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아노 Art Nomad
Nov 17. 2024
아는 체하기 좋아하는 '어이, 장사장' 알콜이 흥건한 침을 튀기며 말했다.
「어이 장 사장, 필리핀도 차암 좋아지지 않았어? 피노이가 한국 군대를 다 가고.」
「아이, 형님! 거참, 말 좀 예쁘게 하십시다. 앞에서 그러면 어쩝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세상 참 좋아졌다는데.」
「아닙니다. 종종 듣는 말이라 괜찮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한국분이세요. 한국 남자라면 군대를 갔다 와야죠.」
어쩐지. 얼굴에 한국인 피가 조금 흐르는 거 같더만.
술이 불콰하게 오른 성철이 민수의 감상을 깨고 끼어들었다.
「난 말여, 현지처 택한걸 하나도 후회 안혀. 내 인생에도 말여, 처복이 있을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덕분에 민수도 다윗에게서 눈길을 거둘 수 있었다. 성철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다윗을 빤히 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자꾸 눈길이 가는 얼굴이었다.
「아 형님, 그 얘기 좀 고만해요.」
「아녀, 장 사장. 새 식구 왔으니까 새로 또 할 필요가 있는 기지. 잘나가던 사업 다 망해 먹고 한국에 그대로 눌러앉았으면, 처자식 끌어안고 굶어 죽기나 했겠지. 근데 여 와서 얘랑 사니까 말여, 세상이 달라. 한국서도 처가가 법조계나 의사 집안인 게 쉬운 일이 아니 잖여. 다윗아, 있지 우리 와이프 외가, 그니께 와이프 엄마 쪽이 의사, 간호사 집안이여. 근데 말여 친가, 즈그 아빠 쪽은 야, 법원서 일한다. 으때? 쥑이지?」
「그래서, 이쪽 처가 돈 빼다 저쪽 처가에 갖다주니까 좋아요?」
「좋지, 그럼! 두 집 살림하면서 도요타도 타고 다니는데.」
「젊은 형수님이랑 그렇게 재미지게 사는 분이 앙헬레스까지는 뭐 하러 옵니까?」
「이게 또 제집 마당에서는 기집질하는 게 아니거든. 뭐 우리 봉사회 안부도 궁금하고 겸사겸사!」
아직 자랑할 게 남아 있는 성철은 딴청을 부리며 다시 화제를 처가 식구 이야기로 돌렸다.
「근디 말여, 우리 장인이 클래식카를 모으잖여, 근데 이번엔 미쓰비시 콜트 800을 어디서 구해온 거야! 구경하고 싶으면 다음에 마카티로 함 와.」
잠자코 듣고 있던 기숙이 탁, 소리 나게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자랑할 게 없어서, 처가 시다 노릇에 오입질이 자랑인 건지. 원.」
순간, 성철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어느새 묘한 긴장감이 테이블을 감돌았다.
「회장님, 거 말 참 섭섭하게 허네. 오랜만에 봤다고 또 무시 들어오는 거? 어이, 장 사장! 여기 올 때마다 고기 쏘는 거 누구여? 누구냔 말여! 아주 내 지갑 탈탈 털 때는 언제고 들.」
민수는 괜히 불꽃이 제게 튈까 봐 얼른 말을 돌렸다.
「자자, 싸우려면 나가셔서 싸우시고 일단 고기부터 드세요.」
이 집은 어디까지나 여행객을 위한 고깃집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었고 주변을 보니 어느새 손님들은 다 나가고 없었다.
절이 싫어도 떠날 수 없었던 크리스티나 수녀나 다윗은 그저 고기나 굽고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한국인과 일한다는 것은 관심이 없어도 듣는 척, 불편해도 편한 척, 한결같은 웃음으로 화답해야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여기서 필리핀 놈들 덕 안 보고 살아남은 사람 있어? 있냔 말여! 우리 고결하신 번영회 회장님만 해도 말여, 여 한인타운 공짜로 얻은 거 아니 잖여! 여기 있던 피노이 가게 졸리비Jollibee 말고 살아남은 게 몇 이나 되어? 엉? 하나하나 불도저 같은 정신으로 내쫓았으니, 지금까지 유지되는 기지. 장 사장, 너 이 새끼도 말여! 마사지 차리고 거서 일하던 여자나 만났으니까, 결혼씩이나 할 수 있었던 거지. 너 같은 전과자 새끼가 한국에서 결혼이나 할 수 있었겠어?」
「아이 씨, 그 얘긴 또 왜 꺼내요!」
기분을 잡친 민수는 젓가락을 상 위에 내던져 버렸다. 반질반질한 스테인리스 상에 만질만질한 스테인리스 젓가락이 튕기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너 임마, 제수씨한테 잘혀. 그 빈민가에서 드글드글한 형제들 맥이겠다고 발악하던 여자니까 그래도 너랑 같이 사는 거야」
「형님! 진짜 듣자 듣자 하니까!」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장민수 덕에 ‘어이, 장 사장’은 술기운에 벌게진 얼굴이 순간 더욱 검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