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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Jan 15. 2019

그 화가가 사랑한 여인

카미유 동시외, 모네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산책, 클로드 모네, 1875, 뒤의 소년은 큰아들 장




그 화가가 사랑한 여인

카미유 동시외, 모네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 화가의 여인, 여인의 화가 


화가는 한 여인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모델과 사랑에 빠지는 화가의 이야기는 드물지 않지만, 모두가 역사에 남겨지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에게 뮤즈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여성 편력을 일삼는 예술가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이 화가는 한 여인을 묵묵히 마음에 품었다. 당시 파리 예술계에서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던 그였기에 여인들과 위인들이 늘 그의 가까이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굴을 그리고 싶었던 여인은 그녀 한 사람 뿐이었다. '수련'으로 유명한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Oscar Monet, 1840-1926)와, 그의 첫번째 아내였던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x, 1847-1879)의 이야기다.



소파에서의 명상, 클로드 모네, 1871년 경


초록 드레스의 여인(카미유), 클로드 모네, 1866



25세의 젊은 화가는 모델이 된 18세의 소녀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화가의 집안에서는 집안도 변변치 않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일개 모델과의 교제를 반대하며 경제적 지원을 끊는다. 아들이 화단에서 성공하여 더욱 좋은 집안의 아가씨를 만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비난할 수만도 없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가난이나 부모의 반대 앞에 무릎 꿇을 한순간의 치기가 아니었다. 젊은이들의 사랑은 반대에 부딪치면 더욱 타오르는 법이다. 그들의 사랑에 희소가치가 부여되는 것인지, 그 사랑의 기회비용이 치솟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가난하지만 행복했다’는 신파적인 문구가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 뿐이다.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 살롱전에서 호평을 받을 뿐 아니라 신인 작가의 작품으로서는 고가에 매매되면서 모네는 정식으로 파리 미술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1865년 처음 만난 이들은 1867년 큰아들 장을 임신하고 아이를 무사히 낳았으나, 결혼식을 올린 것은 1870년에 이르러서였다.보불전쟁(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의 발발은 이 젊은 연인이 마침내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도록 하였다. 징집을 피할 목적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대개 전쟁은 옹호되기 어렵고 민중은 모두 패자가 될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전쟁은 젊은 예술가 연인을 부부로 묶어 놓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전쟁으로 인한 이별은 피할 수 있었다손 치더라도, 부부간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동서고금의 이치인 것일까. 부부가 된 이들은 연인일 때보다 행복하지 않았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카미유), 클로드 모네, 1875-1876



그림 속의 카미유는 행복을 연기하고 있다. 기모노를 입은 채 곧 춤을 출 듯한 경쾌한 모습이다. 아이의 사진을 찍는 부모나, 서로의 사진을 찍는 연인들은 때로 어떤 사진작가보다 훌륭한 사진을 찍는다. 피사체에 대한 애정은 결과물의 품격을 높인다. 이미 재능있는 화가인 모네에게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화폭에 남기는 일은 자신의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즐겁고 값진 일이었으리라. 카미유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다. 모델과 화가로서 서로의 애정에 화답한 그들의 모습은 다수의 명화가 증명한다.그러나 주로 소파에 앉아 있거나 양산을 들고 있거나 산책을 하고 있는 정적인 모습을 그렸던 모네였기에 이 그림은 더욱 특별하다. 금방이라도 재잘거리며 말을 할 듯한 사랑스러움과 천진함이 그림 전체에 느껴진다.


19세기 중반부터 서양미술에서 널리 유행하던 유행하던 자포니즘(Japonism)의 영향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는 이 작품은, 모네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작품일 뿐 아니라 당시에도 높은 가격으로 팔린 그림이다. 담뿍 애정을 받는 여인의 자신감, 이국적인 의상을 입은 흥분과 들뜬 감정, 연인을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 서로에 대한 그들의 감정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하지만,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숨어 있었다. 막 화폭에서 나올 것만 같은 싱그러운 표정의 카미유를 그려냈지만 사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모네와 카미유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적 문제와 성격적 갈등, 카미유의 병마 등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는 삐걱대고 있었으나 그림은 부부의 실상을 드러내지 못했다. 부부 사이는 차가웠으나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모네는 화려한 색채와 춤추듯 역동적인 인물화로 대중의 취향을 저격했고, 카미유는 화사한 표정과 금방이라도 춤을 출 듯한 자태로 협력한 덕분이다.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카미유의 표정 이면에 그들이 감춰야 했을 비애를 생각하면 카미유의 웃음은 자꾸 마음을 울린다. 그것은 현실의 고뇌를 철저히 감춘 헌신의 웃음이자, 슬픔을 연료로 타오르는 희생의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 “그녀가 떠나기 전에 꼭 그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 주고 싶습니다.”


연인들의 일을 낱낱이 알 수 있는 것은 연인들 뿐이다. 그들의 사이가 벌어진 데에는 추측이 분분했지만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결정적인 것은 두 가지로 좁혀진다. 이후 모네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 알리스 오슈데(Alice Hoschede)의 동거와 카미유의 건강 악화이다. 모네를 후원하던 미술품 수집가 에르네스트 오슈데(Ernest Hoschede)가 파산한 후 종적을 감춘다. 홀로 남은 그의 부인 알리스는 여섯 자녀를 데리고 모네의 집에 머물게 된다. 모네는 그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은 탓에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묘한 동거는 카미유에게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큰아들 장을 출산한 후 건강이 좋지 않던 카미유는 급기야 자궁암에 걸려 앓기 시작한다. 1878년, 모네와 카미유의 둘째 아들 미셸은 무사히 생명을 얻었으나 엄마 카미유는 회복하지 못했다. 1879년 9월 4일 카미유는 숨을 거둔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서른 둘. 카미유가 죽은 뒤 모네는 의사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의 불쌍한 아내가 끔찍한 고통을 받다가 오늘 아침 10시 30분에 사망했습니다. 불쌍한 아이들과 홀로 남겨져 있는 이 기분은 정말 비통합니다.

선생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이 편지에 차용증서와 돈을 동봉하니, 일전에 몽 드 피에테에 저당잡힌 펜던트 목걸이를 찾아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 목걸이는 아내가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기념품입니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 꼭 그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 주고 싶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여인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그녀에게 목걸이를 걸어 주는 것이었다.



영면하는 카미유, 클로드 모네, 1879


영면하는 카미유 하단의 친필 사인. 하트가 그려져 있다.



모네는 카미유의 마지막까지도 <임종을 맞은 카미유>라는 작품으로 남겼다. 일생의 사랑에게 닥친 빈사의 순간에도 찰나의 빛을 포착하는 화가로서의 무의식적 움직임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으나, 사랑하는 여인의 임종을 추모하는 그 자신만의 방식이기도 했을 터. 이 그림을 그는 팔지 않고 평생 간직한다. 그림 하단의 화가 서명에 그려진 하트는 더없이 로맨틱하면서도 더없이 슬프다. 그 작은 하트가 까닭 없이 마음을 울리는 바람에, 오르세 미술관에서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카미유 사후 모네는 그림 속에서 인물의 이목구비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재혼한 부인 알리스와 그녀의 딸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나 눈코입이 없어 모델을 알아볼 수 없다. 뿌옇게 그린 인물들은 카미유의 환영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그에게 여인은 카미유 하나 뿐임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리라. 또한 어떤 여인을 모델로 그려도 그의 머릿속에는 카미유의 얼굴만이 떠올랐으리라. 이미 그에게 유일무이한 모델이 되어버린 카미유가 습관처럼 남아 있기에 다른 사람의 눈코입을 그린다 해도 카미유의 그것이 붓끝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을 떠올리는 것은 평생 슬프고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빌 다브레 정원에 있는 여인들, 클로드 모네, 그림 속의 여인들은 모두 카미유를 모델로 그려졌다. 카미유는 각각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포즈를 취하며 모네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에게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던 여인은 그녀 한 사람 뿐이었던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화가 중 하나인 모네와 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여인 카미유. 서른 두 해를 살았으나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받은, 불행했으나 행복한 여인 카미유.


모네의 기억 속에 그녀는 서른 둘에서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여인일 것이다. 어쩌면 진정 사랑했던 이는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에게만은 여전히, 앞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박제로 남는 편이 낫기에. 단테의 베아트리체가 그러했듯 모네의 카미유 역시 너무 젊고 너무 아름다울 때에 생을 마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짧은 생애가 그녀들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모두가 그의 그림을 사랑하고 그를 추종하는, 인상파의 대가 클로드 모네. 그가 사랑하고 추앙한 여인은 늘 한 사람 뿐이었다.



트루빌 해변의 카미유, 클로드 모네, 1870. 트루빌 해변으로 신혼여행을 갔을 당시의 그림으로, 모네와 카미유의 생에서 아마도 가장 행복했을 한때.






아트렉처 에디터_반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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