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렉처 ARTLECTURE Jan 24. 2021

무엇을 그리는가, 어디로 향하는가

아우렐(Aurel), <조셉>(Josep) / 마이프렌치페스티벌 상영작

https://artlecture.com/article/2071


“그러나 일억의 사망자가 과연 무엇인지 알 듯 말 듯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란 그 죽은 모습을 눈으로 보았을 때에만 실감이 나는 것이어서, 오랜 역사에 걸쳐서 여기저기 산재하는 일억의 시신들은 상사 속의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알베르 카뮈-



*스페인 내전을 다룬 감독빅토르 에리세

스페인 내전을 영화의 배경으로 다루었던 시네아스트들은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스페인 내전에 헌신한 감독도 있다. 바로 스페인의 노장, 빅토르 에리세다. 그는 장편을 단 세 편밖에 내놓지 않은, 아직도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장편을 바라는 과작의 거장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이자 스페인의 전무후무한 명작 <벌집의 정령>의 경우 아이의 눈에서 스페인 내전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많은 것을 모방한다. 영화 속 자욱한 침묵과 소곤거림, 조심스러운 발걸음도 아이들이 어른들을 모방한, 스페인 내전 당시 드러나선 안 될 개인의 삶의 거울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심장과 눈을 가르친다. 하지만 시대는 아이들에게 감정을 앗아간다. <프랑켄슈타인>을 인서트 하는 영화,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처럼 괴물로 여겨지는 탈영병들, 하지만 진정한 괴물은 이러한 인간을 위협하는 파시스트들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다친 탈영병을 돌봐주는 소녀의 감정을 앗아감에, 시대가 감정을 가진 인간을 차가운 기계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는 속삭임과 인류가 사는 '벌집', 그리고 황홀한 황금빛은 손에서 놓을 수 없으니, 무엇보다 그 괴물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마음은 포기할 수 없으니, 폭주 기관차와도 같은 시대적 분위기와 소녀에게 맺힌 희망을 교차해서 보여준 작품이 바로 <벌집의 정령>이었다. 그리고 <벌집의 정령>을 기점으로 10년 이후인 1983년, 프랑코 독재가 막을 내린 이후 내놓은 작품인 <남쪽>이 있다. 프랑코 군부는 승리한 이후 북에서 남으로 전진한다. 이에 남쪽을 근거지로 삼던 혁명가, 운동가, 식자층은 불가피하게 북쪽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는 극 전체에 거쳐서 반목의 대상이다. 북쪽으로 향하는 어거스틴은 그의 부친과 반목 하에 이를 결정했다. 어거스틴은 딸 에스트레야와 사이가 좋아 보인다. 하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 아버지와 불화를 일으켰던 자신은 없다. 에스트레야가 모르는 어거스틴의 고뇌가 있다. 이에 사실상 그 이후 세대의 평온 너머를 들춰보면, 사실상 분열·단절되어 있다. 자욱한 침묵과 어거스틴의 미지가 남겨져 있는 남쪽, 전쟁 이후 비밀에 부쳐져 있던 누군가의 편린에 후세대 에스트리야는 근접해간다. 역사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만 했던 어거스틴, 아버지에 의해 남향으로 떠나는 에스트리야, 시대는 각자가 가야만 하는 길을 규정하고 있다.





*언론 만화가 출신아우렐 감독의 연출

하지만 전자가 비인간적인 폭압이었다면, 후자는 지금 여기에 자신을 있게 한 역사적 진실을 주도적으로 찾으려는 마땅한 선택이다. 아버지의 북쪽과 딸의 남쪽은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에스트리야는 아버지의 남쪽, 그 자체는 영영 헤아릴 수 없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만들었다는 여지가 있다. 역사가 가리킨 이정표는 마냥 불행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1940년대와 프랑코 치하의 후기 내지는 민주주의 이식 이후를 비추는 에리세, 그에게서 시대는 괴물이요, 기계화이자 강제이주였고, 자유의 박탈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두 작품 모두에게서 인간성을 비추는, 흡사 바로크 시대의 온유한 조명을 연상케 하는 '빛'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본 작품 <조셉>도 1939년 당시의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1910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스페인 내전에 의해 멕시코와 미국으로 이민 간 조셉 바르톨리에게 헌정하는 작품, 그가 한 헌병과 나누었던 친교를 담아내는 실화를 감각적인 필치로 스크린에 옮겨온다. 이를 언론 만화가 출신의 아우렐이 수행한다. 본 작품의 초반부, 1939년 2월 당시의 밤과 전선을 구현하는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뻣뻣하게 느껴진다. 기술적인 결함에 따른 뻣뻣함이 아니라, 의도된 투박함이자 분절인 듯한 만화의 거친 움직임은 일련의 회화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영화가 움직이는 이미지라면 아우렐이 지금껏 그려왔던 회화, 만화는 움직이지 않는, 고정되고 붙잡힌 특정한 순간이다. 어쩌면 아우렐은 만화가로서 자신의 이력을, 과거를 구현하는 영화의 분절적인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이리라. 영화가 움직이는 이미지로서 관객의 눈이 구분할 수 없는 정교한 초당 프레임으로 눈속임을 한다면, 일련의 회화적 특성으로서 움직임 이전과 이후, 컷과 컷이 자명하게 나뉘는 정지된 이미지들의 '연속'을 아우렐은 가시화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과거를 구현하는 영화는 화가 윌리엄 호가스의 연작을 연상케도 한다. 각자로는 독립적인 회화 하나하나가 이어져서 연속적인 서사, 흐름을 구축하듯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과거를 구현하는 데만 사용된다. 그래서 회화적인 특성임과 동시에 기억의 특징에도 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영화를 보는 현재는 너무도 자명하다. 모든 것은 선명하고 단순히 우리가 느낀 것 이외의 세부적인 것들도 상세히 인식된다.


*과거기억의 속성

하지만 과거는 다르다. 영화 속 과거의 속성으로는 앞서 언급한 분절적인 숏들의 움직임, 불명확한 형체나 유동적인 모래 먼지와 같은 이미지들, 실재인지 꿈인지 상징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여자아이 인형을 물고 있는 늑대, 점점 더 빛이 바래가는 낮은 채도 등을 꼽을 수 있다. 영화의 이러한 형식은 현재와 달리 훼손되고 잊혀감에 서서히 지워져 가고 혼란스레 뒤섞여가는 기억의 특성에 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어둠이 열어 젖혀지며 아득하게 잠들어 있던 과거가 깨어나듯 보였어도, 이는 완전하게 재현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당대의 상세한 디테일이 아닌, 기억될만한 특정 사건들, 그리고 어떤 뉘앙스다.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들은 자연스레 유실된다. 이에 기억에는 구멍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마치 영화 속, 숏과 숏의 연결이 헐거운 거친 편집과 상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시간이 뒤죽박죽 뒤섞여 훗날의 기억인 프리다 칼로와의 만남이, 앞선 시간의 기억에 침투하는 숏도 과거의 불완전한 속성에 상응한다. 그리고 뉘앙스 내지는 감각으로서 기억은 영화의 화풍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교한 인체 비례를 지향하는 유럽 아트메이션의 기조를 본 작품도 이어간다. 하지만 현재와 달리 과거를 비추는 화풍은 옷자락이나 육체에 있어 유달리 더 구불거리거나 휘날리며 굴곡이 강조된다. 2차 대전 당시 희생자들의 증언은 실재 물리적 측량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리고 감각적으로는 더욱 과장된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진술이 거짓은 아니다. 애초에 각자가 세계를 마주하는 방식은 객관적 세계가 아닌, 주관적인 나의 인식과 육체가 마주한 하나의 표상이며, 그것이 맞닥뜨린 감정이란 온당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인 세계와 일련 불일치한다 한들, 결코 거짓이 아니란 바다. 스페인 내전과 2차 대전의 광풍에 휩싸여 수용소로 옮겨진, 개인들이 느낀 감정은 그들의 육체가 반영하는 생생한 진실이다. 아우렐은 과거를 구현하면서 세부적이고 객관적인 과거가 아니라, 이러한 희생자들이 느꼈을 법한 감각을 역동적이고 때론 추상적이며, 현재에 비해 일그러지고 뒤틀려서 그들의 육체가 느꼈을 법한 진동을 구현하는 표현법으로 보여준다.





특히나 이러한 기억의 특성은 '기억될 수 없었던 시대'와도 맞물린다. 영화 속 시간의 층위는 대단히 복잡하다. 1939년 2월의 프랑스와 이후 멕시코로 탈출한 조셉과 마주한 세르주의 시간, 그리고 말년의 조셉을 비추고 세르주의 이야기를 듣는 청소년 마르탱의 시간, 마지막으로 성인이 된 마르탱이 조셉의 회고전에 방문한 시간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불확실하고 유실될 것만 같은 아스라한 연출의 경향은 오직 1939년을 포착하는 데서만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과거지만 자신의 온 존재를 드러낼 수 있고, 이를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는 멕시코에서는 이 같은 연출이 사용되지 않는다. 즉 연출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기도 하지만, 무언가가 온전하게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는 과거와 그것이 불가능한 과거 또한 구분한다. 이것이 가능한 과거에서 이전의 연출과 달리 형체는 보다 선명하고 뚜렷하다. 역동적인 표현보다는 더욱 안정적인 형상이 구현된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배경도 빽빽하다. 반면 과거가 텅 비어있고, 이것이 기억될 수 없는 이유는 곧 정치 권력이 기억할 수 있는 기록, 존재들을 영화에서처럼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랴. 이 같은 다채로운 개별의 색채들이 소거되어가는 절망적인 현실에 따라, 앞선 연출에서 색채는 대단히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멕시코, 프랑스, 뉴욕에서의 색채는 찬연하고 선명하다. 영화는 파시스트 치하에 유실되어가는 진실과 민주주의가 도래하며 개개인이 드러낼 수 있는 진실의 층위 또한 연출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현재로부터 과거는 분리되어 있다. 세르주는 몸도 성하지 않지만,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손자 마르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할아버지인지도 불분명하고, 심지어 그가 마르탱에게 처음 말을 건넨 이후 영화에서는 페이드아웃이 사용된다. 방금 했던 말조차 현재와 단절된 것인지 모른다. 현재는 분명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 기억이 가능하고 색채가 가능한 시대를 위해 피 흘린 희생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과거는 이제 현재의 곳곳에 그저 액자 속 편린들로만 존재하고, 그것은 먼지 낀 유리창 너머에 그저 보존될 뿐, 잊혀가고만 있다.


*이미지와 그린다는 것의 고찰

영화는 마르탱의 시점을 빌려 변색되어가는 과거와 마주하러 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주한다는 의미에서 페이드아웃은 ‘전환’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마르탱이 할아버지 세르주의 과거와 마주함에, 그의 현재의 인식은 더는 이전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정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미지'의 의미다. 본 작에서 이미지는 여러 층위로 나뉜다. 일단 파시스트들은 획일화된 전체적 이미지를 세뇌한다. 2차 대전 당시에 유대인이 악마적 이미지로 그려져서 실재와 무수한 괴리가 발생했고, 이러한 가상을 현실에 덧씌워 무수한 희생자를 자아냈듯,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도 이런 오명을 벗을 수 없고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대단히 전략적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을 먹는데도 서슴지 않는다.'라는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해, 수용소에 갇힌 스페인인들에게 극소량의 빵만을 불결한 환경에 지급한다. 이에 아사 직전에 놓인 그들은 수용소 바깥에서 그 일대를 산책하는 소녀의 강아지를 꿰어서 잡아먹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누가 이를 감히 비난할 수 있으랴, 이는 개인이 선택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파시스트들이 만들어낸 극단적 상황에서 선택한 절박한 결정이었는데 말이다. 즉 이미지가 실현된다고 해도, 왜 그렇게 일치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려해야한다. 또 파시스트들의 이미지는 ‘국민’들을 만들어내는데도 일조한다. 세르주는 수용소에 갇힌 조셉이나 헬리오스에게 마땅한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장교들은 스페인인들에게 오줌을 누며 모욕할 것을, 폭력을 행사하며 굴욕감을 선사할 것을 요구한다. 세르주 역시 그러한 이미지를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이를 거역하면 미미한 자신이 박탈당할 테니 말이다. 이에 그들이 바라는 이미지는 현실 속에서도 서서히 실현되어 간다. 하지만 진정으로 무언가를 그리는 행위란 현실을 뒤바꾸기 위한 목적을 추구하는 선전적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 속 진실을 통찰하여 이를 재현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되어야만 한다. 조셉은 자신에게 펜이 없을 시엔 손가락으로 진실을 그려내는 기술을 지속적으로 단련하고, 종이가 없다면 이를 캔에다가 그려 불태워지는 진실들을 남기고자 한다. 이렇게 진실이 온전히 깃든 캔버스의 세계에는 벌새가 이를 착각하여 내려앉을 정도로 현실과 일치한다.


*개인의 희생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기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셉은 세르주에게 오직 물리적인 결합만은 싫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감성이자 영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셉은 눈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 같은 영혼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실제로 돼지이자 악마가 누구였는지, 그들이 왜곡하는 난민들의 영혼은 얼마나 궁핍해져 갔는지, 색채가 유실되어가고 잉크가 넘쳐서 희생자들의 육신에 침범하는 돌발 흔적들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말이다. 이는 수용소의 회고에서 멕시코에서의 시간인 프리다 칼로가 침투한 것과도 관련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뒤죽박죽 뒤섞인 기억을 보여주기 위함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진솔하게 노래한 화가였던 그녀를 환기함으로써, 자신과 진실을 추구하는 펜대를 놓을 수 없는 화가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랴. 하지만 이러한 개인들은 무너져가고 있다. 한 장교가 뚜껑에 바퀴벌레를 잔뜩 집어넣고, 이들을 향해 단도로 다트 놀이를 한다. 바퀴벌레는 뚜껑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이러나저러나 다트 놀이의 희생양이 된다. 공동체 내에서 세뇌되거나, 아니면 추방당할 개인들이 곧 바퀴벌레의 운명과 같다. 영화 속에서는 칼의 이중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전체주의의 칼은 협박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칼이다. 하지만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는 개인, 세네갈 병사의 칼은 상대방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자기 문화를 알려주는 베풂의 칼이다. 전자의 칼의 의미는 획일화되고 보편화된 전체에 따르지 않는다면 오직 죽음만을 선고하는 파시즘과 스페인 내전 당시, 이들과 결탁하여 획일화된 하나를 지향하고 이단을 척결하는 가톨릭의 위선을 지칭할 것이다. 이에 그 칼에 베이지 않고자 개인들은 최소한 겉으로는 순종할 수밖에 없다. 겉모습은 발길질하고 오줌을 누더라도, 뒤에서 개인을 지향하는 이중적인 생활에서야만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저항하는 자는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리니. 이에 서서히 개인은 상실되어 간다. 조셉이 꿈꾸는 아스라한 색채의 향수도 점점 더 비관으로 젖어간다.


*저항하는 광인

개인의 기억은 파괴되어 간다. 영화의 후반부 조셉의 그림과 기억이 16mm 필름을 닮은 매체의 타들어 감과 그레인을 통해 점점 더 상실됨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개인은 '광인'으로 여겨진다. 영화의 초반부, 수용소에서 마르탱이라는 자가 군중 앞에서 떠들어대고 있다.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유착, 파시스트들의 선전이 결코 국민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을 설파한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 신화 속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와 같다. 서서히 군중은 사라져간다. 그리고 헌병들이 당도한다. 마르탱의 말은 진실이다. 하지만 다수가 거짓을 맹목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진실은 검증조차 하지 않음에, 마르탱은 광인으로 여겨지고 그의 말은 헛소리가 된다. 또 그가 진실을 설파함에 군중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곧 권력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할 지다. 권력은 한 개인이 연마할 수 있는 무력이 아니다. 권력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합의에 따라, 그들로부터 이행되고 모인 힘이다. 그 권력이 파시스트들처럼 거짓으로 형성된 바라면, 진실에 의해 군중이 와해되고 권력이 흩어져가는 것이 위협적으로 여겨지리라. 이에 헌병들은 그 입을 틀어막고, 광인을 억지로 수용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광인이 되더라도 진실을 추구해야 하리라. 맹목적으로 프랑스 국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평등·박애를 광인이라 여겨질지라도 몸소 실천해야 하리라. 세르주처럼 말이다. 조셉의 말처럼 삶과 자유를 깨우친 자들은 다시 우리에 갇히기 싫어한다. 이에 광인처럼 여겨질지라도 순응하는 삶보다는 저항하는 삶을 택한다, 헬리오스처럼 말이다. 또 조셉처럼 도망가기도 하고, 얼굴을 반쪽 잃은 여인은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녀는 진실을 반영한다. 전쟁에 의해 더 이상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선전된 이미지 대신 비이성적인 태도로밖에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을 말이다.


*에리세와의 유사성미래

즉 광인의 정신은 하나의 저항이다. 거짓에 들어맞지 않아서, 기만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불편한 것이 광기다. 세네갈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떠나는 것도, 카고에서 세르주가 군대의 방향에 반하는 선택을 내린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랴. 범죄자로 여겨질지언정 더 이상 거짓에 봉사하지 않겠다는, 광인의 선언인 것이다. 앞서 서두에서 에리세를 언급하였다. 본 작품과 스페인 내전이라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지만, 구성적으로도 일면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언급하였다. 에리세는 두 대표작에서 어린 소녀들을 상정하여 스페인 내전 당시와 그 이후를 비추곤 하였다. 그리고 본 작품에서도 어린아이들, 청소년, 맹아 단계의 생명 등이 스페인 내전의 가운데와 그 이후에 존재하곤 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의 어린아이들은 미래의 상실을 보여주곤 한다. 늑대가 어린아이가 좋아할 인형을 물고 있다는 것, 개를 잃어버림으로써 비정한 현실을 마주할 소녀, 만삭의 상태로 실종되어버린 조셉의 연인은 모두 미래로 이어지지 않고 빛을 잃어가는 삭막한 현재를 보여준다. 그렇게 절망적인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운동가들의 저항에 의해 내전 이후 몇 십 년이 지나 민주주의는 이룩되었으나,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과거는 잊히어 간다. 그리고 현재의 소년 마르탱은 이러한 아픈 과거와 현재를 매개한다. 잠들어있던 진열장, 액자, 그림들은 다시금 현재에 깨어나 빛을 발하고, 이들에 의해 안락한 현재가 가능함을 지칭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회고에 따라 마르탱이 뉴욕으로 향하는, 그 발걸음도 시대에 의해 일련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파시스트들이 행한 강제이주가 아니다. 마땅히 향해야 할 발걸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하는 과거를 기억하는 발걸음이다. 그리고 과거가 이룩한 가치들은 몸소 계승해야 마땅한 것이니, 역사의 진실을 재현하고 그려내기 위해 마르탱은 광인의 정신을 계승한다. 미술관에서 세르주가 간직한 조셉의 사진을 포개놓음에, 일련 어긋난 현재는 사이렌을 울려댄다.


분명 되찾은 듯한 진실도 여전히 결여된 구멍을 간직하고 있다. 과거를 비추는 연출처럼 말이다. 그것을 채우는 것은 분명 누군가에겐 위협으로, 또 불쾌감으로 다가올지어다. 마주 하고 싶지 않은 참혹한 진실, 그것이 곧 사이렌일지다. 하지만 그런데도 진실은 맞춰져야만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조셉과 희생자들을 구원하던 할아버지의 태도처럼, 타인을 위하는 그 마음은 마르탱이라는 미래에 마땅히 계승되어야 한다. 그리고 조셉을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정신의 훌륭한 계승이라 할 수 있으랴. 이렇게 종이에 현실을 그려내던 만화가 아우렐은 이제 스크린에 무언가를 그려내기 시작한다. 특히나 시사적인 문제들을 다루며 저널리즘으로서의 만화를 추구하던 아우렐은, 조셉의 일대기를 스크린으로 옮겨내며 자신이 지향하는 예술론을 천명하듯 보인다. 조셉과 마르탱처럼 마땅히 펜대를 잡고 그것을 우물거려야 하는 이유는, 선전적 이미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진실만을 냉엄히 진단하고 통찰하기 위해서임을 말이다. 그리고 조셉과 세르주의 일대기를 통해 자유를 찬미한다. 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박해를 당한 조셉이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 다시 한번 매카시즘에 의해 시대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뻔한 위기를 생각하면, 여전히 개인에게 도래하지 않은 자유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영화는 조셉의 일대기와 세르주의 회고에서 길어낸 이 같은 가치들을 자유분방한 필치, 특히 유실되어가는 기억과 기록될 수 없었던 스페인 내전 및 2차 대전이라는 상황에 적절히 조응하는, 추상화되어가고 투박하며 흐릿한 표현법으로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움직임을 통해서 '회화성'을 구현한 1939년의 형식은 만화가이자 화가로서 자신의 색채를 어떻게 영화와 접목할까 하는 아우렐의 투철한 모색이 느껴졌다. 그래서 시대와 과거의 인물, 그리고 현재의 자신을 어떻게 이을 것인가, 또 그것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본 작품은 하나의 충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Artlecture.com

Create Art Project/Study & Discover New!

https://artlecture.com

매거진의 이전글 진실한 건 모두 아름다워_영화: 작가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