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포장된 이 예술이라는 것

In the House, 인 더 하우스, 프랑소와 오종

by Lacedie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천재 감독이라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프랑소와 오종의 특유의 서스펜스와 에로티시즘이 엿보이는 작품, 인 더 하우스이다.


장면 하나하나가 굉장히 세심하고 깊다. 제르망이 클로드에게 소설을 쓰면서 쓸데없는 에피소드를 추가하지 말라고 한 말을 생각하면, 오종의 이 영화는 장면 하나하나가 쓸데없는 곳이 없는 듯하다. “인 더 하우스”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르망과 클로드의 소설 창작 이야기와 라파의 집에서 벌어지는 소설 속 내용이 초반에는 잘 구별되지만 뒤로 갈수록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며,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면서 둘 사이의 구분은 무의미해지며 두 스토리는 합치된다.


“인 더 하우스”의 시작은 클로드의 글로부터 시작하고 그 글은 영화 전체를 잠식해 간다. 고등학교 문학교사인 제르망은 어느 날 숙제로 내준 클로드의 작문 글을 보게 된다. 제르망은 글 속의 내용이 외설적이라 할 수 있으나, 표현된 방식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계속되는 클로드의 외설적이나 재능 있는 글에 제르망은 매혹되고 그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싶어 한다. 클로드의 글 속의 내용은 이렇다. 클로드가 가장 친한 친구의 어머니를 은밀히 욕망하는 것, 클로드는 수학 과외를 빌미로 라파의 집에 들어가 그의 집을 관음하고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movie_imageEKCMLGSM.jpg


먼저 집 안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클로드는 일하던 중 다친 실업자인 아버지와, 어릴 적에 떠나간 엄마를 가지고 있는 소년이다. 클로드는 우연히 학교에서 라파의 가족을 보고, 자신이 생각하던 완벽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대체 그런 이상적인 가족은 어떠할까?라는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는 그 가족이 되고 싶은 욕망과 한편으로는 라파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인 에스더를 가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된다. 클로드는 에스더를 욕망하면서 계속해서 그녀에게서 자신의 엄마의 모습을 투영해서 바라본다. 에스더 남편의 철없음과 아내에 대한 무관심을 보고 클로드는 “그래 우리 엄마도 그렇게 떠났어.”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그의 욕망 속에서 에스더에게 전달한다. 클로드에게 에스더는 모성을 상징하고 결핍된 것에 대한 욕망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클로드가 에스더를 욕망하는 과정에서 클로드는 집 사람들 모르게 집 이곳저곳을 탐방하기도 하고, 에스더와 라파 부부의 대화를 몰래 엿듣기도 한다. 아주 밀접하고 가깝게.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관객은 남의 집을 생생하게 엿보게 된다. 클로드의 글을 읽는 제르망과 쟝은 클로드가 그렇게 다른 집을 관음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클로드가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을 제재하지 못하며, 또한 그들이 클로드의 글을 통하여 다른 집을 관음 하고 있는 것을 그만두지 못한다. 이와 같은 관음과 비윤리적이라, 금기된 것들에 대한 행위를 잘못된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다음에 계속”으로 이러지는 클로드의 글을 더 이상 놓지 못한다.

제르망이 그렇게 열심히 읽어가며, 열변을 토하며 논평했던 클로드의 글 속 에스더와 라파의 부부는 사실상 매우 가까운 곳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제르망, 그 자신이다. 제르망과 쟝의 부부의 관계도 영화가 흐를수록 라파와 에스더, 두 부부의 모습과 일치하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게 하나의 fake라면 클로드의 글 속 아내의 이야기에 무관심한 남편, 자신의 일만 걱정하는 남편과 집에 걸려있는 그림을 감상하던 모습들은 쉽게 다른 이미지로도 대체될 수 있게 된다. 이 마지막 서스펜스는 바로 오종의 특기. 긴장과 에로티시즘에 절정으로 휩싸일 때 오종은 기묘한 서스펜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종의 결말은 훌륭하게도 강한 충격과 함께 극의 짜임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 나가는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집에 대한 관음은 이전에도 영화에서 구현되었다. 히치콕의 이창으로부터 디스터비아 등이 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타인의 집에 대한 관음증을 벗어버리지 못한다. “인 더 하우스”에서도 관음증이 일어나는 곳은 타인의 집이다. 공공연하게 금기시되어지는 타인의 사생활, 깊은 사적인 공간을 알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근본적인 욕망일지도 모른다. (“인 더 하우스”의 마지막 장면은 이창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은 관음증의 충족과 또한 한 남자의 아내인 여성을 사랑하다는 것, 그런 금기시되는 것에 대한 욕망을 오종은 뒤섞어 긴장감이 흐르는 에로티시즘으로 구현해내고 있다. 독자가 된 관객들은 오종이 써 내려가는 이 아슬한 이야기를 감상하는 것을 도저히 그만두지 못한다. 이것이 어쩌면 우아하게 포장된 불륜 소설이라 해도 그것을 읽고 즐기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movie_imageCAXSIPWQ.jpg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in the house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아니다. 바로 제르망과 클로드의 관계에 대해서, 이 부분이 나를 더 신나게 했다. 제르망은 문학을 사랑하지만 클로드를 지도해주는 면을 보면, 상당히 배타적이고 보수적이며 문학에 대한 개념이 정형화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클로드의 글을 보면서, 이전에 나온 훌륭한 글들의 종합적인 요소들을 다 끼워 맞추고자 노력한다. 갈등이 존재해야 할 것, 인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나 너무 추하게는 묘사하지 말 것 등등. 반면에 클로드는 자유분방함 그 자체이다. 그의 글쓰기는 제르망의 지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도전적이다. 하지만 친구의 엄마를 욕망한다는 것, 이것은 그 내용 자체로만은 외설이다. 하지만 그런 외설을 담고 있는 그의 글도 외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르망은 나체와 같은 클로드의 글(에스더에 대한 탐욕을 숨기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건 막장 드라마이네, 좀 더 은밀해라 숨겨라라고 말하지만, 클로드의 글이 재미있다는 것, 읽고 싶어 진다는 것, 그가 재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제르망에게 클로드가 상징하는 것은 단지 탐나는 재능을 가지는 제자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과 편견 때문에 이루지 못한 현대 문학, 문학의 자유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클로드를 통해서 오종은 외설과 예술의 경계를 교묘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클로드는 마치 프랑수아 오종, 당신 같기도 하다. 제르망이 천재의 작품이라 찬사 하던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부인도 당시에는 외설 그 자체였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를 보며, 그토록 중대한 예술의 질문 “예술인가? 외설인가?”를 던져볼 수밖에 없게 된다.


movie_imageCAC4RJOE.jpg


이에 대한 영화 속 다른 재미있는 암시는 갤러리 전시를 준비하는 쟝에게서 나타나기도 한다. 레디메이드 작품이나, 성적인 작품을 통해서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지점을 내러티브 해주기도 한다. (그냥 평범한 시계에서 12를 13으로 바꿨다는 점에서 예술이 된다는 것과, 선풍기, 그리고 성기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 인형, 그리고 대체 뭐가 대단한지도 모르겠는 하늘을 찍은 다른 지도 모르겠는 연작 사진들) 누가 봐도 선풍기나 시계와 같은 것들을 보여주고 갤러리에 전시할 것이라고 하며, 갤러리에는 성적으로 자극적인 조각들이 있다. “이게 무슨 예술이야?”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제르망에게 쟝은 해석을 늘어놓는다. 이런 경계를 보여주는 것과 또 그 사이에서 외설을 예술로 승화하는 예술의 핑계를 비웃는 듯한? 어쩌면 자조적인 모습까지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을 볼 때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예술은 어떤 거창한 것이라기 보단 외설과 예술 그 경계와 간극을 노리는 작업이라는 것.


이런 주제로 확장될 만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이 영화가 정말 좋은 것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의 평대로 오종이 읽어주는 영화를 나는 정지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나 혼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