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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거나 바르거나 2/2

스페인, 신예희

by ARTRAVEL

취하거나 바르거나

바스크, 스페인, 신예희


10-009.jpg ⓒ 신예희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막걸리를 받아오듯 동네 와인 가게에 빈 병을 가지고 가 와인을 꼴꼴 따라서 채워 갈 수 있는 곳


스페인은 넓은 땅 곳곳에서 두루두루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라 당연히 그 종류도 엄청나게 다양하다. 우리나라에는 코로나스(Coronas)와 마스 라 플라나(Mas La Plana)로 알려진 또레스(Torres) 등 대규모 생산자의 와인 몇 종류만 겨우 소개되었는데, 자국의 와인을 적극적으로 해외에 수출하지 않는 것에 대해 스페인 사람들은 생산되는 족족 자신들이 전부 마셔버리기 때문에 남은 것이 별로 남지 않아 그렇다며 농담한다. 수많은 바르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그들 손의 와인 잔을 보면 농담만은 아닐 것 같긴 하지만. 노란 양은 주전자를 들고 가 막걸리를 받아오듯 동네 와인 가게에 빈 병을 가지고 가 와인을 꼴꼴 따라서 채워 갈 수 있는 곳이 스페인이다.


하여간 그렇게 지역마다 각자의 땅과 기후를 고스란히 품은 맛 좋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으니 바르에서는 대기업 급의 양조장 대신 자신의 지역에서 생산된 개성 있는 와인을 주로 취급한다. 덕분에 이 바르와 저 바르의 와인 맛이 달라, 골라 마시는 재미가 있다. 레드 와인은 스페인어로 비노 틴토(vino tinto), 화이트 와인은 비노 블랑코(vino Blanco)라고 하는데, 영어의 please에 해당하는 뽀르 빠보르(por pavor)만 붙이면 근사한 문장이 완성된다.Vino tinto, por pavor!


콕 집어 바스크 지방을 대표하는 와인을 마시고 싶을 땐 차콜리(txakoli)를 주문한다. 숙성 기간이 무척 짧은, 풋풋하고 가벼운 화이트 와인이다. 단맛이 거의 없고 신맛이 강해 핀초 위에 듬뿍 얹은 마요네즈의 기름진 뒷맛이 깔끔하게 씻겨 나간다. 알코올 함유량은 10% 전후로 일반적인 와인에 비해 낮은 편이라 부담 없이 마시기 좋다. 차콜리는 지난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바스크 지방 가정의 부엌에서 노인들이 직접 빚어 마시던 술이었는데 바스크 문화를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현재는 정식으로 이 지방을 대표하는 와인으로 인증을 받았다. 출세했다. 밝고 선명한 녹색 병에 담아 판매하는 차콜리는 바스크 여행의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단, 숙성 기간이 짧고 알코올 도수가 낮은 만큼 1년 안에 마시는 것이 좋다. 한편, 사과를 발효시켜 만든 달콤한 시드라(sidra)는 사과 주스에술을 살짝 섞은 듯한 맛이라 술에 약한 사람이라도 마음껏 기분을 내기 좋다. 그렇다고는 해도 알코올 도수가 약5-6% 사이니 너무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12-011.jpg ⓒ 신예희


하몽은 언제나 옳으니까


하몽의 세계에도 귀족이 있다. Jamon Iberico!


바르의 천정에는 하몽(jamon)이 열댓 개씩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거대한 돼지 넓적다리가 통째로 매달린 모습이라니,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혹시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식품은 아닐까 하며 슬쩍 건드려 보기도 했지만 틀림없는 진짜 하몽이다. 이 큰 덩어리의 햄을 대체 언제 다 먹겠다는 걸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다. 레스토랑에서도, 바르에서도, 수많은 샌드위치 가게와 스페인 전국의 가정에서도 언제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식재료다.


하몽은 토실토실한 돼지의 넓적다리를 잘라 약 2주간 하얀 소금으로 두껍게 덮어 두었다 반년 이상 건조해 만드는 생햄이다. 일반적으로 햄을 비롯한 육가공품에는 다양한 향신료와 첨가물이 들어가기 마련이지만 하몽 만큼은 다르다. 소금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넣지 않은 순수한 돼지고기 그 자체다. 그 맛이 직설적이면서도 질리지 않고 계속 찾게 되는 힘이 있다. 좋은 하몽을 만들기 위해선 자연환경이 무척 중요한데, 길게는 18개월까지도 매달아 놓고 숙성 건조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바람이 쌩쌩 불어대면서 비가 지나치게 많이 오지 않는 높은 산악지대가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그렇게 훌륭한 장소에서 생산한 하몽에는 세라노(serrano)라는 인증이 부여되는데, 실은 스페인에서 맛볼 수 있는 대부분의 하몽에는 하몽 세라노의 라벨이 붙어 있다. 하지만 어디나 고급품은 있기 마련. 우리나라에도 제주도 흑돼지라든가 보성의 녹차 먹인 돼지 등 여느 돼지보다 좀 더 귀한 몸값의 고기들이 존재하듯 하몽의 세계에도 귀족이 있다. 이름하여 하몽 이베리꼬(jamon Iberico). 참나무 숲에 방목하며 도토리만 먹여 키운 흑돼지인 이베리꼬 품종으로 만든다. 하몽 세라노의 몇 배 이상 높은 가격이라 라벨 위조도 간혹 일어난다. 이베리꼬 돼지고기는 하몽 뿐 아니라 스테이크 감으로도 훌륭한데, 육질과 풍미가 무척 좋으니 스페인에선 반드시 맛봐야 하는 음식이다.

image_1489034191250.jpg ⓒ 신예희


오늘은 참 좋은 밤


이 바르 저 바르 2차, 3차, 4차


한편 스페인은 다양하고 맛 좋은 치즈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나 스위스, 네덜란드처럼 세계적으로 이름난 소위 명품 브랜드는 아직 없지만, 스페인 전국에서 약 1,500가지가 넘는 치즈를 생산하니 그 안에 담긴 맛 좋은 지역색을 곧 우리나라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해본다.


이런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하는 만큼, 같은 골목 안에 있는 바르라도 각각의 음식 맛과 술맛은 무척 다르다. 주력 요리도, 요리사의 입맛과 손맛도 모두 각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신 지역에 크게 좌우된다. 그러니 한 바르에서만 주구장창 핀초를 먹고 마시는 것 보다 이 바르 저 바르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이 훨씬 즐겁다. 이렇게 2차, 3차, 4차 하는 식으로 바르 순례를 하는 것을 차테오(chateo)라고 한다. 오래전에 정착한 스페인만의 음주 문화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매력적인 바르에서는 토마토소스에 졸인 갈빗살로 만든 핀초에 레드 와인 한 잔, 웨이터가 특히 잘생긴 바르에서는 차콜리와 대구살 튀김 핀초를, 어느 모던한 바르에서는 달콤하고 시원한 상그리아 한 잔과 샐러드를. 페이스북 친구 추가를 거듭하는 사이 어느새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바디 랭귀지도 격렬해진다. 이 바르에서 사귄 친구가 저 바르를 소개해 주고, 저 바르에서 의기투합해 다음 바르로 우루루 몰려가다 보니 어느새 새벽. 술에 얼큰히 취한 김에 낮에 구입해 수줍게 가방 안에 넣어 두었던 바스크 전통 모자를 꺼내 머리에 써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박수. 좋은 밤이다.

image_1489034286181.jpg ⓒ 신예희
image_1489034315941.jpg ⓒ 신예희



글 | 신예희

사진 | 신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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