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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코로나 시대의 여행

by 우 재

나는 여행 매니아는 아니다. 여행 기회가 주어지면 마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하지 못해 우울증에 빠지거나 여행자들이 부럽거나 하진 않는다. 내 인생을 되돌아 보아도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거나, 친척이나 친구를 만나러 가는 숙박장소가 정해진 곳으로의 여행은 종종 했었지만 자발적으로 낯선 곳으로 장거리 여행을 해 본 적은 딱 한번 밖에 없었다.


2006년 팩키지 상품으로 15박 16일간 서유럽을 여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팩키지 여행의 인스턴트식의, 유명지 점찍기식의 여행에 대해 부정적인 평들을 하지만, 나에겐 이 여행방식이야말로 나를 위해 최적화된 상품이라고 생각했다. 싱글 여성을 위한 - 당시에 나는 싱글이었다 - 여행상품으로 그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더러 평소 체력이 강한 편이 아니다 보니 장거리와 장시간 여행은 힘에 부쳤다. 그러니 시간 맞춰 버스가 와서 다음 여행지로 데려다 주고, 무거운 것 들고 다닐 일도 없는 이런 여행이야말로 나를 위한 여행이라 여겼다. 유명 관광지에 도착해서도 중요 장소 몇 곳을 가이드와 둘러 보고, 약간의 자유시간에 도보로 주변을 둘러보고 나면 다시 다음 여행지로 버스가 옮겨다 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팩키지 여행에서 즐긴 나만의 여행 방식이 있었다. 같이 여행하던 사람들을 보니 관광지 구경이 끝나고 버스로 돌아오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내내 잠을 잤다. 때론 10여시간이 넘도록 버스로 이동을 했는데, 나도 피곤할 때는 잠시 잠을 자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깨어 나라별 풍광과 특성을 눈여겨 보았다. 버스가 지나가는 곳곳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는 그들을 깨워 바깥 좀 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직접 골목 골목을 걸어다니며 하는 여행이야말로 사람살이를 보고 체험하는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팩키지 여행은 장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각 나라별 특성을 거시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영국에서 프랑스로 테제베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널 때, 이탈리아의 북부에서 남부로 이동할 때, 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갈 때, 독일 라인강가를 달릴 때... 등 각 나라별 지형과 자연이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며 나라별 특징을 비교해 보는 것이 유명 관광지 구경 못지않게 즐거웠다. 어딜 가도 관광객으로 와글거리는 장소가 아닌 사람들이 잠들어 조용해진 버스 안에서 해거름의 고즈넉한 주변 풍광도 보고, 웅장한 산들도 보면서 자연의 다양한 모습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모른다.


이런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나는 이후로도 촌각을 아껴가며 몸을 많이 움직이는 여행보다는 호텔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여행자가 되었다. 여러 장소 보다는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여행이 더 좋았고, 볼 장소가 많아도 다 보려고 하기 보다는 몇 군데 장소만 여유롭게 보는 것이 더 좋았다. 때론 힘에 부쳐 여행하는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일단 돌아오면 모든 것이 좋은 추억이라 여행 기회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코로나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에 코로나가 선포된 것은 2020년 3월이었다. 평소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라 코로나로 활동영역이 많이 제한되었음에도 별로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년 반 가량 여행을 하지 못하는 것도 전혀 나에겐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장시간 아무데도 못가고 지내다 보니 일상이 지루해졌다. 꼭 먼 곳이 아니더라도 잠깐의 일탈이 있었으면 싶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보면서 나에게 있어 여행이란 무언가 색다른 것을 보고 체험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환기를 위해 필요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던 중 마침내 짧은 여행의 기회가 왔다.


미국은 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면서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마침 남편의 동료교수가 몸담고 있는 콜럼버스 심포니가 공개연주회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비록 윈드 악기와 소수의 현악기 만으로 구성된 제한된 편성의 연주회지만 비대면이 아닌 공개 콘서트를 한다고 하니 이보다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과 두시간 거리의 콜럼버스(오하이오주의 주도)에 다녀왔다.


20210623_135513.jpg 콜럼버스 다운타운. 오른쪽의 파란색 빌딩이 남편과 내가 머물렀던 호텔




우리의 여행 목적은 콘서트 참석이었지만 그것을 핑계로 낯선 장소에서 2박 3일을 보내며 마음을 환기하고 싶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호텔에서 낮잠자고 TV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식사 때가 되면 나가 식사 하고 주변을 잠시 둘러보는 방식의 여행이었지만 무엇보다 만족스럽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20210623_153152.jpg 요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동 킥보드. QR 코드로 약간의 비용을 결제하면 어디든 타고 갈 수 있다.




나에게 여행이란 특별한 것을 보고 체험하기 보다는 일상을 리셋한다는데 더 의미가 있다. 내 일상의 루틴이 습관이 되어 변화가 필요할 때 결심만으로 쉽게 변화가 되진 않는다. 그럴 때 여행은 일상의 습관을 자연스레 끊어주고 구습을 매듭짓게 해준다. 그러고 나면 자연스레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동안 늘어져 있던 내 마음상태가 다시 조율이 된 듯하다.


20210624_125503.jpg 콜럼버스 다운타운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여전히 조심스러운 상황이지만 코로나 시대에도 여행은 필요하다. 코로나 블루에 걸린 사람도, 또는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사람도 짧은 여행을 통해서 마음을 쇄신할 수 있지 않을까. 반 나절이나 한 나절 정도의 옆 도시로의 드라이브라도 좋을 듯하다. 아니, 이미 다른 사람들은 다 하고 있는 것을 나만 이제 해보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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