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희곡 다시 읽기
* 이 작품은 동국대학교 교수였던 김재남 교수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그는 1922년에 태어나 1946년 경성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김교수는 우리나라 최초로 1964년에 개인이 전체를 번역하여 ⟪셰익스피어 전집(전 5권)⟫을 출간하였다. 오래전 번역이지만 나는 김재남 교수의 번역이 마음에 들었다.
책 앞에 실린 작품 해설에 보면 십이야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다. 인용해 보면, “⟪십이야⟫는 1599~1600년에 제작되었다. 십이야란 크리스마스로 부터 12일 째인 1월 6일, 주현절 축제일 전날 밤을 뜻한다. 이 극은 1601년 십이야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탈리아 귀족 가문인 메디치 집안으로 부터 파견된 오시노 공작을 위한 향연의 여흥으로서 연극 무대에 올리기 위해 집필한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즐거운 날 공연할 것을 목표로 쓴 로맨틱 코미디로 청춘 남녀의 사랑의 화살이 제대로 향하지를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은 제자리를 잡아가는 스토리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여름 밤의 꿈⟫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십이야에는 환상적 요소는 등장하지 않고 현실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셰익스피어는 상황을 비유하는데 자주 그리스 신화를 가져다 쓰고 있다. 따라서 신화를 모르면 의미 파악이 힘들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엘리시움이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사람들이 가는 평화로운 낙원이다. 따라서 엘리시움에 갔다는 말은 죽었다는 의미이다. 그 외에 신화 속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작품 속 배경 역시 고대 그리스의 북서부에 있던 일리리아를 무대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읽다보니 두 쌍둥이 주인과 두 쌍둥이 하인이 자기의 주인을 헷갈리는 바람에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실수 연발(The Comedy of Errors)⟫ 과 동성애적 코드가 담긴 ⟪베니스의 상인⟫ 속 안토니오와 바사니오의 관계, 그리고 남장한 여인으로 나타나 안토니오를 구하는 포샤의 상황설정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단지 이 작품 ⟪십이야⟫에서는 실수 연발에서 남자 쌍둥이가 등장했던 것에 비해 남매 쌍둥이가 나온다는 점이 다르고, 선장인 안토니오가 쌍둥이 중 오빠인 세바스티안을 사랑하는 동성애 코드와, 쌍둥이 여동생인 비올라가 남장 여자로 나온다는 상황설정이 비슷하다.
줄거리
쌍동이 남매인 오빠 세바스티안과 여동생 비올라가 타고 있던 배가 좌초되어 일리리아 해변으로 떠내려 왔다. 선장이 구해주어 비올라는 구조가 되었으나 오빠는 익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비올라는 신분을 속이고 남장하여 이름을 세자리오로 속인 후 일리리아를 다스리는 공작 오시노 밑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당시 오시노 공작은 일리리아의 부유한 상속녀인 올리비아에게 청혼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오빠를 최근에 잃은 올리비아는 슬픔이 너무 커서 검은 상복을 입고 생활하며 결혼할 생각이 없다. 그녀는 오시노공작의 계속되는 청혼을 계속하여 퇴짜를 놓고 있다. 그럼에도 오시노는 계속 올리비아에게 청혼을 하는데, 그 심부름꾼으로 예쁘장하게 생긴 비올라를 보낸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심부름하러 오는 남장한 비올라에게 반해 오히려 그에게 마음을 두고 결혼을 꿈꾸고 있다. 잠깐 곁다리 이야기이지만 근대 유럽 귀족 사회에서는 귀족 남자가 청혼하러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람을 보낼 때 은제 장미를 들려서 보냈는데, 이 장미를 전달하는 시종을 ‘장미의 기사’라고 불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도 주인의 청혼 꽃을 전달하러 간 장미의 기사에게 아가씨가 반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비올라는 자기가 모시는 오시노 공작을 짝사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시노 공작의 사랑을 이뤄주려고 최선을 다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없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쫓는 세 남녀의 사랑의 행로를 보고 있자니 ‘그래, 사랑이란 그런 것이지!’ 하며 결론이 어떻게 날지 벌써 답이 뻔히 보였다.
이렇게 엇갈린 사랑이 해소가 되는 것은 비올라의 쌍둥이 오빠 세바스티안이 나타나면서이다. 세바스티안의 친구인 선장 안토니오는 세바스티안을 사랑하고 있다. ⟪베니스의 상인⟫ 속의 상인인 안토니오가 바사니오를 사랑했듯 ⟪십이야⟫의 선장 안토니오도 세바스티안을 대단히 사랑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두 사람이 일리리아에 나타나는데, 세바스티안이 우연히 올리비아의 집 앞을 지나다 올리비아가 세바스티안을 남장한 비올라로 착각하여 살갑게 대하고, 그에 세바스티안은 그녀에게 연정을 품는다. 몇 가지 작은 소동이 일어나고 나서야 세바스티안과 비올라가 만나 서로를 확인하게 되고, 모든 오해가 풀린다. 그리고 남장 비올라에 연정을 품었던 올리비아는 너무도 똑같이 생긴 세바스티안과 새로운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하고, 내내 올리비아에게 청혼을 하던 오시노 공작은 비올라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비올라와 결혼한다는 스토리이다.
작품 속 조연들
이 작품에는 이 세 사람의 사랑의 이야기 외에 올리비아 측 사람들, 즉 숙부와 숙부의 친구, 하녀 마리아와 집사, 가신, 광대가 엮어내는 양념과 같은 에피소드들도 아주 흥겹다. 특히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 올리비아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착각한 집사 맬볼리오가 집안 사람들에게 농락을 당하는 부분을 보면 맬볼리오가 짠하면서도 사랑을 통해 신분 상승을 노리던 당시 남성들의 판타지적 꿈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대는 셰익스피어의 어느 작품에서건 감초같은 역할을 하는데, 특히 신분 가리지 않고 입 바른 말을 하는 광대의 말을 듣고 있으면 광대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보인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광대가 여러 편의 시를 읊는데 우리말로 번역한 시도 좋지만 시 만큼은 영어 원서를 찾아서 압운을 살펴보며 읽어보았다.
시는 압운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보아야 제대로된 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한편을 소개하겠다. 2막 4장에 나오는 광대의 노래이다.
The Clown’s song.
Come away, come away, death.
And in sad cypress let me be laid.
Fly away, fly away, breath;
I am slain by a fair cruel maid.
My shroud of white, stuck all with yew,
O, prepare it!
My part of death no one so true
Did share it.
Not a flower, not a flower sweet,
On my black coffin let there be strown:
Not a friend, not a friend greet
My poor corpse where my bones shall be thrown:
A thousand thousand sighs to save,
Lay me, O, where
Sad true lover never find my grave,
To weep there.
인생의 환희에서 애수를 느낀다
나는 책 앞부분에 실린 <작품 해설>의 마지막 문구에 눈이 갔다. 김재남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인생 긍정, 인생 예찬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환희에 벅찬 나머지 도리어 애수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향후 본격적으로 비극과 씨름하게 되는 작가의 낭만 희극과의 피날레를 뜻한다.”라고 묘사한 부분이다.
네 남녀의 사랑이 아름답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지나치게 상투적이란 생각을 나도 했다. 17세기 후반에 태어나 18세기 초까지 활약하던 로코코 양식의 페트갈랑트(전원이나 공원에서 화려한 복장으로 노니는 귀족들을 그린 그림) 스타일의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라 할 앙투안 바토의 그림이 연상되었다. 그는 귀족들의 화려하고 나른한 쾌락을 아름답게 그렸지만 전문가들은 그의 그림에는 왠지 모를 애잔함과 허무가 느껴진다고 평하고 있다. 세상 걱정 없어 보이는 귀족들의 여유로움과 사랑의 유희를 화려하게 그린 그림 속에는 그럼에도 삶의 허무와 함께 그림 속에 박제된 듯 전혀 생명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십이야의 행복한 결말이 나에겐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와토도 고대 그리스의 키테라 섬을 배경으로 하여 귀족들의 사랑의 서정을 그렸다. 키테라 섬은 아프로디테 여신이 태어난 섬이다. (신화에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출생지로 두 지역이 나온다. 하나가 키테라 섬이고, 다른 하나가 키프로스 섬이다.)
사진출처 : en.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