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인들의 운전 시간을 보며...
남편이 시댁 가족과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자동차로 캐나다로 가고 있는 중이다. 삼일 전 집에서 출발했지만 아직 국경을 넘지 못했다. 오늘 오후가 되어야 국경을 넘어 캐나다의 고향에 도착할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나는 "시간"과 "크기"에 대한 내 관념을 다시 정립해야 했다. 또 "가깝다"와 "멀다"도 내가 생각하는 거리감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단위 자체가 내가 알고 살아온 단위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는 이런 단위의 차이를 자동차 운전 거리와 시간을 보면서 극명히 느낀다.
우리는 저마다 단위에 대한 대략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 높다/낮다, 크다/작다, 많다/적다, 넓다/좁다, 멀다/가깝다 등 다양한 비교를 하며 살아가지만 문화마다 이 기준을 가르는 대략의 기준단위가 있다. 한때 180cm가 넘지 않으면 루저라고 했다가 많은 사람의 뭇매를 맞고 방송에서 사라진 외국 여성이 있었다. 그 여성에게 180cm는 큰 키라는 기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키의 남자도 더 큰 사람과 나란히 서면 작은 키가 된다. 작은 사람도 더 작은 사람 옆에서는 큰 사람이 된다.
단위는 이와 같이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개념에 대해서 자꾸 절대적으로 생각하며 집착한다. 부처님께서 내내 "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자유로워진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절대적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집착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문화에서 살며 형성된 다양한 단위의 기준은 미국에 와 살면서 번번이 깨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남편과 나는 여름 방학이면 우리가 사는 도시를 떠난다. 미국 대학교의 여름방학은 3달반 가량이다. 대신 겨울방학은 한달 남짓으로 짧아서 여름, 겨울 방학 기간을 모두 합하면 한국의 방학기간과 얼추 비슷하다. 음대 교수인 남편은 학기중에는 학생들 가르치느라 바쁘기 때문에 연주회 여행 이외에는 사는 곳을 거의 떠나지 않는다. 대신 여름 방학이 되면 한국, 중국, 캐나다로 다니며 연주회도 갖고 가족들과 시간도 보내며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이 되며 2년을 연달아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지냈다. 작년에는 코로나 상황이 심각했던 때라 우리도 꼼짝않고 집에만 있었다. 바로 옆나라임에도 미국에서 캐나다로 넘어갈 수 없었다. 캐나다 내에서도 한 주(Province)에서 다른 주로 넘어갈 때 2주간 격리기간을 거쳐야할 만큼 캐나다 내의 코로나 통제도 강력했다. 그러나 일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 상황이 2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다행히 발빠르게 백신을 개발한 미국에서 올해 들어 백신접종이 이루어지며 작년 보다는 상황이 좋아졌다. 캐나다에서도 접종률이 높아가며 캐나다 내의 통제 상황도 완화되어 타주로도 이동할 수 있고, 또 제한적이나마 미국과 캐나다간의 국경도 열렸다.
지금은 백신을 접종한 캐나다인에 한해 캐나다로의 입국이 허용될 뿐더러 2주간의 격리기간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단, 입국하기전 3일 이내 코로나 테스트를 하여 음성판정을 받은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고 어디에 머물 것인지 거주지 주소까지 정확하게 밝혀야 입국이 허락된다.
상황이 완화되다 보니 올해 시댁 가족들은 예전처럼 시댁 별장에 모여 휴가를 같이 보내기로 했다. 시댁 가족들은 매년 여름이면 시댁의 오래된 별장에 모여 2주간 휴가를 같이 보낸다. 작년에는 미국도 캐나다도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았던 때라 여름 모임이 무산되었다. 국경이 차단되어 미국에서 캐나다로 넘어갈 수 없었을 뿐더러 캐나다에 사는 가족들도 별장이 있는 주로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별장에서의 여름 휴가를 걸렀다며 몹시 아쉬워했었다. 다행히 올해는 국경도 열렸고 캐나다의 가족들도 백신 접종을 모두 하였을 뿐더러 타주로도 이동할 수 있어 별장에서 모이기로 했다. 그러나 국경이 열렸어도 외국인인 나는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가족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들은 남편은 몹시 가고 싶어했지만 내가 국경을 넘을 수 없다보니 남편도 가족 모임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이 내내 갑갑해 하는 모습이 안스러워 혼자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완강하던 남편도 나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니 갔다 오라고 몇 번 설득을 하자 그럼 갔다 오겠다며 국경을 넘을 서류를 하나씩 준비했다.
서류 준비를 하며 비행기 표를 알아보던 남편이 비행기 값이 너무 비쌀 뿐더러 두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고, 하물며 공항에서 많은 시간을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히려 우려스럽다며 자동차로 가겠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구글맵을 보며 운전시간을 확인했다. 교통정체 없이 최단거리로 달렸을 경우 17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남편의 나이도 있고 걱정이 되어 그냥 비행기로 가라고 했지만 운전하여 가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하여 가는 중간 중간 쉬어가며 삼일 동안 운전을 하기로 하고 남편은 출발했다. 첫날은 9시간 반을 운전한 후 메사추세츠주의 한 호텔에서 일박을 했고, 이튿날은 8시간 가량 운전을 한 후 메인 주의 한 호텔에서 숙박을 했다. 이미 지도에서 검색했던 시간을 오버했다. 오늘 국경을 넘어 약 4시간 가량 운전하면 마침내 고향의 별장에 도착할 것이다.
중학생 시절 언젠가 친구들과 나중에 커서 어디에서 살고 싶냐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큰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한국은 너무 작다고 느껴졌고, 나는 내가 너무 폐쇄된 곳에 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국어책이나 소설책을 읽다보면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찬탄하는 내용이 많았다. 한국은 금수강산으로 산수가 아름다워서 중국의 사신들이 와서 한국의 산세에 감탄했다는 둥, 한국의 자연이 뛰어나고 물도 맑아서 사람 살기에 대단히 좋은 곳이라는 둥, 한국에 대한 찬탄어린 내용을 읽을 때면 나는 그냥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해외 여행을 할 수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하물며 국내 여행도 많이 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수 있는 안목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 유럽여행도 해보고, 북미지역과 중국을 다녀보고 나서야 그들이 말하던 한국의 아름다움과 살기 좋은 땅이라는 찬탄을 여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땅이 좁다고 나쁜 것만도 아니고, 땅이 넓다고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쨌든 그런 마음의 바램이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미국, 캐나다를 오가며 살고 있고, 남편 연주회를 따라 중국에도 자주 다녔다.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라는 러시아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넓은 나라에 살면서 나는 한국 사회에서 경험했던 집약적인 삶의 방식을 벗어나야 했고, 나의 기존의 사고관을 벗어야 했다.
한국에서는 집 밖에만 나가면 바로 온갖 브랜드의 커피숖과 음식점, 은행, 마켓이 즐비하여 단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결하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미국에서는 파 한단을 사려고 해도 차를 타고 나가야 하고, 커피 한잔을 사마시려고 해도 차를 타고 나가야 했다. 다행히 내가 사는 동네에 커피 숖이 있어 걸어갈 수 있고, 유기농 식료품을 파는 쇼핑몰이 몇 년 전 집 근처에 문을 열어 걸어가서 사 올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나의 삶의 방식은 미국에서는 드문 경우이다.
이런 삶이고 보니 이곳 사람들에게 차는 생활 필수품이다. 넓은 지역에 살아서 그런지 운전 거리와 운전 시간에 대한 개념도 우리와는 다르다.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운전하여 간다 하더라도 6시간 정도면 갔다. 내 고향 진주까지는 6시간 반 정도 걸렸다. 고속도로가 잘 닦여지며 운전 시간은 점점 줄어 들었다. 지금은 휴게소에 들러 쉬엄쉬엄 가더라도 6시간 정도면 진주에 넉넉히 도착한다. 한국 내에서 가장 긴 거리인 강원도의 동북쪽 끝에서 전라남도의 서남쪽 끝까지 대각선으로 달린다 해도 아마 10시간 이내면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어디든 하루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 북미 대륙에서는 한 귀퉁이에서 다른 한 귀퉁이로 움직이는 데도 20여 시간이 걸린다. 하루 안에 절대 운전해 갈 수 없는 거리이다. 일상에서도 8~9시간의 운전거리는 별 것아니라고 생각한다. 가까운 데 산다고 해서 어느 동네냐고 물어보면 자동차로 3시간 거리란다. 이 정도이면 여기서는 옆 동네 취급이다. 땡스기빙데이나 크리스마스에는 내가 사는 미국 동북부의 오하이오주에서 중남부나 동남부 지역인 텍사스주나 조지아주 번호판을 단 자동차들도 종종 본다. 자동차 번호판을 보면서 명절을 맞아 장거리를 달려 가족을 만나러 온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남편과 같이 가지 못해 아쉬운 한편 오랜만에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니 이것도 좋다. 집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유투브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머리 한쪽에는 지금 남편이 어디쯤 달리고 있을지 짚어본다.
장시간 운전에 피곤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숙소에 들어 전화하는 남편의 목소리는 아주 청량하고 가벼웠다. 오늘 오후면 남편은 국경을 넘어 별장에 도착하여 가족과 상봉할 것이다. 마음이 즐거우면 수십 시간의 운전인들 문제이랴! 몸은 가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마음은 출발하기 전에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축지법은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길다 짧다, 멀다 가깝다 등 일상에서 하는 다양한 판단은 물리적인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의 크기와 절실함의 크기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