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의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허리대에 대한 나의 해석
유튜브의 국립중앙박물관 채널을 구독한다. 한국에 살 때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전시를 보러도 다녔지만 박물관대학의 강의를 수강하기 위해서 자주 다니던 곳이다. 한국의 박물관이 그립던 차에 유튜브에 속속 박물관, 미술관의 채널들이 생겨나며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지만 한국의 박물관뿐 아니라 전 세계의 박물관, 미술관의 전시 소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배기동 관장님이 소개하는 신라시대 황남대총에서 나온 금관과 허리대에 대해 해설 영상을 보던 중 배관장님이 해설 말미에 "자기 생각으로 학설을 만들어 보라"는 말씀을 듣고 이 미션을 수행해 보고 싶었다. 우선 배기동 관장의 설명을 먼저 요약정리해 보자면 이러하다.
“금관에는 출자형 장식 3개와 사슴뿔 모양으로 삐죽삐죽 나온 부분이 있고 많은 곡옥과 동그란 “영락”, 또는 "달개”라고 불리는 것이 달려있다. 관 아래쪽으로는 금 수식이 달려있다. 허리띠 부분 앞 바클 달린 부분 옆으로 드리개가 달려 있다. 주머니나 가방이 없었기에 허리띠에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달고 다녔다. 시베리아 샤먼도 똑같이 한다. 금으로 장식을 했지만 과거 샤먼의 경우 숫돌 등 생활 속 필요 도구를 달고 다니던 모습과 같다. 그런 전통이 허리대 장식으로 남아 있다.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 불렸다. 신라 금관 자체는 고신라 적석목관분에서 나왔는데, 대개 5~6세기 전반경의 고분으로 생각된다. 현재까지 6점이 나왔는데, 전부 왕이 쓴 것 같지는 않다. 황남대총 북분뿐 아니라 다른 고분에서도 여성이 금관을 쓰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학설에 따르면 금관은 꼭 왕만이 쓴 것 같지는 않다. 왕은 다른 왕관을 썼을지도 모른다. 이 관은 장송용 관이었을 것이다... 등등 어떤 용도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왕의 존엄성, 장엄함을 나타내는 것은 확실하다. 아마 이런 관을 평소에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자기 생각으로 학설을 만들어 보라. 고신라의 황금관과 장신구는 신라 문화를 대변하며 한국 고대문화의 상징 유물로서 문화적 기원을 말해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런 형태의 금관은 한국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가장 전형적인 것인데, 많은 샤먼적 요소를 생각하면 고대 시베리아 문화와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고, 그런 연원에서 신라 문화의 기반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문화유산이다. "
이 금관에 대한 해설을 듣고 나서 나는 배관장의 말씀대로 나만의 학설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나는 신화에 관심이 많아 오랫동안 신화를 공부했고, 최근 몇 년간 유라시아 대륙의 선사시대의 여신 숭배 문화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다. 나는 이 여신 숭배 문화에서 사용하던 상징체계들이 우리의 금관과 허리대에 그대로 적용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몹시 흥미로웠다.
우선 이 출토품이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을 잊지 말자. 황남대총은 남쪽과 북쪽의 두 개의 무덤이 맞붙어 있는 형태의 고분인데, 금관과 허리대는 북쪽 여왕의 무덤에서 나온 출토품이다. 무덤의 부장품이었다는 의미는 무덤 속의 망자가 다시 생명력을 얻어 재탄생하기를 염원하는 상징적 장식품들이었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배관장은 금관을 “왕만 쓴 것이 아니라 여자도 썼던 것 같다.”라고 말하는데, 이 무덤이 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면 왜 왕비가 관을 쓰면 안되는 것일까? 고대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 남녀에 대한 차별이 별로 없었다. 물론 유학이 유입되며 여성의 사회생활 참여도에 있어서 한계는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은 별로 없었다. 삼국유사를 통해서 살펴보아도 여성의 삶이 대단히 자유로운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성생활도 자유로웠다. 탑돌이 하다 눈이 맞으면 자연스레 동침을 할 만큼 여성의 삶이 자유로웠던 사회였다. 통일 신라시대에 가서는 여왕도 두 명 나왔다. 신라시대에는 이미 불교가 사회 깊숙이 자리를 하고 있었지만 여성의 지위도 낮지 않았던 것을 고려한다면, 게다가 여왕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여성이라고 관을 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고고학을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 바로 현대의 관점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다. 특히 가부장제에 기반하여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크게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이 금관과 허리띠가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의외로 이 장식품의 의미는 쉽게 이해가 된다. 특히나 왕이 아닌 여왕의 무덤에서 왕관과 허리대가 출토 되었다는 것은 여성이 가진 신화적 상징성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미 삼국시대는 가부장제에 토대를 둔 정치체계로 바뀌었지만 고대의 여신 숭배 문화와 여신의 상징성은 삶 속에 지속되었을 것이다. 특히 고대의 여신은 생명을 창조하며 풍요를 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재탄생으로 이끄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금관과 허리대를 무덤 속의 왕이 착용하고 있던, 여왕이 착용하고 있던, 그것을 착용하고 있는 망자의 성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신구가 가진 상징성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장신구는 무덤 속의 망자가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기를 기원하는 염원을 내포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선 금관의 형태를 보자. 배기동 관장은 출(出) 자 형태가 3줄 나타난다고 했는데, 나는 이것을 출자라기보다는 뫼산(山) 자가 중첩된 형태로 보고 싶다. 뫼산자가 중첩되어 3줄 나타나고 그 사이사이에 사슴뿔 같은 것이 솟아 있고 중간중간에 곡옥과 둥근형태의 금(영락)이 무수히 달려있다. 금관 아래쪽으로는 둥그런 고리 아래로 드리개가 줄줄이 달려 있는데, 이 드리개에도 영락이 줄줄이 매달려 있다. 이 모든 장신구의 상징체계가 선사시대 여신을 숭배하던 문화에서 여신의 생명성을 상징하던 기호들이다.
우선 뫼산자 처럼 생긴 기호는 그야말로 산(山)을 상징한다. 높은 산은 여성의 생명력이 왕성하게 깃든 장소로 신성시되었다. 선사시대의 여신 숭배 문화에서 나온 출토물에 이런 상징물이 흔히 목격된다. 山산 형태의 기둥을 세운 신전 옆 산 정상에 여신이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그림이다. 또 여신이 생명을 낳을 때 양손을 들어 올리고 있어서 그 모습이 산(山) 자로 상징적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터키의 차탈 휘위크의 유적 중 한 방에 그려진 山 형태의 상징물은 영락없이 금관 속의 山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 금관의 山이 3중으로 겹친 것도 유념해야 한다. 3은 바로 여신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3명이 세트로 등장하는 여신들도 있다. 모이라이 삼여신, 미의 삼여신, 운명의 삼여신 등등...
사슴뿔은 가을이면 떨어져 나가고 봄이 되면 새롭게 솟아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슴뿔은 선사시대부터 봄과 재생을 상징하는 상징물이었다. 곡옥은 그야말로 식물의 씨앗이자 인간의 배아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만큼 생생한 생명력의 상징이 있을까? 금관 옆으로 줄줄이 달린 영락 역시 씨앗이나 물방울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 영락이 줄로 연결되어 늘어져 있는 모습은 바로 생명의 원천인 물이 흘러내림을 상징한다. 곧 생명의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선사시대의 여신 그림에 여신의 눈에서 줄줄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 또 허리 아래로 줄줄이 물이 흘러내리는 그림 등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허리대의 의미는 무엇일까? 선사시대의 여신 숭배 문화에서 여신의 몸은 그 자체가 생명의 원천이었다. 선사시대의 유물 중 허리에 술(여러 가닥의 실)이 줄줄이 달린 넓은 허리대를 착용하고 있는 여신상이 흔히 발굴되었는데, 이 허리대는 바로 물의 흐름을 상징한다. 허리대는 바로 여신의 생명의 원천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신성한 의상인 것이다. 실제로 의자에 앉아 있는 여신의 허리 아래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을 새겨 넣은 조각들이 남아 있고, 또 허리대(hip-belt)를 착용한 여신상 유물도 남아 있다. 여신의 자궁에는 생명의 물이 자리하고 있다. 생명을 창조하는 물을 강조하기 위해 이 자궁 속에 물고기를 그려 넣은 그림도 있다.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물은 여신을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성 중 하나였다.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물은 끊임없이 넘쳐흐른다. 이 물의 흐름은 지그재그 형태나 직선의 형태로 표현이 되는데, 황남대총의 허리대처럼 드리개가 달린 허리대뿐 아니라 주름치마를 입은 여신을 통해서도 물의 흐름을 상징화하기도 한다. 크레타의 뱀을 양손에 든 여신의 경우는 7단으로 된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7이라는 숫자는 시간의 한 사이클을 상징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선사시대의 여신에 대한 묘사에서 뿐만 아니라 고대의 중요 직책에 있던 여사제들은 긴 주름치마를 입었다. 우리의 고구려 시대의 벽화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의상을 보아도 긴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주름은 바로 물의 상징성으로서 여성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황남대총의 허리대에는 생명력과 에너지를 상징하는 다양한 장신구를 드리개의 형태로 내려뜨려 달아 놓았다. 황남대총의 황금 허리대에는 곡옥, 물고기, 사다리꼴 모양(나비의 변형된 형상일 것), 술, 지팡이, 알 형태의 둥그런 장신구 등이 매달려 있다. 하나하나의 드리개가 생명력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드리개에 매달린 장신구들 역시 모두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상징물들이다. 도끼 형태의 마름모 형태의 장신구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배관장께서는 시베리아 샤먼의 숫돌과 결부시켰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선사시대에 등장하는 양날 도끼 형태의 도상은 바로 나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자 영혼의 재탄생을 의미하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물이다. 지팡이 역시 새로운 싹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형태이자 한 집단을 이끄는 대표만이 들 수 있었던 생명력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타원형의 알 모양의 장신구는 그야말로 생명의 씨앗이 아닌가.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허리대에는 고대의 여신이 상징하던 생명성과 재창조에 필요한 에너지를 강조하는 상징물들이 빼곡히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상징물들은 모두 무덤 속 망자를 재탄생으로 인도하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반원형의 둥그런 무덤은 임산부의 배의 형태를 하고 있다. 무덤은 죽은 자가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되어 재탄생을 기다리는 장소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무덤의 형태뿐 아니라 무덤 속에서 출토된 금관과 허리대에 무덤 속의 주인공이 다시 생생한 생명력을 얻어 다시 재탄생하라는 상징체계가 가득 들어있는 것이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비교적 늦게까지 여신 숭배가 지속되었던 곳이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여신 숭배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가부장제 문화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문화의 기원과 상징성 역시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배기동 관장님은 이 금관과 허리대가 시베리아의 샤먼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단지 시베리아가 아니라 전 유라시아 대륙에서 지속되었던 여신 숭배 문화의 전통이 시베리아를 거쳐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지 않나 싶다. 그리고 시베리아 샤먼들이 주머니가 없어 그것을 허리에 줄줄이 달고 다니던 것이 허리대에 반영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좀 무리수가 있는 해석이라 생각한다. 주머니가 없어서가 아니라 허리대 그 자체가 생명력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착용했던 것이다.
배기동 관장님의 문화재 해설을 들으며 관장님이 개인적으로도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셔서 숙제하는 마음으로 내 생각을 적어보았다. 참고로 여신 숭배에 대한 상징체계는 마리아 김부타스의 ⟪여신의 언어⟫ 및 그녀의 여러 저작을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