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 길거리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보면 이 많은 나뭇잎을 나무들이 달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수많은 잎을 통해 광합성 작용을 하며 자체적으로 생의 에너지를 만들어가며 열심히 성장하던 나무들이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떨구고 응축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수분이 다 빠져 낙엽이 된 잎사귀들임에도 두툼한 두께로 켜켜이 쌓여 있는 그 양을 보면 일년의 노고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된다. 때가 되면 최고의 아름다움을 단풍으로 토해낸 다음 미련없이 떨구는 자연의 섭리를 보면서 자꾸 인생을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미국은 자기집 정원의 낙엽을 모아 길 한켠에 쌓아 놓는다. 그 더미가 어마어마하다. 쌓아 놓은 낙엽은 연말에 몇 차례 거대한 송풍기를 단 트럭이 와서 수거해 간다. 나는 그것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모른다. 태워 없애는지, 아니면 미생물을 이용하여 거름으로 만드는지.
한국에서는 신도시 아파트에 오래 살았다. 그러니 낙엽이 두툼하게 쌓일 정도로 성장한 나무도 없었고, 낙엽이 지더라도 관리인 아저씨가 치우셨다. 아저씨가 화단에 떨어진 낙엽까지 치우진 않아서 그것이 거름이 되어 다음 해 나무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임을 알았다. 간혹 집 근처 산에 등산을 하다보면 산에 푹신하게 쌓인 낙엽이 썩어가며 거름이 되는 과정을 보았기 때문에 나무를 위해서라도 낙엽은 치우지 말고 그대로 둬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낙엽 한 잎까지 모두 수거해가는 미국의 풍경은 나에게 무척이나 생경했다.
어느날 친구이자 환경주의자 로럴에게 미국은 이 낙엽을 걷어가는 주체가 주정부인지, 아니면 개인 사업자인지, 그리고 걷어간 낙엽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물었다. 로럴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곤 나에게 한국은 낙엽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미국처럼 이렇게 낙엽을 모두 치우지는 않는다고 대답했다. 로럴은 대로변의 낙엽은 치워야하겠지만 왜 주택가의 낙엽들까지 싹싹 긁어가는지, 왜 낙엽이 겨울에 자연스레 썩어 거름으로 쓰이도록 놔두지 않는지 불만이라고 했다. 그녀와 동네 주민들 일부는 'Leave the Leaves for Wildlife'라는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작년에 그 피켓이 꽃힌 곳에 떨어진 낙엽 까지도 송풍차가 싹싹 긁어간 것을 보았다. 소수가 운동은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해온 그 일을 그치게 하는데는 역부족인 모양이다. 하긴 동네에 떨어진 낙엽 양이 워낙 어마어마해서 그냥 두기에도 분명 문제는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정원에 떨어진 약간의 낙엽 정도는 두어도 좋지 않을까.
나는 낙엽이 가진 자연의 순환성에도 관심이 있지만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낙엽에 관심이 많다. 낙엽이 자연스레 쌓여 만들어내는 색의 조화와 형태의 섞임을 보고 있으면 황홀하다. 내가 사는 동네의 단풍은 이제 절정기를 지나 완전히 잎을 떨군 나무들도 있고, 매달려 있는 잎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침 산책을 하다보면 발 아래 밟히는 바스락 소리와 낙엽향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거기에 더해 켜켜이 쌓인 다양한 수종의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형태와 색의 다양함에 흠뻑 빠진다. 같은 참나무라도 잎의 형태와 크기, 단풍색이 다르다. 거기에 더해 각종 나뭇잎이 섞여 만들어내는 자연스런 색의 어울림은 미술사의 어떤 뛰어난 화가의 색조합 보다 뛰어나다.
자연스레 20세기 초반 유럽을 휩쓴 다다운동이 떠오른다. 1차 세계 대전을 겪은 유럽인들이 인간의 이성이 가진 잔혹함에 치를 떨며 유럽의 전통을 형성해 온 이성만능주의를 부정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 일환으로 미술계에서 나온 운동 중의 하나가 자동주의와 우연성의 예술이다.
이제 이성으로 계산한 화폭, 능숙한 화가의 스킬로 진짜 보다 더 진짜처럼 그려내던 회화를 던져버리고 무의식으로 그리는 자동주의, 또 찢은 종이를 위에서 떨어뜨려 종이가 무작위로 떨어져 만들어 내는 우연의 미학과 같은, 이성이 개입되지 않은 미술운동을 펼쳤다.
나는 이때의 작품을 보면 그들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작품들이 다시 보고 싶을만큼 인상적이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성 만능주의에 강력히 반발하여 등장한 사조임에도 그 또한 무의식을 가장한 또 다른 이성주의의 발로이자 지극히 서양적인 미술사의 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가을의 낙엽이 만들어내는 형태와 색의 다양성을 보고 있으면 우연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지만 너무나 아름답다. 다다의 무의식과 우연성 작품과는 달리 하루라도 더 보고 싶을만큼 사라짐이 아쉽다. 거기에는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도 없고, 이것은 우연으로 떨어뜨린 것이라는 무의식을 가장한 이성도 없다. 그저 자연의 순환 법칙에 따라 자기 할 일을 다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 할 일이 끝나면 아무 미련없이 몸에서 탈락한 잎들이 (정말로) 우연히 서로 섞여 만들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나이가 드니 가을이 되어도, 또 낙엽을 보아도 더이상 외로움을 타거나 감성에 빠져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의 경이로움에 자꾸 감격하게 된다. 최후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한꺼번에 발산하고 미련없이 낙엽하는 나무의 생리를 보면 나도 죽을 때 미련없이 깨끗하게 잘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각각의 나무가 자기 생긴대로 살았어도 이렇게 화합하여 더 큰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서 나도 내가 타고난 색깔을 아낌없이 발산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자연의 순환에 따라 저절로, 그리고 자연과 자연이 자연스레 섞여 만들어내는 이 미학이 황홀하게 아름다워서 행복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