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올해의 작가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KOREA ARTIST PRIZE 2018
GALLERY 1,2 2018.8.11-2018.11.25
신시아 프리랜드의 “과연 그것이 미술일까?”라는 책이 있다. 이것이 과연 미술이라 할 수 있는지, 장난은 아닌지, 현대 미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현대 미술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해왔던 단순히 예쁜 ‘그림’을 넘어서 그림이 더 이상 액자가 아니라 어떠해야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현대 예술의 지점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매번 전시를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현대의 예술이라는 건 참 특이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요즘 현대 예술이라는 필드를 구경하면 대부분의 대중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도 예술이야? 나도 하겠다!” 그 말엔 현대 예술의, 또한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동시대 예술(contemporary Art)의 핵심이 있다.
추석 연휴에 서울에 미술관과 고궁에서 무료입장 이벤트를 진행했다. 오랜만에 전시를 보러 가려고 대체휴일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기분 좋게 무료로 보고 왔다.
이들의 예술은 어떤 점에서 '동시대적'인 것인가
오랜만에 간 전시, 그곳에는 앞에 말했던 저 질문들이 있었다. 무엇이 예술인가? 무엇이 동시대 예술을 규정하는가? “이들의 예술은 어떤 점에서 ‘동시대적’인 것인가.” “올해 4명(팀)의 작가들을 공통적으로 ‘지금 우리를 둘러싼 상황/사고가 본래적인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삶 가까운 곳에서 발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미학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의미 있게 탐구하며, 그 과정에서의 비판적 성찰과 탐구 과정을 공유하는 4명(팀)의 신작을 보여주려고 한다.”_전시 브로슈어 인용
그에 대한 질문을 예술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정말 많이 떨어진, 동시대 예술이라고 할 만한, 올해의 작가상 4팀의 작품을 보고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대체로 미술은, 예술은, 아름다운 것으로 이야기되어져왔고 무엇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다룬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예술은 향유를 위한 키치를 거치고 나서 더 이상 절대적인, 미적인,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버리기 시작한다. 그게 현대미술의 절정이었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예술작품의 자리로 불러온 일을 현대 예술이 했다면 동시대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엔 동시대 미술은 예술답지 않은 것을 예술의 공간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예술이야? 나도 하겠다” 말들이 공공연한 것처럼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대중이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부분으로 예술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는 (작업의 방식과 기술적 의미에 있어서 ) 쉬운 방법으로 어려운(?) 담론을 더하는 것이다.
정은영: 무엇이, 어떻게, 동시대의 예술이 되는가?
정은영 작가는 아예 그 질문을 가지고 와버렸다. “무엇이, 어떻게 동시대의 예술이 되는가?” 여기서의 물음은 동시대의 미술이 처음부터 그렇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예술로 되어간다는 점에서 어떠한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여성국극을 통하여 자신의 주제를 어필하려고 한다. 정은영 작가의 작품은 영상 작업뿐만 아니라 영상을 진행하기 위해 같이 진행되었던 아카이브 작업도 함께 이루어져 있다. 작업 속에 아카이브 작업을 같이 넣음으로써 여성국극이 예술의 어떤 위치에서, 담론에서 변화하고 기억되어왔는지를 다룸과 동시에 지금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담론인 젠더 문제까지 논하고 있다.
구민자: 하루에 두 번 살 수 있는가? 문명이 자연에 개입될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
구민자 작가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인위적인 설정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날짜변경선이 있는 피지 섬으로 가서 작업한다. "피지의 타베우니에서 날짜변경선 동쪽은 오늘이지만, 서쪽으로 한 걸음만 가면 어제가 된다. 만약 한 사람이 날짜변경선 동쪽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서쪽에서 하루를 보낸다면 그 사람은 하루를 두 번 살게 된다. 반대로 날짜변경선 서쪽에서 하루를 보낸 사람이 다음 날 날짜변경선 동쪽에서 하루를 보낸다면 그 사람은 하루를 건너뛰고 이틀 뒤의 날짜를 살게 된다. 시간은 불가역적이지만, 타베우니에서 이 불가능한 상황이 가능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_전시 브로슈어 인용 <전날의 섬 내일의 섬> 작품은 작가와 작가의 지인이 위와 같은 경험을 직접 피지 섬에서 퍼포먼스로 행한 후에 영상에 담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사고의 전환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관념을 불편하고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와 같은 인위적인 것들에 대한 의미를 다시 재고하게 된다. 자연이라는 사태에서 문명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 영향이 어떻게 발휘되어있는 사회인지 재고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작가 또한 4 작가가 올해의 작가상으로 엮일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인위적으로 형성되는 것들이, '시간'뿐만 아니라 '동시대 예술'에서도 다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대 예술을 누가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그건 그 시대의 흐름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틀이 될 수밖에 없고, 작가들은 그에 맞는 예술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옥인 콜렉티브: 우리는 왜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옥인 콜렉티브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사라진 것들, 소외된 공간, 그 속에 모이는 사람들을 담는다. 종로구 옥인 아파트 철거를 계기로 모인 이 멤버들은, 모인 계기를 비롯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사라져 가고, 철거되며, 소외되고, 과거의 것들 그것을 옥인 콜렉티브와 정재호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재호는 그러한 사라졌던 과거의 유토피아들, 사실상 과거의 망령들이 어떻게 형성되어졌는가? 그것은 정말 순수한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것인가 정치적인 주제로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면, 옥인 콜렉티브는 그 없어져 가는 것들, 과거의 망령들, 그와 관계된 인간들 그 과거의 망령들 속 인간들과 관계, 그 사회와 환경과 인간의 관계, 그 속에서 또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서울, 제주 인천 세도시에서 공동체를 인터뷰한 영상작업들은 사실상 되게 친근하고 편안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듯하게, 보는 내내 피식 웃음이 솟아난다. 그러나 그 속에 냉담함이 있다. 그것이 은연하게 칼이 되어 찌르는 무언가가 있다. "미디어 속에서 단순화된 관계와 상황에 내포된 양가적이고 중층적인 사람들의 감정, 태도, 상황을 노출시켜, 근대 도시에서 공동체와 개인, 공동체와 공동체, 개인과 개인 간에 존재하는 갈등과 화해 연대의 의미와 한계를 모두 다룬다."_전시 브로슈어 인용. "구성원과 공동체는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어떻게 공동체가 유지되어 가는지" 서늘한 따뜻함으로 옥인 콜레티브는 말을 걸고 있다.
정재호: 그 시절, 소년소녀들은 왜 과학기술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나.
정재호는 을지로나 종로에 아직 남아있는, 이미 많이 낡아버린,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던 당시 60~70년대 만들었던 건물의 표면을 미술관에 만들어 위치시킨다. 그는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 성장 속에서 번영과 발전, 즉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도시 풍경 이면에 관심을 두고 있다."(_전시 브로슈어 인용) 당시에는 모던 건물로 근대화를 자랑했던 그 건물들은 지금 재개발의 목표들이며, 낡고 녹슬고 과거의 유물로 남아있다. 또한 당대에 모든 시대 사람들이 지녔던 과학기술의 유토피아를 재고하는 작업을 한다. 그런 과학기술의 유토피아는 한 편으로는 망상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주도했던 프레임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작가는 국가가 개발도상국의 국민 모두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를 밝은 미래를 꿈꾸도록 '권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거대한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의 진실을 파헤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현대 미술의 특징 중 하나이다. 현대미술은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고나 당연하다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 그러한가를 재고하게 하며 반문하게 하는 문제를 제기해준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의미를 가진다.
작가 인터뷰 중 작가들은 이와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불편했으면 좋겠다. 과거의 생각들이 어쩌면 만들어낸 것들 우연적으로 생긴 것들 하지만 그 안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이 4명의 작가들은 과거의 망령들을 어떻게 재건하는가? 그건 이 4 작가를 묶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번 2018년도 전시 소개엔 “현대 예술의 의미나 역할에 대해 관객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제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에게 예술은 시각적 즐거움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관객들이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고 감각할 수 있는 인식적 전환의 계기에 가깝다.”(_전시 브로슈어 인용)라고 그들을 작품 속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위와 같은 작품들은 전혀, 결코, 심미적으로 아름답지 않다. 투박하기도 하며 유튜브 실험 영화 영상을 보고 있는지 전시를 보고 있는지에 대한 장르적 애매모호함도 있다. 전시장에는 작품이라고 하기엔 조금 괴리감이 느껴지는 사물들이 놓여있기도 하다. 미술관이라는 장소적 특성이 미술을 만든다는 말이 생각났다. 미술관에 가면 그곳에 어색한 물품이 덩그러니 놓여있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작품이 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는 우스운 사건들. 이번 전시에서 나는 그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이 작품이 되는 것은 미술관이 작품이라는 가치를 부여해주는 것처럼, 그들이 한 것은 그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뒤샹이 전시회에 변기를 들고 가 사람들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처럼. 뒤샹이 서명과 선택을 통하여 그것을 예술작품이 되게 만들었다면, 요즘 작가들은 의미를 부여하는 거 같다. 의미를 넣어서 그것을 예술 작품이 되게 만든다. 단순히 심미적인 것을 학예적으로 미학적으로 설명을 길게 적어내릴 수 없으면 그건 과연 예술일까? 그것을 예술이라고 말할까?
내가 하지만 제기하고 싶은 문제의식은 이거다. 예술가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대중은 불편해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대중이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대중은 우매하다고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왜냐면 그렇다고 하기에 필자 또한 지극히 대중적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불편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지금 미술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알면서 과연 이것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좀 더 현명한 꾀를 내어야 하지 않을까? 설명과 담론을 이해해야 납득이 되는 예술을 언제까지 예술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러한 예술은 대중을 인식 전환시키지 못한다. 학문적, 미학적으로는 현명할지 몰라도,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자기주장으로 보자면 현명하지 못하다. 대중을 꼬실 줄 알아야 하는 예술은 탄생하지 않는 것인가? 언제나 예술은 지식층의 향유 놀음밖에 될 수 없는 것인가?
예술의 경계는 한없이 더 얇아지고 흐릿해지고 있지만 대중과의 소통은 깊어지고 있나? 그것이 의문이다. 한없이 얕아지고 있지는 않나? 예술을 향유하는 지위에 있다고 생각을 하도록 만든 체계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자신의 취향이 늘 고급 지기를 열망하는가? 키치 한 취향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가? 현대사회에서 계몽은 개소리다, 기껏 만들어놓은 다양성의 틀을 한 가지의 수직적 관계로 다시 자진적으로 지향에서 나가고 있는, 저급함과 고급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