고 있으며, 그녀가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호하다. 마찬가지로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계승한, 뉴 저먼 시네마의 선봉장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측면은 어떤가. 물론 그는 측면보다 정면을 선호한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를 측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속적으로 위치를 바꾸며 상대방과의 대화, 시선을 거부하는 인물들은 영화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측면을 띠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고전들에서 살펴 볼 수 있는 측면의 성격이 바로 단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측면을 소재로 한 작품이 일본에서 펼쳐진다. 바로 후카다 코지 감독의 <옆얼굴>이다.





*후카다 코지

1980년 일본 태생의 후카다 코지 감독은 자국의 중견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의 제자로서 그의 영향을 적나라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기요시가 탐구하는 스릴러와 서스펜스에 대한 관심, 공포와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한 탐구를 코지도 계승하고 이어간다. 이러한 코지의 대표적인 두 작품으로 <하모니움>과 <바다를 달린다>를 꼽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기요시가 <크리피>와 같은 작품에서 탐구하는, 표피를 넘어설 수 없는 싸이코패스들의 심리에 대한 탐구와 그들을 마주하는 불안이 도드라진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해안가로의 여행>과 같은 기요시가 선호하는 공간성과,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다뤄진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힘에 대한 탐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코지의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방문', 특히 미지의 존재의 방문이라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이를 마주하는 후미에의 입장에서 그 존재의 속내와 진위를 파악할 수 없는, 불안을 자아내는 인물이다. 방문한 존재의 진실이 선의로 둔갑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지 못하고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며,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의도를 품고 있는 뒤틀린 관계망은 어긋나고 균열을 일으켜 파국으로 치닫는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 방문에 대한 환대를 보여준다. 여러 언어들이 사용되어 그것이 오해를 팽창시키기도 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털어놓음에 난관을 딛고, 오히려 서로가 염원하는 상황으로 나아간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이방인들의 방문과 이에 대한 환대에 세계는 더욱 풍족해지며, 또한 그들에게 방문한 자연은 우리에게 시련을 안겨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환대한다면 다시금 생명을 부여할 것임을 보여준다. 이 같은 방문과 환대가 후자에서 긍정적임에도 불구하고 후자에서의 인간은 비교적 악독하게 그려진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환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이내 곧 자연을 넘어서 동등한 인간으로까지 확대된다.





*두 개의 얼굴

쓰나미 이후에 생명을 피워내는 자연과, 전쟁과 침략, 타 인간의 착취를 일삼는 인류의 야욕, 양자 중 어느 것이 더 끔찍한 재앙인가? 그리고 이 같은 코지의 인간간은 <옆얼굴>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일단 영화의 연출은 <하모니움>과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대상의 심리와 감정을 읽어낼 수 없던, ‘얼굴의 모호함’을 펼쳐낸 <하모니움>으로부터 이어지는 본 작품은 측면이라서 더더욱 알 수 없는 미지의 반대편 얼굴을 탐구한다. 그리고 <하모니움>에서도 인적이 드물고 삭막하게만 느껴졌던 건물들이 작품의 서늘한 분위기에 일조했던 것처럼, 본 작품도 차갑고 삭막하게 느껴지는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를 펼쳐낸다. 이를 포착하는 연출 자체에는 대단한 기교가 묻어있지 않다. 심플한 움직임 하에 주가 되는 것은 롱테이크다. 하지만 편집에는 나름의 실력이 묻어난다고 할 수 있다. 현재와 과거를 섞어놓는 정교한 편집, 특정한 현재를 지배하는 과거를 드러내기 위한 서로 유사한 미장센들이 세밀히 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다른 쪽 측면을 확인할 수 없는 그 옆얼굴의 비밀들에 상응하는 듯한 모호함과 여지를 공백이 생겨난 편집들로 남겨놓고 있다. 이 같은 연출을 바탕으로 포착하는 본 작품의 ‘옆얼굴’은 이치코다. 이러한 그녀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포착되는 미용사에게 자신을 본명 대신, 우치다라는 이름으로 소개한다. 미용사는 이치코로서의 그녀를 모른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우치다라고 불리는 그녀의 반쪽짜리 용모일 뿐이다. 이치코는 그에게 자신이 사는 빌라도 달리 알려준다. 이러한 두 개의 얼굴을 갖는 것은 비단 이치코 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측면에서 마주할 수 없는 반대편 너머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치코가 돌보는 치매 할머니의 경우에는 현재 화가인 자신이 아니라, 과거 임산부였고 어머니였던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과연 그녀를 후자로 바라보는가?



*방문과 퇴장

그리고 시간뿐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도 그렇다. 이치코는 술을 마셔 의식이 흐릿해졌을 때,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인 꿈으로 이행한 상태에선 개가 되기를 원한다. 타인을 공격할 수 있는 위협적인 개의 열망을 영화 속 인물들은 모른다. 오직 자신과 관객만이 안다. 하지만 관객들도 모르는 것들이 있다. 영화가 오롯이 이치코의 시점에서 전개되기에, 모토코나 타츠오의 심리가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가늠할 수 없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마주하기 보다는 오히려 나름의 주관성과 그들의 행동에 다름 아닌 흩어져있는 동기들을 바탕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코지의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방문'에 의해 한쪽 측면과 다른 쪽 측면이 달라진다. 현재의 미용실 방문과, 과거 직장의 방문에 이치코의 얼굴은 각기 달라지고, 또 모토코에게 이치코가 방문한 상태와 '퇴장'하려는 상태에서 모토코의 얼굴도 달라진다. 하지만 이치코는 조명으로부터 역광을 띠며 자신에게 비밀의 은닉을 요구하였던 모토코의 측면이 다른 쪽 측면으로 달라질 거라 차마 예상하지 못한다. 단순히 보호사를 마주하는 친절한 얼굴에서, 어머니 내지는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뜨거운 얼굴을 말이다. 우리가 이 같은 측면을 마주한다는 것은 곧 대상의 내면을 꿰뚫어볼 수 없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대상의 표면에 떠오른 요소들만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이 옆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정면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 같은 외피 너머의 내면과 속내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는 것, 최소한 그 노력을 의미할 것이다. 이치코가 돌보는 노령의 할머니의 의중을 딸은 알지 못한다. 그녀는 다만 어머니가 고집을 피우는 것 같다. 하지만 이치코는 그녀의 의중을 읽어내려 노력하며, 측면만 바라보던 서로의 시선은 정면으로 극복된다.



*매개물을 통해 전달되는 얼굴

하지만 이치코는 조카 타츠오가 무슨 욕망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훗카이도에 간다는 그의 발화를 그저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또 모토코가 이치코에게 제안한 바를 그녀는 곡해해서 받아들인다. 이치코가 마주하는 모토코의 얼굴은 보호자의 손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않는 익숙한 얼굴들과 발화들은 수긍하고, 반면 낯선 얼굴이 내뱉은 당황스러운 발화들이 무시됨에, 우리는 또 다른 옆얼굴의 가능성으로 넘어설 수 없다. 그리고 개인이 갖는 이러한 얼굴들은 상실되어 간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치매에 걸린 보호자의 이야기와 타들어가는 담배에 카메라는 집중한다. 이 같은 이야기와 시각적인 숏에는 소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 할머니가 갖는 얼굴은 소멸되어가고, 반면 과거에 가졌던 얼굴들로 줄곧 회귀해간다. 그녀의 ‘그림’이라는 매개물이 없었더라면 현재까지 성취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할 것이다. 이치코도 그렇다. 모토코 일가에서의 사건이 있던 이후에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지워내고 현재에 새롭게 변신한다. 이렇게 영화는 매개물을 강조한다. 온당 독립적으로 대상의 다른 얼굴을 마주할 수 없기 때문에, 부풀어 오른 배와 같은 상징들을 바탕으로 그들이 가진 다른 얼굴들이 환기되곤 한다. 발화나 행동들도 그렇다. 하지만 이 매개물들의 부재에 미용사는 이치코가 강간마의 이모이자, 아동성추행범이라는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가 대상의 얼굴을 바라보는 방식을 탐구한다. 미용사와 모토코를 훔쳐보는 이치코, 하지만 그녀는 멀리서 어렴풋이 그들을 바라본 것뿐이다. 심지어 깜빡거리는 조명은 그 시선이 대단히 불완전함을 암시하듯 불길하게 느껴진다. 이에 이치코의 복수는 실패로 돌아간다. 또한 그들의 시선에서는 이치코를 바라볼 수 없었기에, 특히 미용사는 그녀의 다른 옆얼굴만을 마주했기 때문에, 다른 측면이 진행하는 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주관적인 얼굴의 해석

즉 우리는 대상이 이모라는 정보나, 흠모한다는 사실들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드러나 있는 파편들로 대략적인 유추만이 가능한 실정이다. 마치 퍼즐처럼, 하지만 다 맞춰지지 못한 할머니의 미완의 퍼즐처럼, 또 치매와 담배가 보여주는 그 퍼즐 조각들의 소멸에 의해, 우리는 어느 정도의 형상과 마주할 뿐 온전히 맞춰진 얼굴과는 영영 마주하지 못할 것만 같다. 또한 이 퍼즐 맞추기는 주관적이다. 이치코는 미용사와 함께 모더니즘 화가들의 작품전시에 간다. 거기서 표현주의적인 화풍으로 그려진 해바라기를 마주한다. 그리고 이치코는 해바라기가 화가에 따라서 각기 달랐다고 말한다. 즉 똑같은 대상이어도 그것이 갖는 각기 다른 속성을 바라보기에, 개개인들은 같은 것을 바라봐도 서로 달리 생각한다. 그들은 주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이 같은 시선은 곧 해바라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될 것이다. 이치코가 타츠오가 행한 범죄에 영향은 줬을지 몰라도, 그의 공모자는 아니다. 오히려 이치코는 타츠오에게 가해자지, 사키에게 가해자는 아니다. 하지만 언론과 대중은 자신들의 추측만으로 그녀를 사키에 대한 가해자와 공범으로 몰아세운다. 또 모토코가 이치코에게 전한 나체 이야기 속에서도 각자가 주목하는 것이 달랐으며, 이치코가 두 번씩 향한 동물원에서 코뿔소를 마주하고 연상하는 발화도 각기 다르다. 개개인의 주관성에 의해서, 또 한 개인도 주관성이 두 개의 옆얼굴처럼 각기 다르기에 이에 따라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대상이나 사건 자체를 결코 객관적이고도 중립적으로 접근하기가 어렵다. 모토코는 이치코에게 호의적이었을 때는 납치사건에 대해서 그녀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설파했으나,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키자 금세 사건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의 퍼즐 맞추기의 해답은 영영 미궁에 빠진다. 퍼즐 자체에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성을 거기에 투영하여 서로가 다르고, 또 우리의 감정마다 다른 결과물이 도출되기에, 기자가 이치코를 대하는 태도처럼 대상을 우리의 판단에 끼워 맞추기 때문에 말이다.



*과거의 지배

이 같은 판단의 주관성은 곧 개인의 과거가 좌우한다. 영화는 미용사를 만나는 이치코의 현재와, 그 현재를 지배하고 행동의 당위성이나 명분이 되는 과거를 교차하여 펼쳐낸다. 이러한 과거는 이치코의 차에 묻은 빨간 페인트처럼 결코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끈질기게 남아서 그들의 현재를 규정한다. 이치코의 현재는 오직 모토코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 속 우리가 모르는 모토코의 얼굴과 행동 중 하나는, 과연 그녀가 이치코와 기자를 연결했냐는 것이다. 기자에게 전화가 오기 전 이치코는 모토코를 만나서 그녀에게 실망을 주었다. 또 이후에 한 번 더 모토코의 입장에서 배신이 일어났고, 그 이후에 모토코가 이치코에게 취한 행동이 있기에, 그녀가 충분히 기자와 이치코를 연결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택시 안에 놓인 이치코를 눈여겨본 어떤 기자가 분명 존재 했기에, 모토코가 기자에게 이치코의 정보를 밝힌 것이 아니라, 기자가 스스로 이치코에게 찾아왔을지 모른다. 우리가 모토코에게 확실한 것은 tv 뉴스에서 포착된 그 발화이지, 기자의 누설은 다만 추측이다. 하지만 이치코의 복수는 기자도 아니요, 환자의 손녀를 강간하여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빠뜨린 타츠오도 아닌, 오직 모토코에게 향한다. 이치코의 복수는 과거의 전이를 보여주는데,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모토코와 사키, 그리고 그녀들의 어머니에게서 포착되는 바는, 모토코가 그 둘을 질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모토코는 온당 제 몫의 사랑을 못 받는 것 같다. 특히나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에서 가장 어린 날의 욕망은 어머니를 향했을 테지만, 어머니의 손길은 손아래 동생에게 향해 그녀의 바람은 불발되었을 것이다. 즉 모토코는 사키에 의해 채워지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어머니에 대한 결핍과 사랑이 곧 이치코에게 전이되고 있다. 타츠오도 마찬가지다. 이치코가 유년기에 발기된 그의 남근을 바라본 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현재의 범죄에 분명한 영향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장성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성을 착취해도 된다는 의식을 심어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복수의 대상은 전이되어 사키에게 향한다.



*희생양들의 복수

무엇보다 이에 대한 저항은 대부분 그 당시에 일어나지 못한다. 타츠오는 당시에 이치코에게 저항하지 못했으며, 이치코도 모토코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자신의 직장과 집에서 물러서야만 했다. 이러한 그들은 과거의 앙금이 현재에 끼워 맞춰진 상태의 좁은 시야로 세상을 굽어본다. 이들의 복수는 마주해야할 대상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타츠오는 이치코가 아니라 사키를, 이치코는 모토코가 아니라 미용사를 바라보며, 마치 언론이 타츠오가 아니라 이치코를 바라봤던 것처럼, 가해자는 저 멀리 사라지고 또 다른 피해자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가해자의 정면이 아니라 그 주변의 측면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모토코는 그런 점에서 현재에 유일하게 이치코에게 저항한 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저항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이와 무관한 사키와 타츠오가 매개되어 있었으며, 이치코에게 어머니나 욕망을 투영한데서 비롯된 반발이었다. 즉 영화 속 인물들은 표적을 잘못 삼고 있거나, 대상을 바라본다 해도 왜곡된 측면으로 바라본다. 무엇보다 대상들에 깊이 의미를 두어, 한 대상의 어떤 얼굴이 자신의 삶에 너무도 큰 영향을 준다. 간호사가 된 모토코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상에게 자신의 의미를 지나치게 투영할 시에, 그 삶은 파멸로 치닫는다. 복수의 좌절에 이치코는 자살기도를 하지 않던가. 또한 본 작품은 <하모니움>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는데, <하모니움>의 주제의식 중 하나는 자신의 죄는 희생양이 아니라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희생양들이 타인의 죄를 짊어짐에, 복수는 팽창되고 결코 단죄되지 않는다. 본 작품은 이러한 <하모니움>의 탐구를 연장해와, 희생양들과 복수의 확장에 따른 끝나지 않는 비극을 포착한다. 그래서 복수가 아니라 경적을 쌔게 울리는 방식으로, 타츠오처럼 사과를 결심하거나 이치코가 타츠오를 품어내는 방식으로, 모토코가 이치코를 향한 그리움을 간호사가 됨으로써 스스로가 짊어지는 방식처럼, 타인이 아닌 내가 죄의식을 짊어지고 이를 해소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희생양들을 발생시키고, 복수는 또 팽창하고 확장될 것이니. 가해자로서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피해자로서 자신의 복수심을 무해하게 해소시키는 일, 그럼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과거가 씐 현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정리

이러한 본 작품에서 분명 서로는 똑같은 종이요, 유사한 존재들이다. 최근 기요시의 작품들에서 대두되는 종이 다른 존재들도 아니요, 또 코지의 전작 <바다를 달린다>에서처럼 초자연적 존재도 아니지만, 그 친밀한 대상들이 때로는 낯설다. 우리는 그 대상의 절반만을 마주한 것 같다. 오직 옆얼굴만을 마주해서, 우리는 대상의 다른 옆얼굴을 모르는 것만 같다. 그리고 얼굴은 시간에 따라서, 또 방문에 따라서 얼굴이 달라지기에, 나의 시간과 방문을 넘어선 대상의 얼굴은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또한 한 개인의 얼굴 너머에 내재한 내면의 얼굴을 우리는 모른다. 내가 마주한 타인의 옆얼굴의 이면에는, 타인 스스로가 형성한 실재의 얼굴이 놓여있을지 모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에 대한 무지의 영역에 나 자신의 과거나 사고, 주관성을 투영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상 스스로가 어떤 얼굴들을 은닉하기에 다른 얼굴을 모르기도 하지만, 나 자신 때문에 그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오해에 의해 다른 대상들에게 피해를 일으키니, 결국 우리는 명확한 대상의 정면을 현재에 바라보는 수밖에 없으리라. 이러한 본 작품은 <바다를 달린다>보다도 <하모니움>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 너머에 내재한 각자의 비밀들이 드러나며 삶의 균형이 깨지는 과정, 모호한 얼굴의 이면을 알 수 없는 시선의 한계, 그리고 부모의 죗값을 자식들이 치러야 했던 <하모니움>에서처럼 타인의 죗값을 감당해야만 하는 희생양들의 비극과 복수의 여정이 그렇다. 이러한 본 작품에선 분위기나 장르적 특성에서 여전한 기요시와의 유사성이 포착되곤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성이나 타인에 의한 죄의식 등 기요시와 차별화되는 일련의 색채와 탐구가 도드라지고 있으며, 그래서 기요시와 구별되어가는 코지의 세계관이 서서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트레일러

https://www.youtube.com/watch?v=9_CZOp-uwS8&feature=emb_title




글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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