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body's Own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

by Lacedie


Everybody's Own

-넷플릭스 "루머의 루머의 루머" "13 reasons why"



해당 드라마의 시즌 1의 전반적인 내용, 대사를 인용하고 있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시즌1의 회차가 3-4화가 되었을 때쯤, 나는 내가 남녀공학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회차를 거듭하면서 나오는 해나의 경험은 나에게 완전히 동떨어진 경험이 아니었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남자들, 재수 학원에서 같이 공부를 하던 남학생들,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남자 또래들. 그들은 나에게 해나가 겪었던 비슷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나에게는 완전히 없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내가 겪었던 경험들을 다시 복귀해 보았다.

재수학원 때 남학생들끼리 했던 말들과 웃음거리 같은 성희롱들. 그들은 자고 있는 여자인 같은 반 친구 얼굴을 보며 그 앞에서 희희낙락 거리며 비웃었고, 겉도는 친구에 가슴을 노트에 그리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킬킬거리며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You are not a Girl


너는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단순한 말도 어떠한 상처가 되는지 모르잖아. 그렇다, 그들은 모른다. "단순히 장난이었어요."라는 말들 뒤에 숨어서, 그 말들이 어떤 이들의 가슴속에는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평생 남는다는 것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장난의 이름을 한 폭력들, 절망과 상실을 토로하는 것들은 교실에서는 웃음거리가 된다, 교실에서는. 교실은 클래이의 말처럼 잔혹한 곳이다. 교실에서는 웃고 같이 가십거리를 즐기지 않으면 안 된다.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 내가 웃음거리가 될 것 같은 교실에서만 존재하는 이상한 룰이 흐르고 있으니까.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때로는 잔혹하다. 또래 심리는 잔혹하다. 그곳에서 오고 가는 폭력은 군중이라는 집합체 안에서 똑같이 별 거 아니라고 생각으로 폭력을 가벼운 행동과 장난으로 만든다.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이 이 교실의 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진지하게 굴지 마"라는 말이 되돌아오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에 무심한 듯한 클래이를 두고 너는 너의 생각이 있다, 지조가 있다는 말들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자살이 누군가 잘못 때문이 될 수 있을까? 클래이가 "Did I kill Hannah?"라고 물었을 때, 토니는 그건 그녀의 선택이었다고, 그녀는 자살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거기 있는 이들은 그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말한다, 그건 해나의 선택이었다고. 사실 그렇다. 자살은 하나의 선택이다. 그들이 해나를 죽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해나에게 자살을 택할 13가지 이유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니까 토니의 말처럼 우리는 해나를 "let her down"한 거다. 구할 수도 어쩌면 구하지 못할 수도 있는 존재를 실망시켰다는 것. 그것이 그녀의 죽음에 우리의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죽음을 그녀의 선택으로 회피하려는 자들에게 클래이는 끊임없이 "행동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되풀이하여 말한다.


그러나 클래이는 무심하다. 드라마에서 과거의 플래시백이 나올 때마다 클래이는 조금 답답해 보일 정도로, 문맥을 읽지 못한다. 클래이가 스카이가 말하는 방식을 보고 그녀는 정말 못 됐다고 불만을 늘어놓자, 토니는 말한다. "너는 그녀를 모른다"라고. 우리 모두가 그렇다. 각자의 사정, 우리는 각자의, 자신만의 것들만을 알 수 있을 뿐이지, 타인의 사정과 아픔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말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우리에게 모두 각자의 아픔이 있고 각자의 상실이 있고 상처가 있다. 클래이가 답답하고 문맥을 읽지 못하는 것은, 각자에게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클래이는 해나의 이야기만 듣고 다른 사람들을 추궁한다. 그들에게도 해나와 같이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걸 드라마 중반까지는 깨닫지 못한다.

이 사건을 두고, 클래이는 이해하고 싶어 하고, 클래이의 엄마는 진실을 찾고 싶어 한다. 진실은 객관적인 것이지만(또는 객관적이라고 여겨지지만,) 이해는 객관적으로 될 수 없다.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이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상, 토니의 말처럼 테이프에 녹음된 루머가 아닌 진실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Her truthes, 그녀의 사실일 뿐이다. 우리는 나 자신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없으니까. 내가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이는 것, 내 눈으로 보고 내 코로 맡고 내 귀로 듣고 내 마음으로 느낀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자신들만의 진실이 되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클래이의 진실이 따로 존재할 수 있듯이. 그렇기에 토니는 11번째 테이프를 듣는 클래이를 통해, 해나의 진실과 클래이의 진실 모두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에게는 각자의 것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해는 없을 것이다.


이 묵직한 드라마를 보고 중간에 끊고 나오기가 무지 힘들었다. 처음엔 남 일 같이 느껴졌지만, 후엔 내 아픔과 동일시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나의 행동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해나만의 잘못은 아니지만 해나도 잘못이 있고 누군가의 온전한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의 잘못이기도 하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냥 세계는 썩었고 망할 것이지만 그래도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나와 너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게 조금은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거라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관계를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