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차나 한 잔" 소설집에 나타나는 남성성, 여성성에 대하여
오랜만에 김승옥의 '서울'을 다시 읽었다. 김승옥의 '서울'을 읽고 일전에 "서울의 우울"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 두 단어의 조합은 김승옥의 서울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관해서 쓸 일이 있어서 민음사, 쏜살문고판으로 나온 "차나 한잔"을 읽었다. 재독(再讀)의 즐거움은 지금 내가 있는 지점, 처해있고 경험했던 것들에 의해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다시 읽은 김승옥의 서울 속 인물들은 불쾌했고, 한심해 보였다. 일전에는 김승옥 소설의 정서와 쓸쓸한 도시의 분위기에 크게 감명받았지만, 다시 읽은 김승옥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비겁하고 나약하기만 했다.
김승옥의 소설이 재미있는 점은, 1960년대 현대의 도시와 풍경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그 정서와 감정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점이다. 김승옥 소설 속 주인공들은 지금 현대인들과 다름없이, 불안해하며, 무관심하고, 공허해한다. 그러나 김승옥의 소설 속의 인물들은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라는 말은 -앞으로 할 말을 생각하자면- 논쟁 거리가 될 수도 있으니 다시 이렇게 말해보자. 김승옥 소설 속의 인물들은 나 자신을 모르며,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그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서 또 무엇을 붙들어야 한다.
오늘 중으로 무언가 확실한 걸 붙들어 둬야 한다.
어제와 오늘과 그리고 내일을 순조롭게 연속시켜 주는 것을
붙잡아 둬야 한다
김승옥, "차나 한잔" 중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무엇이 확실한지도 모르고, 자신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도 명확히 모른다. 단지 따듯한 체하는 이 쌀쌀한 도시에서 연명해 나갈 것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불안함을 느끼지만 그 불안감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른다. 단지 그들은 더 이상 불안해하고 싶지 않고 싶을 뿐이다.
이런 인물들은 현대 도시에 대한 부조리를 느끼며 그에 따른 불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불안은 인지과정을 거치지 못한 불안이다. 부조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불안이다. 이 부조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이 불안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그에 대한 고찰과 생각은 없다. 그들은 단지 불안해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짓궂은 장난인 듯이 가장하고 있는 사내들의 그 행위 속에는, 대낮의 생활로부터, 이 도시로부터, 자기의 예정된 생활로부터, 자기가 싫증이 날 지경으로 잘 알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해 보고 싶은 욕구가 움직이고 있음을 현주는 알고 있는 것이다.
김승옥, "야행", 민음사, 43쪽
매일 아침 출근해서 근무, 그리고 퇴근, 그 후의 밤, 그리고 다시 다음 날의 출근, 그리고 퇴근, 그리고 다시 출근...... 거리의 남자들은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지루함을 느낀다. 반복되는 도시의 생활로부터, 쳇바퀴 같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은 왜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 모르면서 단지 도망가고 싶다는 욕망만을 따를 뿐이다. 아래 59쪽에 보면, 그들의 일탈과 탈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현실의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반복의 굴레가 지겹다는 것을 알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를 희망하지만,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며, 실제로 탈주를 하지도 않는다. 일상을 벗어나는, 내가 알고 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주하는 것은 공포와 혼란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늘 공포와 혼란이 전제되는 길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울타리 안에서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만 한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부조리를 깨닫고 벗어나고 전복할 만큼의 적극적인 욕망은 드러나지 않는다. "야행"의 남자들의 헌팅은 단순히 어떤 해소에 지나지 않는다. 김승옥의 해당 소설 속 남자들 결국 그 어떤 것에서도 해방되지 않는 것이다.
차츰 그 여자는 깨달았다. 사내들이 탈출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거의 모두가 조건부라는 것을. 다시 말해서 사내들은 영원히 '이곳'을 떠날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들은 잠깐 울타리를 뚫고 밖으로 나가 본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니 미처 그것도 아니다. 울타리 안에서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만 한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김승옥, "야행" 민음사, 59쪽
야행의 현주가 화가 난 이유는 그들의 욕망이 단지 해소의 것이기 때문이며, 자신이 갖고 있는 욕망을 뚜렷하게 인지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행위를 농담으로 돌려 버리려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있어서도 그들은 회피하는 것이다.
소설에 현주의 말을 빌리면 현주는 속임수 즉, 거짓들에 의한 일상에 대한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밤거리를 돌아다니나, 앞의 남자들과의 이유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주는 진실을 통한 구원을 찾고 있다고 소설은 서술한다. 그를 통해 더 이상 속임수와 거짓이 아닌, 진실에 대한 현주의 갈구가 드러난다. 김승옥의 의도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서술되는 현주에게 욕망은 다른 남성들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현주는 그들의 욕망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런 것들에 대해서 분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주가 자신의 일상이 속임수로 가득했다는 것과 자신의 욕망을 깨닫게 되는 것을 꼭 '강간'이라는 서사를 통해서 풀어야 했을까? 김승옥의 소설 속 여성은 그러므로 다시 시대의 한계에 갇힌다. 남성으로서 '강간'이라는 모티프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녀가 진실과 욕망을 깨닫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왜 그런 방식으로 서술했었어야 했을까? 김승옥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 여성성에 대한 부정적이나 긍정적인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놀라운 것은 김승옥의 소설 속에서 여자들은 타락하거나, 죽은 것, 도구적이고 부차적인 것, 창녀의 이미지, 대상과 수단으로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여성성의 긍정적인 측면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서울의 달빛 0장"에서는 화자가 여성인 아내와 한 대화로 추측되는 구절에서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전략) 전쟁은 필연적이다. 전쟁으로 모두 빼앗기고 다시 시작.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그게 아녜요. 형편이 나아져서가 아녜요. 아내가 말한다. 그럼 뭐야. 그렇군, 형편이 더 나빠져서군. 돈 때문이니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건 돈이니까. 아녜요. 슬픔 때문예요. 종말에 대한 슬픔이 섹스를 만든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슬픔이 우리들의 섹스를 만들어요.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어요. 당신이 바라고 있는 그 전쟁 때문예요. 정부에서도 신문에서도 전쟁에 대비하라고 야단들이잖아요? 내가 얘기하는 건 그런 전쟁이 아냐. 전쟁은 다 마찬가지예요. 전쟁이 나면 이번엔 아무 데도 도망갈 데가 없다는 걸 어린애까지도 알고 있어요. 지난번 전쟁보다 끔찍하리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도 정치권력도 아녜요. 종말에 대한 불안이에요. (중략)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적개심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적들에게도 불 탈 집이 있고 고아원으로 갈 아이들이 있어서 우리처럼 슬퍼하고 있는지 하는 사실 대해서뿐예요. 희망을 거는 건 인간이 독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서뿐이죠. 그렇지만 그런 희망이 얼마나 허망한 결과로 나타나는지 정부에서 설명 안해 줘도 누구나 알고 있어요. 그래요,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슬픔예요. 그 슬픔은 특히 남자들을 사로잡고 있어요. 그 슬픔이 남자들의 윤리를 허물어뜨려요. 윤리란 미래적인 거죠. 우리에겐 미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허물어진 남자들이 여자를 지배하고 있고요. 그래서 모두 슬픈 거예요.
김승옥, "서울의 달빛 0장", 15-16쪽.
"서울 달빛 0장"의 나는 나의 고독과 나의 슬픔으로만 침잠하며, 자신의 슬픔과 괴로움의 원인을 오히려 여성에게 전과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여성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만, 그는 방황 속에서 유영할 뿐이다. 그의 슬픔은 세계의 슬픔과 연결되지 않는다. 지극히 에고이즘적인, 주체의 폭력이 드러나는 남성성의 묘사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의 환원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 원초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의 회복. 진정 그것이 이 사회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세계 모두가 이성에 대한 반성을 했던 대전 이후로 아직까지 유효한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흔히 여성성으로 대변되는 힘들이 오히려 세상에 필요할 지도 모른다. 부드러움이나 나약함에 대한 인정, 배려와 같은 것들. 이성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이고 아도르노도 "계몽의 변증법"을 통하여 이미 몇십 년 전에 이야기했다. 이성적인 것들은 오히려 비이성으로 치닫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른 방식이다.
남성은 그릇된 남성성을 서술하고, 그 서술된 남성성을 바라보며 자신의 그릇된 남성성을 정당화한다. -사설이지만, 나는 한 때, 홍상수의 영화를 즐겨 보았는데 나는 남성들이 그 영화를 보고 자신의 찌질함을 반성하거나 돌아볼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영화 속 남자들이 내가 겪었던 남자들과 결코 다르지 않아서 모든 장면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남성들에게 홍상수의 영화란 정당화를 위한 서사일 뿐이었다. 그 사실이 한때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의 소설에는 그 시대에 그럴 법한 "방황"만 있다. 방황만으로, 회피만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언제까지 방황하며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만 칠 것인가? 언제까지?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쓸쓸한 마음과 정서만을 가지고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그렇게 된다면 도시라는 괴물에게 우리는 먹힐 것이다.
"김 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도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기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 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민음사, 1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