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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Feb 10. 2021

홍이현숙 <휭, 추-푸>

전시리뷰

https://artlecture.com/article/2092



인간의 인식과 합리성 저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동물은 숭배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는 호랑이, 사자, 소, 코끼리, 독수리 등 다양한 동물을 신성시하며 숭배했다. 또 동물을 사냥하여 고기와 털과 뼈를 얻고 가축으로 길들여 이동 수단이나 종교적 의식의 제물 등으로 사용했다. 가축화되지 못한 짐승은 오락 거리가 되거나 인간 생활에서 배제되었다. 설치, 퍼포먼스, 영상, 공공 미술, 전시 기획 등 30년이 넘게 광범위한 예술 분야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홍이현숙의 주된 관심사는 바로 이 소외된 비인간 생명체이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부차적 문제로 여기는 비인간 동물의 권리를 보장하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변화를 촉구한다.



2020년작 <여덟 마리 등대>는 8종 8마리 고래를 소재로 한 작업이다. 작품이 설치된 너른 공간은 어두컴컴하다. 노란 조명 하나에 시야를 의지해야 하는 공간의 한가운데는 작가의 방 크기와 같은 넓이의 뗏목이 있다. 뗏목에는 작가의 방에 깔린 것과 같은 노란 장판이 깔려 있고 그 한쪽에는 나무로 된 좌식 책상이 있다. 책상 위에는 만들다 만 흐린 팥죽색의 소조 작품이 하나 있고 그 밑에는 같은 재료로 만든 호랑이 상이 하나 있다. 장판에 앉으면 뗏목이 크게 흔들리고 방 한편에 있는 줄에 매달려 있는 방울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난다. 뗏목 위에 앉아서 관객은 귀를 곤두세우고 고래 소리를 듣는다. 관객은 몸을 통해 감각을 느끼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곳에 존재하는 대상을 인식한다. 그것은 나와 타자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독자적인 생활 양식을 유지해 온 고래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비인간 인격체이다.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관객이 수행하는 일련의 행위는 오랜 시간 동안 인간에게 희생당한 고래의 넋을 기리기 위한 진혼제와도 비슷해 보인다. 다른 존재와의 교감을 꿈꾸는 작가는 자신이 의식과 의지를 가지고 만들어 낸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일에 관객이 동참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한다. 고래 외에도 고양이, 호랑이, 사자 등 비인간 동물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다른 일군의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덟 마리 등대> 2020, 스피커 8대(사운드 13분 1초), 가변 크기




<사자 자세>와 <고래 자세>는 다른 방식의 삶에 관한 진지한 탐구를 통해 비인간 동물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는 작가의 욕망을 반영한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힘을 주고 모공과 치열, 입 안에 고인 침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작가는 인간의 원초적인 면을 끄집어내는 동물 되기를 통해 비인간 생명체와의 교감을 시도한다. 작가는 동물의 소리와 행동을 모방함으로써 감정의 응어리를 외부로 배출하고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사회적 관습에서 일시적이나마 벗어난다. 이 타자 되기라는 급진적이고 비약적인 행위의 수행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사고를 확장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완과 경직을 통해 본능적 감각을 깨우는 타자 되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왼쪽 <사자 자세>, 오른쪽 <고래 자세>




<사자 자세>, 2017,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4분 11초

<고래 자세>, 2018,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7분 7초




환경 오염,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등과 같은 전 지구적 의제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더라도 먹고 마시고 온갖 공산품을 소비하며 살다 보면 개인 생활의 어느 부분이 자연 파괴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연과 동물은 지배되고 통제되고 착취되는 수동적 존재로 분류된다. 수동적 존재는 약자이다.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재개발 지역인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위치한 석광사의 풍광을 담은 작업을 통해 작가는 약자로 살아가는 비인간 동물과 미시적 세계의 생태적 가치를 역설한다. <석광사 근방>에서 홍이현숙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몸짓을 흉내 냄으로써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정서를 체험한다. 비인간 생명체의 양태를 몸소 보고 듣고 실천함으로써 작가는 관찰하는 주체와 관찰되는 객체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인간 외 생물체를 할 수 있는 한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석광사 근방>202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5분 45초





홍이현숙이 인간 아닌 생명체에 깊은 관심이 있다고 해서 인간을 경시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이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고자 한다. 작가는 인간, 특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되고 폄하된 여성의 삶이 지니는 중요성에 대해서도 꾸준히 언급하고 있다. <구르기>는 자신의 방에서 굴러다니는 작가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 준다. 화면에서는 머리와 다리 같은 신체 일부만 볼 수 있다. 중심에는 노란 장판이 깔린 방바닥의 모습만 보일 뿐 아무것도 없다. 영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방 안을 구르는 작가의 모습은 화면의 가장자리에 존재하거나 때로는 아예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모든 중심 또는 주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이다. 작가는 온몸으로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중심성을 거부한다. 구르기라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행위를 통해 홍이현숙은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기존 질서와 권위로부터 탈피를 시도한다. 작가의 사회적 통념에 대한 탈권위주의적 저항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폐경 폐경>에서 소매가 없는 파란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작가는 담을 뛰어내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과감하게 뛰어넘는다. 많은 사람들이 폐경을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뛰어넘기라는 행위를 통해 작가는 여성을 단순히 생식 능력의 유무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 여성을 얽매는 모든 사회적 속박을 무위로 돌린다. 또 여성에 대한 대상화를 거부하고 스스로 주체가 된다.




<구르기>2006,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4분 14초,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사유는 주체와 환경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정신적 산물이다. 중심성과 권위주의에서 탈피하려는 홍이현숙의 사유는 자주 정치적 상황과 밀접히 결부된다. <조촐한 추모>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문옥주 할머니를 추모하는 작업이다. 작업은 직관적이고 명료하다. 작가는 할머니의 안녕과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두루마리 편지로 할머니의 무덤을 덮는다. 그리고 방울을 들고 무덤을 돌며 역사의 주변부로 밀려나 소외된 삶을 살았던 피해자를 위로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 생애에 걸쳐 타자화된 어떤 존재를 추도하는 <조촐한 추모>와 달리 <손 팻말 시위(피케팅)>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문제에 접근한다. 작가는 세월호 희생자의 수색을 촉구하는 팻말을 들고 번화가의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를 끈질기게 쫓아다닌다. 자신을 계속 쫓아다니는 작가를 보는 남자의 얼굴에 짜증이 서린다. 보도 위에서 쫓고 쫓기는 네 개의 발이 어느 순간 리듬을 타더니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같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긴장이 감도는 대치 상황은 순식간에 춤추는 무대로 변한다. 사회 체제를 흔들고 권위를 해체하는 작가의 비약적 퍼포먼스는 웃음을 유발해 작품을 보는 묘미를 더해 준다.




<조촐한 추모>2016,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6분 24초



<손 팻말 시위(피케팅)>2016,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9분 41초




<광화문 정물>에서 작가는 한낮에 수많은 사람이 바삐 오가는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아래 누워 있다. 사회 속에서 여성이 겪는 소외와 사물화를 비판하고 폭로하는 작업을 했던 작가는 스스로 정물이 되어 자기 부정을 통해 새로운 사유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거듭난다. <광화문 정물>에서 작업은 작가 자신이고 작가는 작업이 된다. 홍이현숙은 정물 되기를 통해 작업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여기서 정물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일상을 해체하고 상식을 파괴하고 헛웃음을 유발하는 유쾌한 존재자이다.

코로나19 창궐 이후 홍이현숙은 예술의 전달 방식에 대해 새로이 고민한다.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에서 작가는 놀이를 하듯 말로 석상의 상태와 감촉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미지에 천착한 지난날의 작업 양태에서 벗어나 작가는 시청각을 매개체로 삼아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비대면이 일상화된 시대에 작가는 시대의 조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청각을 중심으로 한 공감각적 경험이라는 새로운 작업 방식을 제안한다.

홍이현숙은 도식화된 삶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복시키는 작업으로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다. 때때로 진부하기까지 한 행위에는 열정이 존재한다. 어떤 때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집요하게 발언하는 작가의 수다스러움에 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아는 문제에 대해 계속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며 그에 대한 개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홍이현숙은 세월에 무디거나 바라지 않고 변신을 거듭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에 대한 경향성을 논하거나 특정 범주나 유형으로 구분하는 일은 별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세계에서 소외되고 억압받고 배제되는 다종다양한 존재에 대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온 작가는 어느 한 접근법에 매달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일상을 확장하고 파동을 만들어 낸다. 홍이현숙은 예술이란 무엇이며 그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며 지도에 없는 길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예술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직접적인 감각의 전이를 통해 자기 내면세계를 인식하고 작업으로 표출하는 것, 거기에 홍이현숙의 삶이 있다.


-이 글은 저작권법에 따라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필자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영리적 ㆍ 비영리적 목적이든 간에 글의 인용이나 게재를 금합니다.


*전시정보: https://artlecture.com/project/6164


글 아트렉처 에디터_나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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