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 일민미술관
일민미술관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
'한국화'라 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먹으로 그린 수묵화나, 이에 채색을 더한 수묵담채화가 아닐까 합니다. 한국화는 한국 전통 예술에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서화 중 서(글씨)와 구분하여 화(그림)을 지목한 것인데요. 사실 이 '한국화'를 정의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전통 예술에서는 따로 그림의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으나, 근대에 들어 어떠한 성향의 그림이나 사상만을 따로 구분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전통과는 대비되는 어떤 근대의 장르를 한국화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 구분에서 한국화가 모호한 경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전통에 대비된다는 말은 현대적이라는 말과도 상통하는데, 일반적으로 '현대 미술'의 근원은 서양 미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쳐온 복잡한 역사와 근대, 혹은 현대성과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아주 전통적인 것과 아주 현대적인 것 사이에 있는 모호한 경계, 이것이 한국화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일민미술관에서 개최된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 전시는 이러한 한국화를 담아냈습니다. 전시를 기획한 윤율리 책임큐레이터는 이 불투명하고 모호한 부분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한국화라는 장르 자체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한국화를 정의하는 여러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한국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모은다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통적인 한국 화가들부터 현재의 동시대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끊임없이 상상하고 만들어내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거쳐온 한국화. 그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연속성' 만큼이나 그 속에 존재하는 '단절'도 매우 중요하다는 기획자의 의견이 이번 전시의 전체적인 부분을 이끌고 있습니다. 전시의 타이틀이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시는 은색과 붉은 색으로 각각 구분되는 두 가지의 타임라인으로 구성됩니다. 은색 벽은 역사적인 근대 한국화 대가들의 작품이, 붉은 벽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 한국화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역사적 시간에 대한 설명이 함께 하고 있어 전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전시를 직관적으로 구분함으로써, 한국화를 이끌어 왔던 선배들과 그 대를 이어 나가는 후대 작가들의 작품을 연속해서, 또 단절해서 관람할 수 있는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래로는 전시 중 특히 인상 깊었던 몇몇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이번 전시는 전시장의 구성을 따라가며 직접 관람하면 더욱 뜻깊은 관람이 가능하므로, 직접 방문하여 관람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각 전시실마다 박소현 작가의 '부유하는 물덩이' 연작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각 전시실마다 설치된 세 종류의 분수는 여러 환경에 놓인 분수를 서로 다른 제작 방식으로 구현했습니다. 상승과 추락이 동시에 발생하는 양면적인 순간.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전시를 새로이 환기해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현대적인 불교미술로 주목 받고 있는 박그림 작가. 그는 불화의 도상과 소셜네트워크 속 이미지를 결합하고, 이를 빌려 스스로 내적인 개달음에 이른 경험을 그려냅니다. 전통 불교미술과 현대의 교차점에서 불화의 현대화를 꾀하는 그답게,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에서도 전통과 현대의 결합이 돋보였습니다. '홀리 띵스' 연작은 불교의 지물과 천주교의 성물을 애니메이션 속 변신 도구와 결합했는데요. 연작 중 하나인 <홀리 메이크-업>은 향수, 립스틱, 파우더 등을 손에 쥔 광고 모델의 전형적인 제스처와 부처의 공덕을 상징하는 수인(手印)을 함께 연상시킵니다.
이은실 작가는 한국화 재료의 특성을 살려 억압과 혼돈, 이로부터 만들어지는 힘을 표현합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은폐되는 인간의 욕망을 신체 내부에서 발동하는 긴장과 의학적 징후와 연결하는데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중 <만병의 근원(2021>은 뇌와 연결된 중추신경기관을 그려 신경증의 양상을 나열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체 기관이 부유하는 화면. 현실에 없는 장소를 삼원법 투시로 표현하는 고전 산수화의 방법론과 여러 장면으로 나뉜 조감도를 제시하는 현대의 건축적 풍경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해부학은 다양한 지식의 총체라고도 할 수 있죠. 작가는 해부학과 부감법을 이용해 내부와 외부, 부분과 전체, '나'와 세계의 연관성에 관한 발상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3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최해리 작가의 <장마에 나게이레>. 큰 획으로 전면에 물결을 칠한 뒤, 일본에서 유행한 꽃꽂이인 이케바나처럼 꽃과 식물을 던지듯이 그려 넣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지역색을 띤 화조도의 제작 방식과 태도를 이어붙인 것인데요. 작가는 사군자나 화훼영모화 등의 형식, 전설적인 예술가들의 유산, 신화적인 유물에 남겨진 형태와 가치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왔습니다. 전통이 탄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 다양한 역사에서 파생하는 양식과 차원을 엮은 것입니다. 이러한 최해리 작가의 관심은 유럽 고전 회화에서 특정 제스처와 사물을 오려내어 책가도와 같은 아카이브를 구성하고, 때로는 제문처럼 배치하는 시도로 연결됩니다.
한국은 중국의 국화나 일본의 일본화와 달리 포괄적인 동양화론을 받아들였습니다. 해방 후 제기된 식민 문화의 청산, 민족 정체성의 발견 같은 대의가 한국화의 담론에 투사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화를 둘러싼 연구는 과거의 유산을 계승하는 동력이자 민족이라는 기획을 고양하는 원천으로 기능합니다.
이번 전시인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은 동시대 작가와 전통 서화를 이은 예술가를 함께 소개합니다. 이는 한국화의 기반인 전통이 오늘날 어떻게 실재하는지 묻고 답하는 한편,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사라진 전통을 '연속'과 '단절'이라는 양면을 통해 상상하기 위한 구성입니다.
모사와 참조, 변용으로 '다시 그려낸' 세계. 한국화에서 답하기 힘든 수수께끼처럼 비워진 전통의 절단면을 매만지고 전승하여, 나아가 현실 위에 실현시키는 방식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망라해 한국화가 당면한 현실을 새롭게 모색하고자 하는 전시, 일민미술관의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에 직접 방문하여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글 | 아트맵 에디터 이지민
자료 | 일민미술관 제공, 아트맵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