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by 김예린


2년 전, 로컬스티치 서교에 사는 동안 우연히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알콜중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판단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조심스럽게 꺼내는 이야기들 속에는 파리의 유명 패션학교를 다녔던 젊은 날의 기억,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국에 돌아온 사연, 생계를 위해 일하며 사이드로는 그림책 이야기를 쓰는 삶이 담겨 있었다. 일본어를 잘했고, 일본인 여자친구와의 소소한 이야기도 곁들여졌다. 말투나 표정 어딘가에 아이 같은 순수함이 느껴졌고, 나는 어느새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판단을 멈춘 자리엔 수용력이 자리를 잡았다.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아도, 그 사람의 삶이 조용히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그분은 가끔 키친에서 요리를 나눠주시기도 했다. 식당에서 요리 일을 하면서, 동료의 신뢰를 얻어 다른 프로젝트를 도와주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주셨다. 그것은 내가 판단을 내려놓았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내 삶의 온도를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에포케(epokhē)’라는 단어가 있다. 판단을 잠시 멈춘다는 뜻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단정짓지 않고 그 자체로 바라보는 태도다. 바꿔 말하자면, 내가 가진 기준과 틀을 잠시 내려놓고, 눈앞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선이다. 판단을 유예했을 때 비로소 들리는 이야기, 보이는 얼굴, 느껴지는 온도가 분명 존재한다는 걸 느꼈다. 나는 이제 사람에게 섣불리 해시태그를 붙이지 않는다. 대신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연습을, 조용히 계속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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