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축복은 소망 위에 내린다.
항상 이맘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약간은 식상한 각종 크리스마스 특집을 보아야 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에 캐럴이 빠질 순 없다. 캐럴은 크리스마스의 통속적인 면을 잘 보여주기도 하면서도 인류가 가진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상에 함축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 단순 소박한 열망 같은 것을 동시에 나타내기도 한다. 성탄시즌은 로마에서 이교도들의 겨울 축제이기도 했다. 그것이 기독교의 예수 탄생일로 지정되면서 기독교적인 외형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성탄절의 유래에 많은 다양한 헬라 신들과 로마인들과 여러 민족들의 정서가 뒤섞인 먹고 마시는 축제의 기원에서도 지금 크리스마스의 보편적인 열정적인 면모 같은 것들을 어렴풋이 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관심은 정말 진실한 시선의 동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교환하는 선물이란 (오로지 특정한 시기에만 내가 주고받았던) 바로 그 관심 어린 시선의 또 다른 상징물 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에 깃든 가장 보편적인 미덕 중 하나가 바로 향수 nostalgia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이러한 사람들의 향수나 선물, 안심하고 내가 성장했던 가족, 조건 없이 나누던 바로 그 관심들에 대한 향수를 특별히 고취시키는 것 같다. 빛바랜 사진이나 기억, 선물과 낡은 엽서들은 캐럴과 함께 우리를 특별히 사심 없이 받았던 시선과 관심의 시기로 데려다준다. 관심은 정말 진실한 시선의 동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교환하는 선물이란 (오로지 특정한 시기에만 내가 주고받았던) 바로 그 관심 어린 시선의 또 다른 상징물 인지도 모른다. 향수는 기억의 소멸이라는 - 우리 존재의 사라짐의 본성을 낭만적인 슬픔으로 치환시켜 주는 유일하고도 지혜로운 기제이다.
누구에게나 캐럴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긴장으로부터, 또는 편견과 성과로부터, 나를 안전한 기억 저편으로 데려다준다. 그런 점에서 탁월하게 캐럴은 어떤 보편적인 사람들의 열망이나 치유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이름난 연주자라면 한 번쯤 캐럴을 녹음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캐럴은 이러한 대중친화적인 측면이 크지만, 또한 음악성 있는 뮤지션들이 다양하게 변주하는 캐럴의 스타일을 요모조모 감상해 보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다. 특히 재즈 뮤지션들의 재즈 변주는 굉장히 재미있고 현란하다. 최근에 뉴 소울, 알앤비 계열 아티스트들의 캐럴 변주도 이에 못지않다.
누구에게나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유난하게 와 닿을 것이다. 광화문이나 우리집의 창가나, 상가의 쇼윈도우에서나 촛불은 유난히 아름답게 타 오른다. 진부한 과거로 부터 모방한 것들, 추위와 어두움, 드러나지 않은 거짓들, 빈곤한 내용에 비해 과도하게 분칠된 가식들 사이사이로 특히나 더 아름답게 밝힐만한 촛불을, 진실로 올해의 이브에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태워 볼만할 것 같다.
캐럴을 들으며 또한 성탄절을 맞으며 우리는 다양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성탄절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이거나 통속적인 것들의 불순한 의도들을 소비주의 사회학으로 분석하며 비판의 날을 세울 수도 있고. 어쩌면 분위기에 맞게 파티와 만남의 연결들로 활용해 볼 수도 있다. 다만 더 이상 기존의 역할과 성과들이 우리의 안전핀 역할을 하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 오히려 나 스스로를 불신하게 되었을 때, 한때 누군가가 나에게 주던 그 따뜻한 관심과 응시들을 기억해 내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또한 우리 역시 스스로 그러한 시선으로서 대상을 따뜻하게 회복시켜야 할 축복이 되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글쎄, 내가 기억하던 어머니의 따뜻한 시선은 내가 곧 학교 진학 후 일탈적인 방황을 시작하며 끝장 나고야 말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