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젤 위싱턴의 영화 <펜스>를 보고
늦가을 저녁쯤이었을까? 추수가 끝난 논밭에는 이제 황금빛으로 변한 석양빛이 모든 것을 새롭게 드러나게 하는 중이었다. 나는 하릴없이 약간은 불편한 포즈로 저 멀리 해가 지는 산등성이를 할아버지와 함께 쳐다보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간이 의자에 앉으시곤 별말씀 없이 한동안 그렇게 물끄러미 먼산을 보시면서 시간을 보내셨다. 얼마가 지났을까? 할아버지는 누구에게 던지는 말씀 인지도 모를 곳으로 한마디 불쑥 던지셨다.
'인일이 한테 미안하다.!'
오래전 어느 날 나는 아버지와 소원해 지신 할아버지 댁으로 문안 겸 심부름으로 들리게 되었다. 반골기질이 강하셨던 할아버지와 대도시에서 사회생활을 하시던 아버지는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아니, 아주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서로 내왕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뭐 복잡하고 누구나 한두 가지 정도 가지고 있을 가족사의 아픔은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몇 가지 볼일과 안부를 위해 방학 중이던 내가 삼촌 댁에서 지내시던 할아버지 댁으로 갔던 것이다. 그즈음 할아버지는 치매를 앓던 중이라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날 오후에 남의 논밭에 무작정 볼일이 있다고(?) 나를 동반하고 나선 산책길에서 오랜 침묵 끝에 뱉어낸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사과였다!
*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펜스에는 빈민 생활을 이어가는 흑인 가족들이 등장한다. 트로이는 그 가족의 흑인 가장이다. 하루 종일 쓰레기를 치우며 사는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집의 울타리(펜스)를 세우며 소일한다. 마음 좋은 친구나 아들을 도움을 받으며 펜스를 세워가면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험한 세상을 헤치며 나왔는지 장황하게 들려준다. 늘 술을 마시며 백인들을 증오하며 사는 그는 그럴싸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부조리한 죽음과 폭력을 너무 많이 경험한 그는 강인하지만 또한 완고한 세계관으로 무장한 투사이기도 하다. 심지어 죽음과도 싸워보자고 선언한다. 그래도 그에게 있어 유일한 생산적인 시간은 펜스를 세우는 일이다.
이 영화는 덴젤 워싱턴이 직접 주연과 감독을 겸한 작품이다. 원래 오그스트 윌슨의 희곡을 영화로 옮겼다고 한다. 진정한 흑인 예술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영화가 성취하고 있다고 느낀다. 미국에서 흑인의 정체성은 계급 문제, 인종문제, 혹은 성별의 문제까지 다양한 것들과 결부되어 있다. 실지로 많은 흑인 대중문화들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흑인들만의 범주 언어, 상업성, 원한으로 대부분 물들어 있다. 이 영화는 진정 문예적인 성취를 보여준다. 영화지만 완전한 연극적 요소를 도입했다. 일종의 덴젤 워싱턴의 원맨 모노드라마처럼 그의 연기력은 출중한 흡인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대부분 트로이의 뒷마당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무대로 삼아 덴젤 워싱턴이 연기하며 들려주는 독특한 엑센트의 이야기에 할애한다. 흑인 아버지로서 트로이의 인생 이야기는 사실상 흑인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모든 아버지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그가 그렇게 겉으로만 강인한 가부장적인 정체성을 지니게 된 것에 대해 이 영화는 단지 사회의 문제로도 그의 내면의 문제로만 부각하지 않는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그가 취사선택한 다양한 결정에 의해 그는 나름의 자신만의 신념을 붙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만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가족을 지키고 싸우는 것만이 그의 투쟁이었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홀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트로이의 가부장적 태도와 대비되는 사람은 비올라 데이비드가 연기한 그의 아내 로즈이다. 로즈는 교회나 사회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나름 소시민적 삶을 힘겹지만 나누면서 살고 있다. 심지어 트로이가 바람을 피우고 얻는 갓 태어난 딸 마저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트로이의 아들 코리에게 아버지가 못마땅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평생의 투쟁으로 이룬 자신의 울타리와 무관하게 음악과 운동을 하는 아들들에게 트로이는 꼰대 특유의 강압적인 가르침을 여지없이 선사한다. (정말이지 이 두 사람의 연기력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코리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머니 로즈는 그런 아들에게 너의 아버지는 트로이라고 힘주어 말해준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어쩔 수 없었던 코리는 어머니가 받아들인 어린 여동생이 아버지가 술을 한잔하고는 늘 불렀던 블루스의 자락을 따라 하며 마음의 짐을 털어 내는 듯 보인다. 이 영화는 별다른 커다란 극적인 사건 없이 엔딩이 된다. 이 영화는 트로이에 관한 흑인의 영화이면서도 우리 모두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지극히 세속적 삶에서 힘겹게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면서도 공동체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아울러 삶에 대한 이야기 면서도 구원에 관한 예술작품 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자식들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천국을 선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적 삶에서의 상처와 고통을 선사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상처와 고통은 너무나 선명하게 손에 잡힌다. 그런데 그의 완고한 원칙은 우리에게 숨이 막히는 펜스 밖의 자유를 꿈꾸게 한다. 어쩌면 우리의 능력 밖에서의 용서를 원한다. 영화의 토리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원했지만, 우리는 사실상 아버지를 닮아 간다. 트로이의 이야기에서, 그의 아버지는 그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면서도 그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 대상이었다.
현재 나와 나의 아버지는 어떨까? 그럭저럭 잘 지낸다. 어쩌면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또한 깊은 그 무엇을 나누기엔 한계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번도 두 사람 모두 스스로에게 진실하게 소통되는 언어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언어는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원망들 안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아마 내가 투쟁하고 싸워 온 그 모든 정교한 신념의 체계 안에 존재하고 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언어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어떠한 종류의 극복이 필요하다.
토리가 아버지의 블루스를 부르면서 극복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누구나 많은 각자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무엇을 극복해야 할지 무엇부터 선택해야 할지 사실상 순간순간 제대로 알기는 힘들다. 모든 순간은 고통과 상처의 이야기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영화의 마지막은 울림이 있다. 트로이가 음으로 양으로 한결같이 늘 챙기던 장애인 동생이 들고 다니던 트렘펫의 소리가 멀리 하늘까지 울려 퍼지며 토로이의 뒷마당에는 아름다운 햇살이 비친다. 트로이는 분명 어딘가 고장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용서를 받았을까? 그의 아버지로부터, 혹은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