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보면, 여러 가지 일에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한 가지 목표가 아니라 더 많은 포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대단하다. 하지만 모두가 성공하리란 법은 없다. 그들이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은 지구력이다. 폭발적인 창의력과 자신감만 가지고 어떤 일에 호기롭게 뛰어드는 이들은 이것을 하다가 그만두고, 저것을 하다가 이내 멈추고, 또 딴 것을 시작하는 식의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이런 스프린터들이 예술계에도 종종 있다. 반면에 이종국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전통 시각예술의 맥을 다양한 방법으로 잇고 있다. 그의 예술에는 수묵화와 문인화, 공예라는 장르 기준의 작업이 들어있다. 또 그에게는 작가 신분과는 다른 면으로, 한지 제작자와 생태운동가라는 정체성도 있다. 이런 일들이 모여서 문화기획이라는 또 하나의 영역을 이룬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흔들림 없이 펼쳐 왔다.
작가 이종국이 펼치는 미적 세계의 넓이 안에는 여러 언로가 섞여 있다. 그 코드 가운데 일부는 작품으로 완성되어 실체를 드러내고, 더러는 일의 과정에 녹아 있다. 어떤 작품들은 오직 예술의 원리 안에서만 의미를 따질 수 있는 미적 대상인 데 반하여, 또 다른 작품들은 생활에 쓸모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예술적 유용성은 무용성과 경계선 사이에 묘하게 걸쳐 있으며, 이런 특성은 예컨대 노동과 유희, 논리와 직관, 규칙과 일탈에 관한 구분에서 또한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작가가 몸으로 익힌 경험 속에서 서서히 틀을 갖춰 온 조형성에서 비롯된 특성이다. 이는 작가에게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하게끔 했다. 그가 실현하는 다양성은 예술계의 흐름에 쉽게 동요되지 않는, 일종의 개념적 진공상태를 경험하면서, 작가 본인이 겪고 부딪히고 즐기는 삶 그 자체에서 예술을 캐내도록 만든다. 대청호 일대의 풍광과 환경은 그곳의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작가는 그의 내면에 깃든 모든 것이 기예를 통해 다시 드러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작품들은 그 속에 작가가 품은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동행했을지도 모르는 비관과 오류와 결핍에도 불구하고, 작품에는 낙천성과 힘이 서려 있다. 그 바탕이 되는 종이야말로 그가 펼치는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종이는 한 명의 젊은 예술가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사건이었다. 이전부터 우리 전통과 생태에 관심이 있던 청년에게 한 마을에서 이어져 온 한지 제작에 관한 이야기는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청년예술가 이종국이 한지 장인으로 궤도에 오르는 데에는 11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화에서 한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당연히 크며, 작가는 자신이 차츰 개량해 가는 종이에 회화 작업을 벌여가는 이중의 정진을 거듭했다. 아니,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를 손수 재배하고 작업 환경을 건사하는 일이 앞서는 그의 작업은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이음새를 갖추게 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작가에게 단 하나의 이미지만을 요청하는 건 섣부른 바람일지도 모른다.
서두에 이야기했던, 작가 내면에 깃든 다재다능함과 끈기는 방랑객 같은 그가 대청호에 머무름을 이어가는 역설을 완성했다. 고독하며 천진한 전원작가로서 이종국의 작품은 예술과 삶이 하나로 겹치는 전체론적인(holstic) 면모를 갖춘다. 예컨대 그의 미술에 빈자리가 보이면 보이는 대로, 매혹적인 휘광이 나타나면 또한 그것대로 전부 그의 삶이 그러한 이유다. 그의 예술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전원과 도심이라는 관념적인 이분법을 투쟁하듯 선을 긋고 주류를 공격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업을 통해 상호보완성을 이루어가는 실천인 셈이다. 그것은 당연히 종이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작가 이종국이 펼치고 있는 뉴에이지의 미술은 시각예술이 본질에서 얽매이는 물질성, 그러니까 번듯하게 완성되어 등장하는 작품이란 성격을 초월하고자 한다. 또 미술 작품에 과하게 적용되는 현학적 해석과도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작업은 영성 운동처럼 느슨한 연결고리로 이어진 생각과 실천의 흐름 위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역성(locality)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역 자급자족 가능성이다. 로컬 푸드가 존재한다면 미술 생태에서 로컬 아트의 필연성도 생긴다. 새로운 시대의 로컬 아트는 한 지역에서 특별히 생산되는 재료를 예술과 결합하는 행위가 기본가치가 된다. 작가는 미술계 속 다양한 주체들의 관계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역의 풍광과 천혜자원과의 관계성에 주목해왔다. 사실 작가의 이러한 태도는 예술의 고전적인 원리와 떨어져 있지는 않다. 자연에 닮은 뭔가를 찾아내고 실현하는 일이 예술이니까. 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현상과 거듭된 수확 속에서, 작가는 작품을 중간 매개 삼아서 그 원천적인 매혹으로 우리를 이끄는 안내자이다.
(윤규홍, 아트맵 아트디렉터/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