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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Apr 27. 2021

Game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이명미



 뜬금없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명미 화가, 대단한 작가 맞죠?” 그때마다 난 그렇다고 했다. “그 분이 어떤 점에서 대단하죠?”라는 질문이 늘 따라 붙었다. 대답하기 어려웠다. “음... 이명미 화가가 왜 훌륭한 작가인지 선생님이 먼저 말씀해보시죠.”라고 나는 질문을 상대에게 되려 넘겼다. 그가 이런저런 나름의 근거를 말하고 나서 “그렇죠! 역시 제가 생각하는 바와 똑같네요.”라고 위기를 모면해왔다. 그렇게 한 십 년을 살았다. 미꾸라지 인생은 끝났고, 이제 내가 대답해야할 지금에 이르렀다.


이명미, GAME, 1985, 118x210 이미지 출처 | art500.or.kr


 이명미의 미술세계에 접근하다보면, 이 화가가 가진 여러 면모를 탐구한 과업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시 서문, 평론, 언론 기사, 인터뷰 형식의 갖가지 글을 보면 일반적으로 일치되는 견해가 보인다. 그 의견들은 내가 작가 이명미를 생각하는 피상적인 관점, 예컨대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 부흥기의 테두리 안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점, 색과 형상을 과감하고도 순진하게 표현하는 점, 인생의 큰 굴곡을 몇 차례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에 나타나는 밝은 면은 수그러들지 않는다는 점과 같은 특징보다 훨씬 치밀하고 진지하게 다듬어져 있다.


 작가에 관한 여러 일반적 평가는 이제 하나의 언술로 서서히 굳어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흥미로운 사실은 동시대 예술가에 대한 찬미나 일반화된 규정은 미술을 대하는 태도가 자유로운 이명미와 같은 작가에게 역설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따져볼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다소간에 자기순환적인 과정이 끼어든다. 만약 그녀가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가 쓴 <호모 루덴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예술과 놀이에 관한 분석을 시도한 이 텍스트가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지 한 세대를 거치며 다시금 예술의 변동에 영향을 끼치는 공진화(co-evolution)의 사례가 된다.


사실, <호모 루덴스>에서 호이징하가 펼친 가정은 예술의 역사에서 예술 제도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기능적인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서양 근대 이전의 예술 형식에 주로 유효하다. 위대한 고전이 풀어놓은 일반화된 이야기를 레퍼런스로 삼아서 이명미의 작품론을 놀이나 장난이나 유희, 혹은 게임의 코드로 해석하는 일은 오류가 적고 위험부담은 없다. 하지만 심심하다.


 이명미의 회화가 마냥 자유로운 유희 정신에서 비롯된 사실 말고 또 다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지금껏 내가 그녀에 관한 대화에서 어정쩡 빠져나온 다음에 고민해 온 정답은 무엇일까? 비록 보충된 설명밖에 안되겠지만, 나는 이명미의 회화에서 보이는 패턴이 상투성의 활용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꽤나 상당한 내적 질서를 품고 있다. 참신한 현대미술과 상투성, 혹은 자유로운 원칙과 상투성, 얼핏 보아 양립된 가치 사이에서 작가는 게임을 즐기고 있다. 작가가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전 생애를 거쳐(지금 이 순간도) 문학과 영화, 미술, 음악의 찬란한 소절을 본인이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게 사실이라면, 내 생각에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분명하다. 나는 그 명확한 태도가 그녀의 예술적 영감과 조응하여 작품으로 제시되는 힘이라고 본다.


이명미, 나와같다면, 200 x 200 cm, 2011. 이미지 출처 | art500.or.kr


 가령 그녀는 아크릴 회화 작업 위에 문구점에서 파는 스티커를 붙인다. 캔버스 위에 어린 애들이 갖고 노는 피규어를 세워둔다. 유치해야 하는데 유치하지 않다. 이미 작가는 예술 공동체 안에서 유치함이라는 관념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회적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그림 속에는 노랫말이나 싯구절이 등장한다. 팝송은 알파벳으로, 한국노래는 한글로 적혀 있다. 현대미술의 총체적인 식민지화 경향은 작가들로 하여금 지역적인 색을 지우고 세계적인 시늉을 하게끔 만든다. 그림 제목이나 길거리 식당 이름도 영어로 적어놓아야 대접 받는 마당에, 이명미는 자신의 그림 속에 큼지막하게 우리말로 된 가사를 읊어놓는다. 통속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스티커만큼, 우리 노랫말만큼 적절한 건 좀처럼 없다.


 허술한 비평적 태도라면, 작가가 인용한 가사를 분석해서 창작의 동기를 캐묻는 방법을 취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예컨대 대중음악을 아카데믹하게 분석한 한국 문화이론의 초기 오류가 가요 양식의 한 요소인 가사 분석에 그친 점에 비추어 알 수 있듯이, 이명미의 회화 속에 담긴 글 하나하나에 집착 어린 시선을 보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녀가 읊은 노랫말이 경쾌하게 숨기고 있는 이면을 보면 된다. 상투적인 것이 지닌 힘, 이미 우리가 현대미술의 그래피티 회화를 통해 깨달은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장난스러운 도상과 텍스트만 본 채, 작가가 품은 내면의 깊은 그릇을 놓치는 일들이 빈번히 벌어진다는 점이다.


 의도적으로 엄숙함을 없애버린 그림, 끝이 안 보이게 무궁무진한 주제의 변주 속에서 아주 작은 그림에서부터 대작에 이르기까지 균질적으로 나타나는 당당함과 명랑함은 그녀의 천성이다. 만약 그것이 타고난 하나의 기질이라면 더 이상 붙일 말이 없지만, 피할 수 없는 삶의 역정 속에서 이어져 온 굳건함과 밝음이므로, 이것을 빼고 찬탄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조형성의 의미는 부차적인 것이다. 이명미에게 있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성찰은 저 너머에 있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상징으로 가득 찬 동심의 세계에 갇혀 놀기 좋아하는 예술가의 상은, 사실은 생과 사의 갈림에 대한 두려움과 애틋함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이처럼 감탄스러운 그녀의 회화는 단지 그녀 개인적인 삶의 기록을 넘어 보편적인 세계, 삭막해진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도 긍정적인 미의 혜택이다. 






 (윤규홍, 아트맵 Art Director/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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