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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edie Oct 30. 2018

아픔을 함께한다는 건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추상미 감독의 작품인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보고 왔다. 추상미 감독은 이 영화를 시작한 계기가 사진 한 장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흥미에서부터 시작한 그녀는 어느새 송이와 함께 폴란드의 땅을 밟는 여정까지로 이어진다. 그 과정이 고스란히 그녀의 카메라에 담긴다. 그 영화가 바로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다. 어느 날 어떠한 사진으로부터 마음이 쓰여서, 자꾸 사진 속에 소녀에게 마음이 가서, 그때 그녀가 알게 된 것이 폴란드로 간 한국의 아이들이었다. 그녀는 그 발자취를 쫒아 가고자 한다. 


  1951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고아 어린아이들이 북한의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로 보내진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 폴란드 사람들과 그 아이들은 서로 어울려서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 추상미는 폴란드로 가 그 발자취를 밟는다. 그녀가 찾아간 사진 속 아이들은 웃음을 짓고 있고, 따뜻해 보이고, 평안하고 평온해 보인다. 폴란드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상처를 알기에, 어린아이들을 전쟁의 상처로부터 치유하고자 한다.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모습도 너무 다른 두 인종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 저렇게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공감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내가 너의 마음을 알아"라고 말할 때, 그건 너와 유사한 경험이 있고, 너의 상황을 내가 체험해 봤기에 어떤 마음일지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은 공감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경험하지 않은 자들은 경험한 자의 경험을 알지 못한다. 생의 경험은 겪지 않고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같은 경험으로 인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연민하는 것이다. 같은 아픔이 있기에, 같은 기쁨이 있기에 서로를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내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이다, 심지어 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조차 공감에서는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 문제인지 우리가 생각해본다면.


  나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이다. 그러니까 영화 속에 나온 저 아이들처럼, 그리고 보육원의 폴란드 선생님들처럼 전쟁을 겪지 않았다. 나는 전쟁을 모른다. 우연과 비극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고향을 잃고 잊지 못할 상처를 안고 살게 되는 전쟁으로 인한 아픔을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저들의 아픔을 온전히 공감할 수도 안아줄 수도 없는 마음을 간직할 수밖에 없고, 나는 전쟁에 관한 영화나 책을 읽으면 그 아픔과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할 수 없어 혼자 마음 아파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그 경험과 고통을 모르면서 연민을 가지는 것은 오만, 아니면 기만이 아닐까? 연민이라는 단어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즐거운 일에 같이 기뻐하는 것은 쉬운데, 왜 슬픈 일을 같이 슬퍼하는 일들은 더 어려운 걸까. 같이 슬퍼하는 일은 너무 내게 조심스러운 일이다.  


  나는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고 일상생활 중에서는 그것이 세계 어딘가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디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전쟁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전쟁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한반도에서도 겪지 않은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도 전쟁의 역사가 있다. 그 아픔의 과거가 있고, 그 아픔은 어디에선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전쟁의 아픔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것을 몰라도, 그 아픔은 사라져야 할 아픔이니까. 내가 겪지 않은 것이라고 없는 것이라 생각하면, 언젠가 나는 같은 아픔을 겪을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아픈 자들을 이해하겠지만, 아픔이 계속해서 떠도는 세상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어떠한 사소한 것들, 이유를 모르는 것들, 인과가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 많은 것을 알고 느끼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추상미 감독이 이 영화를 찍기로 결심하고 그 사진을 따라 울었던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공감의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럴 때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아픔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해도. 지난날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고 한동안 체르노빌에서 빠져나올 수 없이, 체르노빌의 비극에 대해서 찾았던 시간이 기억난다. 그건 내가 겪지 않았던 비극이지만, 나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단순하지만, 역사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닐까? 계속해서 우리는 같은 실수를 하지만, 맹목적으로 아픔이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나는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것일까? 정말 진부한 이야기지만, 남의 아픔을 다듬어 줄 수 있고 안아줄 수 있는 사랑이, 사랑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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