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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막장 드라마를 그리다, 윌리엄 호가스

by 아트맵 매거진




펜트하우스.PNG 이미지 출처 | SBS 펜트하우스 홈페이지


이젠 드라마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막장 드라마'.

최근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또다른 막장 드라마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들을 낱낱이 그려낸 드라마라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 무려 3세기 전에도 이 같은 막장극을 그려낸 화가가 있다.

어쩐지 '막장'은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에게 가장 큰 희열과 쾌감을 주는 소재로 사용되는 듯하다.



self_portrait,1745,oil_and_canvas,90x70cm.jpg William Hogarth, Self Portrait, 1745, oil on canvas, 90 x 70 cm, 이미지 출처 | Wikiart


윌리엄 호가스 William Hogarth(1697~1764).


그는 당시 사회와 사람들을 비판하는 풍자를 그려낸 작가로 유명하다.

특히 돈 많은 귀족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많이 그렸는데,

그의 그림들은 한 그림에서 끝나지 않고, 연작물로 그려진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마치 지금의 드라마와 같은 형태로 어떤 스토리가 이어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서는 그의 연작 중 하나인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 을 살펴보려 한다.

이 연작에서 그는 돈 많은 귀족들의 삶을 풍자하고 나선다.

지금의 막장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그 당시 귀족들의 삶.

그의 작품 속을 들여다보자.



The_heir,1735,oil_and_canvas,62.5x75cm.jpg William Hogarth, The heir, 1732-1735, oil on canvas, 62.5x75cm 이미지 출처 | Wikiart


<난봉꾼의 행각> 은 총 8가지 그림으로 이루어진다.

이 연작의 첫번째가 바로 위 그림 <상속자(The heir)>.


그림 중앙에서 거만하게 서 있는 자가 연작의 주인공인 난봉꾼 '톰 레이크'다.

그는 부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재산을 상속받아 갑자기 돈방석에 앉은 졸부이다.

덕분에 레이크는 부유한 삶을 살기 시작하지만

매춘과 도박에 많은 재산을 탕진하며 난봉꾼으로서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다,

말년에는 정신병원에 갇히고 만다.


<난봉꾼의 행각> 에는 레이크의 변해가는 그의 모습들이 담겨있다.


SE-1f199edc-c5f7-4614-ad82-727fafcb2154.jpg <상속자(The Hair)> 중 일부


이 그림에서 또 하나 알고 가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레이크의 약혼녀, '사라 영'(맨 좌측)이다.


첫 번째 연작 속 사라 영은 울고 있다.

레이크가 돈 몇 푼을 손에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라에게 돈을 줄 테니 약혼을 깨자고 하는 상황인 듯하다.


하지만 막장극이라면 속 터지는 비운의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법.

이렇게 염치없는 약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곁을 지키는 유일한 사람이다.



surrounded_by_Artists_and_professors,lithography.jpg William Hogarth, surrounded by artists and professors 이미지 출처 | Wikiart


연작 두 번째, <surrounded by artists and professors>.

제목 그대로 예술가들이 레이크를 둘러싸고 있다.

그의 주위엔 자세를 취하고 있는 펜싱 선수와, 위협적인 모습으로 보디가드를 청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아주 반가운 인물도 등장한다.

'음악의 어머니'로 익숙한 음악가, 헨델이다.

비록 피아노 치는 뒷모습이며, 그 마저도 후대 사람들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쌓여있던 재산을 사용하기 시작한 레이크에게

상류층이 즐기는 스포츠나 예술을 가르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모습.

이 그림에서도 시종일관 거만하게 서있는 레이크의 모습이 생동감 있다.



Scene_in_a_tarven,1735,oil_and_canvas,62.5x75cm.jpg William Hogarth, Scene in a tarven, 1732-1735, oil on canvas, 62.5 x 75 cm 이미지 출처 | Wikiart


연작 세 번째, <Scene in a tarven>.

누가 난봉꾼 아니랄까봐 술집에서 여인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레이크.

그의 풀린 눈빛과 널브러져 있는 다리를 보라.

그가 술을 마신 건지, 술이 그를 마신 건지.

불콰하게 취한 레이크의 주변, 약혼녀인 사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SE-9cd6e828-c1cc-4c76-8f3d-8fce30b284d8.jpg <Scene in a tarven> 중 일부


자세히 보면, 두 여인이 레이크의 시계를 훔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의 레이크는 꿈에도 모르는 사실이다.

이 두 여인의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있는데,

이 점들은 그 당시 유행하던 매독을 감추기 위해 찍었던 점이라고 전해진다.

이 또한 매우 생동감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레이크는 이 때부터 본격적인 패가망신의 길로 들어선다.



The_arres_for_theft,1735,oil_and_canvas,62.5x75cm.jpg William Hogarth, The arres for theft, 1732-1735, oil on canvas, 62.5 x 75 cm 이미지 출처 | Wikiart


네 번째 연작, <The arres for theft>.

레이크에게 웨일즈의 집행관들이 찾아와 채무불이행으로 체포하려 한다.

흥청망청 돈을 써대던 그에게, 처음으로 돈 때문에 위기가 닥친 것.

이전까지 자신만만하고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레이크.


SE-e220cf5f-da66-422b-bcee-f61ca9016f24.jpg <The arres for theft> 중 일부


이 와중에도 그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불쌍한 약혼녀, 사라.

사라는 그를 체포하려는 집행관들을 막고 대신 돈을 지불하려 한다.

모자가 들어 있는 가방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지런히 길거리에서 모자를 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돈을 써대는 것도 모자라 체포될 위기에 처한 약혼자와는 달리 말이다.



marriage,1735,oil_and_canvas,62.5x75cm.jpg William Hogarth, Marriage, 1732-1735, oil on canvas, 62.5 x 75 cm


다섯 번째, <Marriage>.

드디어 사라와 결실을 맺는구나! 했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레이크는 어떤 늙은 여인과 결혼하고 있다.


이 시점에도 젊은 시녀에게로 눈이 돌아가는 레이크를 보아 추측하건대,

그가 결혼하는 이유는 여인이 쌓아둔 재산 때문임이 틀림없다.

반지를 끼워주면서도 신부를 쳐다보지 않다니,

이 막장스럽고도 현실적인 전개에 되려 웃음이 난다.


그럼 사라는 어디로 갔을까?


SE-79a37c03-fa9c-4d16-966b-494075ef854c.jpg <Marriage> 중 일부


시녀의 뒤를 보면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짐작대로, 이들은 사라와 그녀의 어머니다.

아마도 레이크의 결혼을 막기 위해 찾아온 듯한 그들을

누군가 막아서고 있다.


난봉을 부리는 약혼자임에도 끝까지 포기 않고

사랑을 지켜왔던 사라.

돈 때문에 다른 이와 결혼하는 약혼자를 보는 그녀의 기분은 어땠을까?



THE_gaming_House,1735,oil_and_canvas,62.5x75cm.jpg William Hogarth, The gaming House, 1732-1735, oil on canvas, 62.5 x 75 cm 이미지 출처 | Wikiart


여섯 번째 연작, <The gaming house>.

여전히 도박을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 레이크.

그는 가발을 벗어던진 채 하늘에 대고 신의 가호를 빌고 있다.

아마 이미 많은 돈을 잃은 뒤 도박에서 이겨 돈을 얻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고 있는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연작의 막바지로 갈수록 레이크의 원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데,

도박장의 어둡고 자욱한 모습이 왠지 그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the-prison-1735.jpg William Hogarth, the prison, 1732-1735, oil on canvas, 62.5 x 75 cm 이미지 출처 | Wikiart


일곱 번째, <The prison>.

모든 것을 잃고 감옥에 수감된 레이크.

당시 영국에는 채무를 이행하지 못한 사람들만 가는 프리트(fleet) 감옥이 따로 있었는데,

그림 속 감옥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주위에서 현재 아내인 늙은 여자와 맥주를 들고 있는 '비어 보이'가 등장한다.

비어보이는 레이크의 왼편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돈을 요구하고 있다.

아마 레이크가 감옥안에서조차 빚을 지고 음식을 먹은 듯한데,

바닥으로 떨어지고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그는 매우 당황한 기색이다.

레이크의 눈은 불뚝 튀어나왔고, 손과 몸은 두려움으로 떨리는 듯하다.


SE-255dc599-0bad-4905-8fbb-a2da7e256110.jpg <The prison> 중 일부


불쌍한 사라, 그녀는 감옥에 수감된 전 약혼자의 모습을 보고 실신해있다.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그를 진정 사랑했을

순진하고 착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레이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The_madhouse,1735,oil_and_canvas,62.5x75cm.jpg William Hogarth, The madhouse, 1732-1735, oil on canvas, 62.5 x 75 cm 이미지 출처 | Wikiart


연작의 마지막, 여덟번째 그림 <The madhouse>.

레이크는 결국 정신이 이상해져 정신병원에 수감되었고, 옷을 벗은 채로 나뒹굴고 있다.

첫 그림에서 자신만만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럼에도 사라는 그의 옆을 지키고 있다.

눈물을 닦으며 그를 위로하는 그녀.

그러나 레이크는 사라를 등지고 끝까지 바라보지도 않는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남자.

사랑했던 이의 말로를 지켜보는 사라의 마음은 어땠을까?


SE-25c11536-fee4-42f3-931e-da7a612d0a6b.jpg <The madhouse> 중 일부


참고로 이 그림에서는 정신병원에 찾아온 귀부인들이 등장하는데, 당시에는 흔한 광경이었다.

영국에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이

이상행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즐기는 문화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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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Hogarth, suicide of the countees, 1743-1745(좌) / the banquet, 1754-1755(우) 이미지 출처 | Wikiart


호가스는 오늘 살펴본 <난봉꾼의 행각> 외에도 많은 연작을 그렸다.

위 그림 <좌: 유행에 따른 결혼 中 / 우: 선거 中> 또한 연작 중 일부.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을 재구성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호가스 연작의 큰 특징이다.

지금의 드라마들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호가스의 다음 그림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지 않았을까.

우리가 드라마 다음 회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글 | 아트맵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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