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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Apr 13. 2018

아홉.
요즈음 제 브러쉬엔 '털'이 없어요

가장 빠른 건 상상력, 그 다음이 도구, 마지막이 정의내리기 인걸. 

글자의 그래픽화 방식, 스타일 등에 따라 글자와 글자를 둘러싼 표현 방식의 진화만큼이나 나를 놀래게 한 또 다른 친구가 있다. 일명 '브러쉬'. 

'브러쉬' 하면 보통 '붓' 이나 '솔'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주로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초, 중, 고를 나온 나에게 붓하면 가장 떠오르는 건 수채화 붓, 페인트 붓. 화장을 시작하고서 주로 쓰던건 섀도우 붓이나 볼터치 붓 정도. 어린시절의 기억엔 구둣솔이 있고 화장실엔 칫솔이나 청소용 솔이 있다. 비그래픽의 현실에서 '브러쉬'란 보통 '털'로 되어 있다. 용도와 쓰임에 관계없이 인공모이든 자연모이든 그건 대부분 '털'이었다. 


그림용 붓들과 화장용 붓_Max Pixel

요즈음 내 브러쉬엔 '털'이 없다. 수명과 크기가 무한대이고 재생능력도 제한이 없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색표현과 농도조절이 가능하다. 그런데 물은 필요가 없다. 

포토샵을 좀 다루시는 분들에게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다. 하지만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색을 칠한다는 것을 보통 '물감을 털으로된  붓으로 밀어 물방욱 자욱의 동그란 모양을 번지게 하여 색을 입히는 것'으로 생각하던 나는 촌스럽게도 엄청 놀랬다. '디지털 드로잉' 배우면서 브러쉬를 활용한 정도도 단지 필압으로 인한 굵기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주기 위한 용도가 다였다.  스케치 할때만 브러쉬를 썼으니 뭐, 매번 동그란붓만 썼달까? 현실 붓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동그란 붓, 옆으로 넓게 퍼진 네모난 붓, 물기가 덜 한것 같은 갈라지는 붓, 먹물을 담뿍 담은 서예붓 같은 붓 그리고 딱 한 번 써본 적 있는 하트 모양의 붓. 이런 붓들로는 그리놀라지 않았다. 


그림이 빨리 늘지 않아 지루해진 김에 지난 화에 올렸던 부서지는 효과를 연습하다가 영상에서 브러쉬, 브러쉬하길래 검색해봤다. 도대체 브러쉬가 뭐길래. 그리고 그길로 약 6시간을 브러쉬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성실하게 열심히 뒤지다보니 '세상에 이런 브러쉬가!!' 싶은 친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브러쉬 그 자체가 팅커벨 모양이라니!! 벼락모양도 다 다르게 수십여가지나 있다!! 나에게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https://youtu.be/llZys3xg6sU


도구와 환경이 진화를 계속하는 만큼  인식도 계속 변화할 필요가 있다. 지난 ipad pro는 광고의 끝에 충격적인 질문을 던져줬다. 

 "컴퓨터가 뭔데요?"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을 가볍게 다루는 이 꼬마친구는 '컴퓨터'가 뭔지도 몰랐다. ipad pro의 외형은 휴대하기 편하고 작은 랩탑처럼 생겼지만 컴퓨터는 아니었다. 이  꼬마친구는 이 진화된 도구 앞에서 진화 이전의 도구를 가리키는 '컴퓨터'를 알 필요가 없어졌다. 아 정말 애플이 원하는 그대로 해석하다니..ㅎㅎ  애플 나 잘했쪄?? 오히려 앞서 '컴퓨터'라는 관념의 틀을 가졌던 사람들은 물질의 속성에 따라 '어떻게 개념정의'를 해야 할지 시야의 폭을 넓힐 필요가 생겼다. 앞으로도 기존의 관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물질의 진화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가졌던 기존의 브러쉬의 정의에서 중요한 속성이 '털'과 '털의 부드러움 정도' 였다면 포토샵 환경에서 브러쉬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표현의 응축'과 '다양성' 이라고 생각한다. '브러쉬'로 칭해질 수 있는 영역은 '컴퓨터' 라고 칭해질 수 있는 영역보다 더 넓어 그 어떤 정의만이 맞다고 하기 어려울것 같다. 단지 현실에서 쓰이는 브러쉬의 정의가 외형적 속성에 좀 더 주안점을 두었다면 그래픽 환경에서 브러쉬라는 도구는 '표현'이라는 목적성에 주안을 두었다는 데서 확장적 관념을 가지게 된게 재미있다. 비록  도구의 진화 속도보다 좀 또는 아주 많이 느렸지만. 포토샵 1.0버젼이 나온건 1990년이다.  

브러쉬 모양들과 브러쉬를 연속으로 그려나갔을 때의 효과_현재 내 포샵 브러쉬들.


'포토샵 브러쉬'가 도장과 연속그리기 효과를 같이 지니기 때문에 '손그림'에는 조금 약한 나같은 똥손도 '디지털 드로잉'면에서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진다. 


브러쉬만으로 내가 그린 그림, 이미지들



위의 이미지들이 '어떤 목적'을 가진 '무엇을 표현하려고 한' 그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목적성이 다르다.  아직까진 내가 하려는 디지털 드로잉이 수익에 기여하거나, 용도가 있었으면 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위 습작들에 의미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 부터 1990년대 초까지 '그림그리기 참 쉽죠?' 로 잘 알려진 밥로스 아저씨는 결과물이 '작:품' 이 아니더라도 그림그리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고 했다. 밥로스 아저씨의 영상을 보다 다른 깨달음도 얻었다. 그림을 빨리 그리기로 유명한 아저씨는 마치 요즈음 일러스트레이터들과 같은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실사속도로 30분이면 풍경화가 나오고 실물도 보지 않고 그려 당시에 업계의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색을 칠해가면서 형상을 찾아가는 그의 작품은 충분히 전달력이 있었고 기법면에서는 다를 뿐 틀리지는 않았다. 대중에게 '감동'을 주어서가 아니라 '내가 즐길만 해서 좋은' 작품이다. 둘은 목적성이 다르다.

밥로스 아저씨로 부터 25년. 유튜브가 가능하고 브런치가 가능한 오늘은 그의 응원 덕이 아니었을까.  

'우리에겐 즐거운 가벼움이 필요하다' 라는


디지털 드로잉을 처음 시작하려 했을땐 막연히 두렵고 어려웠다. 그 중 일부는 브러쉬 사례와 같은 개념의 인지부조화 때문이었고 다른 일부는 완성도와 설득력 때문이었다.. 내가 인지하는 기존의 관념과 지칭된 사물의 이질감이 계속 나를 불편하게 했다. 나만 모르는 건가 하는 바보 같은 생각에 빠지게도 했다. 며칠 끙끙대며 개념검색을 해서 알아낸건 브러쉬의 개념보다 값진 진화의 속도에 대한 이해였다. 가장 빠른 건 상상력 그 다음이 물질, 마지막이 경계의 분류와 정의내리기 였던 것. 완성도와 설득력은 아직 논할 단계가 아니니 두려워할 단계도 아니었다. 만약 나와 비슷하게 하고 싶은 표현이 있는데도 막연히 프로그램과 툴이 어려워서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정의는 몰라도 괜찮아요. 우리에겐 언어말고도 비언어가 있잖아요. 

물론 브러쉬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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