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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edie Jun 04. 2018

"우리는 너무 비폭력적이었습니다"

영화 <DETROIT / 디트로이트>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리뷰입니다. 

이 영화는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영화 디트로이트는 이집트 벽화 같은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흑인들의 위치와 역사를 간략하게 내레이션과 함께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67년 흑인 폭동과 그때 있었던 알제 호텔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 초반은 마치 실제 60~70년대의 디트로이트, 미국의 그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부당한 대우에 대한 증오와 폭력으로 분출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들이 화면 속 디트로이트 거리에는 가득했다. 또한 실제 당시 촬영된 영상을 영화 중간, 중간에 삽입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을 넘어서 이 거리를 걷고 있는 기분이다.







우리는 너무 비폭력적이었습니다. 


  영화 초반부 흑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할 때,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역사와 현재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현재가 아니더라도 이 흑인들의 권리 운동의 모습은 어느 나라에서든 있었던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흑인들은 상점을 깨부수고, 약탈하고, 거리는 말 그대로 무법지대. 건물들이 불타고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 가득하며 이런 이들의 목소리를 말살하고자 하는 공권력이 바다의 밀물처럼 디트로이트의 흑인들을 옥죄이는 공포. 분노와 공포가 가득한 거리를 보면서 왜 결국 폭력적일 수밖에 없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건 안타깝고도 끔찍한 일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사실 당연한 가치이고 평등은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평등이 모두에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자들이 평등을 달라고, 정당한 대우를 달라고 말해도 강자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듣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무기를 들고 유리를 깨고 불을 지를 수밖에 없는 거다. 그들의 요구는 사실 이런 폭력적인 행위와 다르게 단순하다, 우리들의 말에 귀 기울여달라는 것. 자유를 구하기 위한 싸움은 왜 평화롭게 이루어질 수 없는 걸까? 비폭력인 운동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강자의 자리에 놓이면, 그런 혹은 그런 자리에 있게 되는 우리들은 왜 그렇게 약자와 소수자의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는 걸까? 억압을 당하는 이들은 열심히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부당함과 분노들은 결국 터져버리기 마련이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너무 비폭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이 과격하다고 말해지는 행위를 해야 그제야 인식한다. 그들이 흑인들(약자들)에게 행했던 부당하고 차별적인 행위들이 더 과격하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은 채로, 다 알고 있었으면서. 흑인들은 자신들에게 행해지는 일들이 부당하다고 말하기 위해서 폭력적인 행위들을 택한다, 왜냐면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그런 폭동을 두고 백인들은 말하게 될 거다. 흑인들은 이처럼 감정적이고 화가 많고 폭력적이라고. 그들이 택한 폭력적인 행위를 빌미로 더 강한 진압과 폭력이 이루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이전에 있었던 차별을 정당화할 거리로 만든다.  




  영화 속에서는 세발의 총성이 울리고, 극 속 긴장감은 극도로 치닫는다. 디트로이트 백인 경찰은 총을 쏜 흑인을 찾기 위해서 알제 호텔에 급습하고 그 호텔에 있었던 흑인들과 백인 여성은 백인 경찰의 부당한 폭력과 협박에 위협을 받는다. 백인 경찰인 필립은 공포로 그들을 몰아놓고 협박하여 용의자를 찾으려고 한다. 영화를 처음부터 본 우리는 알고 있다. 이곳 흑인들은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실제 총을 쏘지 않았다는 것을. 영화 속에 흑인들은 전혀 물리적으로 약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알제 호텔 벽에 일련로 서서 백인 경찰에게 협박받고 있는 시퀀스는 단지 피부색만으로도 권력이 얼마나 다른지, 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권력으로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을 공포스럽고 끔찍하게 다가온다. 

  총성을 듣고 사건 장소에 찾은 디스뮤크스는 용의자인 흑인들과 백인 경찰 사이에 중재 역할을 하게 된다. 극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총을 뺏으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백인들이 흑인들을 억압하지 않을 거라고. 그 디스뮤크스의 말에 다른 흑인은 이렇게 말한다. 

산탄총 두 손으로 꽉 잡아봐요. 뺏을 수 있겠어요?




  대체 백인들은 더 무엇을 갖고 싶은 걸까? 흑인들은 총을 뺏을 수도 없는데, 자신들에게 주어진 총(권력과 힘)을 꽉 잡고는, 총을 버리거나 같이 나눠주지 않는 것을 물론이고, 그 총으로 총을 가지지 않은 자들을 쏘고 때린다. 또한 이건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차별도 아니다. 모든 강압된 진술은 무효하다. 경찰이 이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 필립은 강압적으로 진술을 얻어내고자 하고, 자신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모든 강압된 진술은 무효하다."라는 변호사의 말을 통해 심문하는 두 형사에게서 빠져나온다. 재판 장면은 길지 않지만 증인인 래리와 필립의 대우의 차이만 봐도 우리는 이 시대의 법조차도 얼마나 흑인들에게 차별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이처럼 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 시대의 폭력과 분노 그리고 공포와 차별을 꽉 채워 담아 보여준다. 





영화는 긴 호흡으로 말하고 있으나, 전혀 영화에 있어서 아쉬울 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너무 짧고 스릴만 강했다면 단순히 이 영화가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소재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다. 이 영화를 같이 봤던 친구가 이렇게 내게 말했다. "보는 내내 너무 갑갑했어." 2시간 23분을 달리는 동안 영화는 숨이 막히도록 답답하고 불편하다. 이런 사건이 단지 과거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답답했을 텐데, 영화를 보는 우리를 더 숨 막히게 하는 건 (모두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느끼겠지만) 지금도 별다를 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영화처럼 갑갑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당연한 것들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사라지지 않는 차별들. 이 영화를 보면 그 문제가 눈 앞에 놓이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심지어 풀릴 수는 있는 문제인지 의아스럽다. 하지만 이 불편함이 특정한 사람들만 느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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