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렉처 ARTLECTURE May 05. 2021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https://artlecture.com/article/2251



클리셰적인 단어로 말을 빗대보자면, 근래 들어 이렇게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 전시는 또 없지 않았나 싶다. 마치 마음의 양식을 쌓는 도구로 독서를 선택하듯 예술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매개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를 그 후보지에 넣어 본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진행중인 이 전시는 1930-1940년대 경성이라는 시공간을 중심으로, ‘문학’과 ‘예술’에 헌신하며 이 역설적인 시대를 살아 내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하는 일제 강점기는 통상적으로 ‘암흑’의 시대, ‘절망’의 시대로 인식되어 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아려오는 그 시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아픈 상처를 들추는 것으로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필자 역시 갖고 있었다.


이 시대는 이전의 전통 사회와 지금의 현대 사회를 잇는 엄청난 변혁의 시기로, 상상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신문화의 충격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튕겨냈던 ‘역동’의 시대였다. 그렇기에 빠르게 착륙한 서양의 새로운 사상, 철학, 지식, 문화가 이 시대의 젊은 문학인과 미술인들을 자극했고 매료시켰다.





제 1 전시실에서는 ‘전위와 융합’을 주제로 시대의 스토리가 펼쳐진다. 1933년 이상은 경성의 종로에 다방 ‘제비’를 열어 주변의 예술가들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특별한 장식이 없이 ‘희멀쑥한 벽’에는 온통 누런색을 띤 우울한 인상의 이상의 자화상과 그의 화우 구본웅의 야수파풍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장 콕토의 경구가 쓰인 액자가 붙어있을 뿐이었다. ‘제비’를 둘러싼 예술가들은 프랑스의 에꼴 드 파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방과 술집에 모여 앉아 부조리한 현실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 인식을 공유하며, 함께 ‘지식의 전위’를 부르짖은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 유 – 모어 콩트라지만 그러나 이것은 슬픈 이야기다. (중략) ‘제비는 이를테면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슬픈 찻집이요 또한 이상은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슬픈 동무이었다. (중략-얗게 발라 놓은 안벽에는 실내장식이라고 도무지 이상의 자화상이 하나 걸려있을 뿐이었다. (중략온 아무리 세월이 없느니 손님이 안 오느니 하기로 그처럼 한산한 찻집이 또 있을까

-박태원 「자작자화 유모어콩트 제비」 상, 『조선일보』, 1939.2.22.



구본웅, 인형이 있는 정물, 1937, 캔버스에 유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상의 찻집 벽에 이상의 자화상 외에 또 종종 걸려있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화우 구본웅의 야수파 그림. 그는 시인 이상과 서울 신명학교 재학시절부터 친교를 맺어 평생 함께 어울렸던 죽마고우였다. <인형이 있는 정물>은 그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개인전 등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를 운영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정확한 소장이력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작품이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 중 하나에 걸려있었다가 그 다방을 그 그림과 함께 인수한 사람으로부터 재구입한 것이라고 전한다. 테이블 위에 신문과 잡지, 목각인형과 서양 과일이 아무렇지 않게 겹쳐져 놓여 있다. 잡지 중 하나는 프랑스의 유명한 미술잡지인 『Cahiers d’Art』이다. 당시 예술가들은 실제로 일본을 통해 프랑스의 미술, 영화, 문학 등을 익히 알고 있었고, 거의 동시대적으로 향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1930년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현대성’의 징후들을 이미 모두 체험하고 흡수하고, 또한 거기에 반응했던 시기였다.


제 2 전시실에서는 지상(紙上)의 미술관이 펼쳐진다. 1920-1940년대를 중심으로 한 ‘인쇄 미술’의 성과를 보여주는 이곳은 3.1운동 이후 설립된 민간신문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들과, 당대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신문소설의 삽화가들이 만나 이루어 낸 특별한 ‘조합’의 결과물이 보여진다.




『 틀을 깨고 인민 속으로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가장 새롭고가장 강력한 미술양식에 인쇄미술이 있다

- 정현웅, 「틀을 돌파하는 미술」, 『주간서울』, 1948.12.20.





탁상 위에 문인들의 시를 엮은 인쇄본이 자리한다. 직접 종이를 넘겨가며 그 시대 고유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데, 그 큰 역할을 한 건 테이블에 올려진 전등이지 않을까 싶다. 초롱불 아래서 그 시절을 담아냈던 그들의 모습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종이에 안착해 관객과 소통한다. 가난하고 모순으로 가득 찼던 시대 한가운데에서도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풍요롭고 ‘귀족적’이었던 그들의 멋진 신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 더불어 윤동주도 필사해서 봤다는 100부 한정판 백석의 『사슴』에서부터 김소월의 『진달래꽃』 , 서정주의 『화사집』 ,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당대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켰던 책들의 원본을 감상할 수 있다.


제 3 전시실에서는 1930-1950년대 문인과 화가들의 개별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조선일보사 편집실의 옆자리에 앉아 순박하고 아득한 시의 세계를 갈구했던 시인 백석과 당대 최고의 장정가, 삽화가였던 장현웅의 조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 잡지 『여성』의 편집자로 함께 일했는데, 당시 『여성』은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 잡지에 실린 백석 시, 정현웅 그림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여러 채색 화문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아름다움과 감흥을 지닌 합작품이다. 정현웅은 편집실의 옆자리에 앉아 언제나 심각한 표정으로 작업하는 백석의 조각 같은 옆얼굴을 그려 『문장』(1939.7)에 발표한 적이 있고, 백석은 만주에 머물 때 정현웅에게 시[북방에서]를 헌정하기도 했다.




이중섭, 시인 구상의 가족, 1955, 종이에 연필, 유채, 개인 소장




<시인 구상의 가족>은 가족과의 재회의 꿈에 부풀었던 이중섭이 그러한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을 때 극심한 ‘절망’ 속에서 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는 1955년 1월 개인전이 경제적 실패로 돌아가자, 이후 일본에 있는 아내와의 연락을 단절하고, 오래된 친구 시인 구상의 왜관 집에 머물러 있었다. 구상이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서 태워주자, 이를 몹시도 부러워한 이중섭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다. [전시 중 발췌]


제 4 전시실에서는 일반적으로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문학적 재능 또한 남달랐던 예술가 6인의 글과 그림을 함께 보여준다. 이 전시실에서는 각각의 예술가들의 그림을 보는 공간과 글을 읽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글과 그림을 모두 사랑했던, ‘두 개의 뮤즈’를 지녔던 예술가들의 다채로운 면모를 함께 감상함으로써, 이들의 내밀한 세계 속으로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 멍멍한 시간할 일이 없어 혼자서 맥주를 마시며 1월 31일에 쓰신 이산(怡山선생(시인 김광섭글월을 읽었어요왜 출판사가 나타나지 않을까빨리 이 봄에 시집을 내이고 해요그리고 한 권 보내주세요원색석판화를 넣어 호화판 시집을 제가 다시 꾸며 보겠어요.

... (중략)

요새 제 그림은 청록홍점밖에 없어요왼편에서 수평으로 한줄기 점의 파동이 가고또 그 아래또 그 아래그래서 온통 점만이 존재하는 그림이야요이 점들이 내 눈과 마음엔 모두가 보옥으로 보여요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쏟아져 오는데 왜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참 모르겠어요창밖에 빗소리가 커집니다

- 김환기가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 1966, 개인 소장



김환기, 무제, 1969-1973,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김환기는 처음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결정했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문학에 심취했던 화가이다. 이후 귀국 직후부터 여러 잡지에 화문과 삽화를 곁들인 수필을 발표했던 그는, 글과 그림 모두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대표적인 ‘문예인’이었다. 그는 한국의 여러 시인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1963년 뉴욕에 안착한 후에도 시인 김광섭과 여러 차례 편지를 교환하였다. 1970년에는 김광섭이 죽었다는 잘못 알려진 소식에 충격을 받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김광섭의 시 구절에서 따온 제목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1930년대부터 주요 잡지에 화문을 싣기 시작하여 그림만큼이나 감동적인 일기와 편지, 수필을 남겼던 화가 김환기의 작품과 편지들은 관람객을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그 시절의 위로를 전한다.


전시 구성부터 디피, 특히나 내용까지 완벽했던 전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느새 세월은 지나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들의 흔적을 찾고 기억하며 생각만 해도 아려오는 그 시대 역사를 들춰본다. 마음을 웅장하게 하고 아련한 향수로 발걸음을 붙잡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가 많은 관람객들과 함께 했으면 한다.


*전시는 2021년 5월 30일까지 계속됩니다.


참고 : 전시 중 발췌





글 아트렉처 에디터_uumin_ol

Artlecture.com

Create Art Project/Study & Discover New!

https://artlecture.com

매거진의 이전글 홍이현숙 <휭, 추-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