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그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 중 한 명이며, 도시계획자, 디자이너, 화가, 작가로도 활동했다. 그의 본명은 샤를-에두아르 장네레-그리스(Charles-Edouard Jeanneret-Gris)이며, 르 코르뷔지에는 그의 예명이다. 그는 건축학계에서는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모더니즘 건축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이며, 르코르뷔지에가 제시한 "기계 시대의 집"이라는 개념과 걸맞게 그의 실제 건축물들은 모더니즘 건축과 도시 계획의 방향을 결정했으며, 그의 영향력은 현 시대에서도 지속되었다.
'미켈란젤로'라는 역사상 최고의 건축가에 비견되는 재능을 지닌 예술가로 평가받는 '르코르뷔지에'는 현대건축과 도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혁신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파리 예술계에 홀연히 나타나 건축의 근대화를 이끌어, 아름답고 혁신적인 건축물들을 선보였다.
필자는 'arte' 출판사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매우 좋아한다.
이 시리즈에서 나온 예술계의 거장들의 생애를 그들이 지나온 거처를 표현하는 글과 함께 읽다보면
어느새 활자를 헤매는 느낌이 아닌 거장들의 생애를 직접 참예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하학 형태는 적정 비율 속에서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부족함 없이 드러내주었다. 르코르뷔지에는 빛 속에서 명쾌한 형태를 만드는 이러한 도형에 매료되었다. 그 조형 요소들은 옛 신전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공장과 창고에서 이미 활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합리적인 형태로 감동을 주고자 했던 근대건축의 적절한 조형 언어가 되었다.
그가 꿈꾸었던 건축의 감동은 여기서 성취된다. 그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자연과, 그의 유골을 품은 소박한 콘크리트 구조물, 그리고 그가 일생 추구한 ‘햇살 아래 아름다운 형상’은 이곳에서 조화롭게 공존한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보다 저술 활동을 통해 먼저 유명세를 얻었는데, 지역 신문에 연재한 기행문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는 시계계곡에서 산업사회를 경험한 동시에 아름다운 자연을 배웠다. 특히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은 그의 예술적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라쇼드퐁이라는 작은 마을은 그의 세계이자 극복해야 하는 한계였으며, 무엇보다 기회의 땅이었다. 그는 열일곱 살에 고향에서 첫 주택을 디자인했다.
인간이 기계화되어가던 시절, 그들은 예술에서 노동의 즐거움을 찾았다. 장식은 유용한 사물을 만들면서도 사람을 즐겁게 하는 최상의 예술 활동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노동이 잔혹한 고역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장식은 창조 활동의 즐거움을 일깨웠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특별하지 않지만 이 시기만큼은 ‘새로운 미술Art Nouveau’이자 ‘젊은 양식Jugendstil’으로 받아들여졌다. 기계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장식과 예술의 역할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 불리던 시절, 오스트리아 빈은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름답게 치장한 건물이 곳곳에 들어섰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민들이 거리를 누볐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던 극장은 슈트라우스와 말러의 차지가 되었다. 도시에는 자유롭고 낭만적인 음악이 흘렀다. 음악은 귀족뿐만 아니라 대중을 위해 연주되기 시작했다.
-르코르뷔지에 中
미술계의 거장들이 자신의 그림에 자신의 인생을 담는다면,
건축계의 거장들은 자신의 건축물에 자신의 인생과 모든 철학들을 담는다.
그들의 건축물에서는 삶의 모든 혼과 진액, 가치관까지 담겨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도슨트 에세이를 감상하며 '그림' 하나만으로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해석하고자 했다. 그러나 르코르뷔지에를 포함한 건축계의 몸담은 이들은 그들 자신에게는 건축은 예술이었고, 자격증은 중요하지 않았다. 에두아르의 시대에 건축은 그저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예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와 환경, 사회, 정치, 경제 등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술 작품은 건축을 포괄한다. 에두아르의 관점과 같이 유현준 교수님의 저서를 읽다보면 하나의 건축물은 도시와 환경,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문제들을 포괄하는 시각을 열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필자가 유현준 교수님의 서적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어내려갔던 것이 아닐까.
필자는 이런 심미적인 감각을 일으키는 활자들을 좋아한다.
내가 도슨트 에세이나 기행 서적을 사랑하는 이유는
세상을 미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건축가의 생애나 에세이같은 경우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뚜렷한 주제와 주장이 있다기 보다
저자가 오롯이 작품에 대해 느끼는 정서적인 감각을 따라간다.
동기부여를 얻기 위해서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를 읽는 독자들은 그저 정서적인 유희를 느끼기 위해 시간내어 읽는다.
필자는 그 시간들을 사랑한다.
저자가, 혹은 저자가 사려깊게 보는 그 무언가를 함께 따라가기 위해서다.
인간의 삶을 건축의 형태로 구현하기 위한 르코르뷔지에의 고민.
아름다움과 장식뿐 아니라 건축의 효용에 대해 사유했던 그가 건축가로 거듭나게 되었듯이, 그가 몸담았던 수도원에서 환상적인 풍경에 매료되어 그 감각을 그의 생애에 온몸으로 바쳐냈듯이, 필자의 인생도 허무주의에 허우적거리는 잿더미가 아닌,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매료되는 삶, 허무를 집어던지는 삶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키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