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에 대한 이해
코비드 시기가 부정적인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닌 듯 하다. 활동반경이 줄어드는 대신 주변을 자세히 보게된다. 그리고 마침내 식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에 있어 들러리라고만 생각하던 식물이 사실은 지구의 주인이라는 것이 서서히 인지되기 시작했다.
지구에 식물이 출현한 것은 35억년전으로 추측한다. 지구가 생겨난 것이 대략 45억년 전이라 하고, 지각이 생성된 것은 35억년 전, 그리고 이 시기의 퇴적암 속에서 식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때 부터 지금까지 장구한 세월동안 식물은 진화를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진 식물에 비해 인류가 지상에 출현한 것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700만년 전쯤으로 추측한다. 인류가 출현하기 전 지구의 주인은 식물이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거창하게 세월까지 들먹이며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인류보다 훨씬 오랫동안 지구 상에 존재해 온 식물에 대해서 내가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침 산책길에 예쁘게 피어있는 남의 집 정원의 꽃들을 보면서 '참 예쁘다!'하고 감탄은 하면서도 정작 나무 이름, 꽃 이름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진정 "식물맹"이었다. 이탈리아의 식물학자 레나토 브루니가 그의 책 ⟪식물학자의 정원 산책⟫에서 사용하는 이 용어는 "식물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식물을 인간이나 동물에 비해 무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나는 식물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무의식적 사고 속에는 항상 인간과 동물이 선순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마다 동네를 산책하며 매일 아름다운 꽃들, 형태가 수려한 나무들을 보게되니 점점 내가 보는 나무와 꽃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어느날 퍼뜩 DAUM의 꽃검색 앱이 생각이 났다. 그 이후로 이름을 모르는 꽃들을 보면 앱을 이용해서 이름을 확인한다. 아쉽다면 꽃을 피우지 않는 식물과 나무들의 이름은 여전히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식물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가면서 식물에 관련한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요즘 한창 예쁘게 피고 있는 수국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즘 내가 사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애크론에는 수국이 한창이다. 비단 우리 도시에만 수국이 한창일까? 세계 많은 나라에서 수국이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색이 얼마나 오묘하게 아름다운지 산책하며 자주 발길을 멈추고 남의 정원에 곱게 핀 수국들을 사진으로 촬영한다. 책 내용만으로는 궁금증이 모두 해소되지 않아 인터넷으로 여러 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다.
꽃덩어리가 큰 수국 품종은 일본에서 개발된 것이란다. 나는 꽃이라고 알고 있던 수국이 사실은 꽃이 아니라 꽃받침(포엽)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것임도 알았다. 꽃이 아니기 때문에 암술과 수술이 수정하여 씨를 맺는 일반 꽃들과 달리 씨를 맺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산수국처럼 씨를 맺는 수국도 있다. 산수국은 주변으로 꽃잎처럼 보이는 포엽을 피우지만 진짜 꽃은 포엽으로 둘러싸인 안쪽에 작은 꽃봉오리들이 옹기종기 맺히고 그 봉오리들이 꽃을 피운다. 하도 작아 사진으로 촬영하여 확대하여야만 보일 정도로 꽃이 작아서 평소 자주 보면서도 나는 이 꽃이 수국종류임을 몰랐다.
수국은 흰 수국도 있지만 하나 안에 다양한 빛을 띄는 수국도 있다. 알록달록한 색을 한 그루 안에 피우는 수국의 경우 꽃(사실은 포엽)이 피는 초기에는 연한 녹색빛이던 것이 청색 빛으로 바뀌었다 분홍빛으로 바뀐다.토양이 산성이면 수국이 청색빛을 더 많이 띠고, 토양이 알칼리성이면 분홍빛을 더 많이 띈다고 한다. 그만큼 수국은 뿌리를 내린 토양의 산성도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꽃색을 통해 토양의 상태까지도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수국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자 나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가 떠올랐다. 우선 시의 전문을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나, 너, 우리로 범위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인식의 확장을 읽어내는 사람도 있고, 대상(사물)을 언어를 통해야만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론적 세계관을 읊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수긍하면서도 나는 이 시를 읽으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시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불편하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이지만 그러나 언어로 표현 가능한 세계는 어마어마한 우주와 자연의 크기에 비하면 극히 작은 세계일 뿐이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던 말던 그는 이미 나보다 훨씬 긴 시간을 매일 조금씩 자기를 성숙, 진화시키면서 그 스스로 존재해 왔다. 내가 그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는 내가 보던 말던 이미 그 스스로 존재했다. 그는 내내 나를 보고 있었겠지만 내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느 날 내가 그를 보고 마침내 그의 이름으로 불러 주었을 때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나의 부름에 별 관심 없다. 이름이란 인간중심적 사고로 세상을 보며 대상을 카테고리별로 묶고 분류하여 붙인 것이지, 뭐라고 불리고 싶냐고 대상(식물)에게 물어본 적도 없다. 의미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인간, 즉 나 자신일 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바람에 수난을 겪는 식물들이 더 많다. 어머어마한 세월을 스스로 자연에 적응하며 진화하여 지금에 이른 식물들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실험실에서 DNA 조작을 당하고, 또 식물의 생태적 특성과 상관없이 인간의 미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함부로 다루어지고 있다.
진정 식물들과 자신에게 서로 의미가 되고 싶다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하나의 몸짓을 먼저 이해했어야 한다. 이름 떼고 다른 종이라는 분류표도 떼고 겸허한 마음으로 온전히 상대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서로에게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수국에 대해서 잘 모를 때도 나는 수국이 경이로웠고, 수국에 대해서 공부를 하여 조금 알게된 지금도 수국은 여전히 경이롭다. 내가 수국의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해서 수국도 나를 불러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시인은 누가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도 좋지만 수국은 수국이면 되고 나는 나이면 된다. 내가 수국을 불렀다고 나에게 와서 특별한 꽃이 될 필요도 없고,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해서 내가 그의 특별한 무엇인가 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어 마침내 서로에게 무엇인가 되기 이전에 서로의 몸짓, 눈짓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수국 뿐 아니라 매 계절 피어나는 꽃, 나무 등 식물의 작은 몸짓 하나라도 마음을 다해 바라보고 존중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