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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edie Nov 14. 2018

창조를 재현하기

사루비아 다방 "실제 있었던 일인데" 갤러리 현대 "라포르 서커스" 리뷰



  아주 먼 옛날에 한국이라는 땅에서 조금 아주 먼 곳에,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가 말하길 현실이란 “이데아의 모방”이요, 예술이란 “그 모방인 현실의 또 모방”이라 말했다. 옛 서양인들은 모방이 예술의 시작이라고 보았고, 이걸 좀 더 간지 나게 말하자면 “재현(representation)”이다. 재현이란 라틴어 repraesentatio에서 왔는데 그 뜻을 풀자면 re (다시) - praesentatio (현전케 하는 것/ 다시 드러남)이다. 그러니까 예술은 이를 매개를 통해, 다시 현실을 현전하게 하는 것이다. 모방하는 방식으로 예술은 고대 그리스에서 하나의 기술이었고, 그것은 역사가 흘러서 창작이 되었다.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라는 말은 뜬구름 같이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다. 그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 시대는 많이 지나왔건만, (아, 그리고 덧붙이자면 동일성으로 핍박받는 차이를 근래? 프랑스 철학자들이 구원해주고 있다. 동일함, 유사성으로 좋은 그림의 가치로 치던 예술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그러면 지금 예술은 재현에서 벗어난 것일까?  다음에 소개할 전시에서 나는 아직도 “재현”이 반복되고 있는 현대 미술을 보았다. 그러나 재현의 방식은 이전과 같지 않다. 




  사루비아 다방에서 11월 23일까지 전시하는 이민선 작가의 "실제 있었던 일인데" ("You Know, it might actually happen") 전시는 세 개의 영상이 놓여 있고 세 개의 영상에 따라서 다른 공간들이 구성되어 있다. 다른 색의 소설책과 다른 장면들이 나오는 영상들, 그리고 필름 사진들이 놓여있다. 처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진과 영상들은 그 앞에 덩그러니 무더기로 놓여있는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소설은 예술가의 작업 내용이 되는 에피소드를 서술한다. 전시 제목이 "실제 있었던 일인데"라니까 이것은 작가의 일기와도 같은 것일까? 소설의 흐름과 시간 순서인지 아마 그런 것으로 추정되는 필름 사진들이 이 일은 실제로 작가가 겪은 에피소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책으로 만들어져 하나의 소설이 되었기 때문에 픽션이 된다. 그럼 그건 실제 있었던 일인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영상과 사진은 소설을 읽는 순간 무엇을 재현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인물에 대한 이야기들로 얽혀 있는 이 전시는 사진, 소설, 영상이라는 매체를 매개하여 우리에게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를 실제의 사건을 재현한다. 


  "이를 위해 먼저 그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24시간 동안 41분 간격으로 눈앞의 광경을 찍어 인화된 사진으로 남긴다. 다음으로 필름 카메라로 얻은 36컷의 사진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마지막으로 사진에서 누락된 정보를 채워나간 소설을 바탕으로 시간의 서사와 이미지를 입힌 영상을 제작한다. 이렇게 시간을 물질에 담은 사진, 누락된 시간을 메운 소설, 언어를 시간에 옮긴 영상은 실화와 픽션, 경험과 기억, 편집과 재연을 오가며 전시장 곳곳에 배치되어 서로 간의 느슨한 관계를 들어낸다"

출처_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황정인


  그렇다면 이 전시는 허구인 걸까? 실재인 걸까? 그 관계가 느슨하다,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36컷의 사진이 이야기의 바탕이 되었을 터이니 완전히 실제 하지 않았던 일은 아닐 테고. 그리고 또 무엇이 무엇을 재현하는 거지? 여기서 분명 소설이고 사진이고 영상이고 어떤 무언가를 재현하고 있다. 이 곳에 다른 방식으로 그 사건을 다시 나타나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재현되는 것은 그 당시의 실제 사건인가? 아니면 사진을 소설이 재현하는 것인가? 아니면 픽션이 완성된 결과물인 소설이 먼저 창조되고 영상이 그를 재현하고 사진이 그의 영감이 되는 것일까? 작가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을 다시 재현하고 있다. 재현의 대상이 무엇인지 확실하기 알기는 어렵다. 작가는 재현을 하고 있지만 현실 그 자체를 유사성을 바탕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허구의 것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이건 기존의 재현과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갤러리 현대에서는 11월 25일까지 전시되는 박민준 작가의 "라포르 서커스"에서도 재현이라는 측면과, 시뮬라시옹(허상을 만들어냄)이라는 측면에서 위 전시와 같은 맥락을 엿볼 수 있다. 전시의 주제인 라포르 서커스는 작가가 만든 허구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조각한 조각들과 설치들 그리고 그림을 따라 건물을 올라가면 한 권의 소설책을 만날 수 있는데, 이 모든 캐릭터들과 설정과 에피소드들이 의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소설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은 그가 만들어낸 허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이 개인전을 기획하면서 한 것은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소설을 다시 재-현한 것이다. 다시 만든 것이다. 물론 같은 방식이 아니지만. 텍스트였던 그의 창작소설을 조각과 설치 그리고 회화로  다시 구현해낸다. 앞에서 이민선 작가의 경우 영상과 사진이라는 (그래도) 현대적인 매체를 사용하였다면 박민준은 서구 고전 회화와 같은 닮음에 충실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재현한다. 박민준 작가의 환상 속 서커스를 담아내고 있는 그림들은 서구 르네상스 시대의 종교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재현의 방식과 표현을 그대로 했지만 그 안의 재현된 표상을 보면 이것은 단순히 재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현실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허상, 허구의 것을 다시 재현하여 보여준다.


서커스 일원인 그림 속 여인은 마치 성녀같이 그려졌다



  창작하는 것을 재현한다. 예술이라는 소재가 하나의 방식이 아닌 여러 방식으로 재현됨으로써 각각 색을 다르게 하며 서로는 같으면서 다르다. 이런 재현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비 재현적 모방은 아니지만 (원본과의 유사성이나 동일성을 구현해내는 점에서 둘은 왜곡하거나 위와 같은 재현의 조건에서 크게 어긋나지도 않았다.) 사실 재현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원본이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부로 전시를 위해 만들어 낸 창작. 원본조차 사실 시뮬라크르인, 시뮬라시옹을 통해서 계속해서 시뮬라크르를 재생산해 내는 현대 예술은 무엇을 창조하고 있는 것일까?





재현의 어원은 "재현이란 무엇인가", 채윤, 그린비, 2009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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