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신의 경계에 서서
글 양정훈 사진 Ricardo Torres
실제로 오로라를 본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가늠하기 힘든, 숨 막히듯 아름다운 빛에 대한 기기묘묘한 전설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일.
어떤 부족은 아주 오랫동안 인간들 몰래 지구에 살아온 신들의 그림자라 했다. 몇만 년 전 땅을 향해 활짝 열려있던 하늘 문이 닫힐 때, 지구가 너무 아름다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문을 넘지 못한 신들. 겨울이 되면 다시 열어 달라 그들이 하늘 문을 긁을 때 나오는 섬광이라고도 했다. 또 있다. 고대 아이슬란드인들은 이 빛을 살아있는 여신의 몸짓이라 추앙했고, 바이킹 족은 가장 위대한 신들의 왕이 불로 화한 것이라 믿었다. 오로라에 홀려 툰드라를 시체처럼 헤매다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바람처럼 떠돌았다. 그리고 사미들은 오로라를 통해 불의 여우를 만났던 것.
하지만 이 여행을 안내하는 가이드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끊임없는 인내심을 가져라. 하늘의 어떤 구석에, 어떤 모습으로, 언제 그 빛을 드러낼지 아무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 오로라는 쉽게 나타나지만, 아무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 실제로 내가 만났던 몇 명의 단기 여행자들은 모든 조건이 잘 갖춰진 밤에 몇 시간이고 새벽까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끝내 그 빛을 못 보고 돌아가는 길이라 푸념하기도 했다.
제이. 잠깐 일어나 봐. 지금 자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
그리고 다음 날 밤. 트롬쇠로 돌아가는 길. 아나가 깊은 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웠다. 버스는 한적한 밤의 숲을 그림자처럼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음… 무슨 일이야?
얼마나 잠들었던 건지 알 수 없다. 아나 역시 금방 잠에서 깬 듯 부스스한 눈을 비볐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번지는 아주 묘한 미소. 그때, 쥐 죽은 듯 조용하게 모두 잠에 빠졌던 버스 여기저기 갑자기 여행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조금 열려있던 창문 커튼을 확 걷어 젖혔다. 그리고 몇 초 사이 휙휙 버스 안에 사람들이 모두 커튼을 열어젖힌다. 창밖에는 길고 하얗게 늘어선 밤의 자작나무 군락. 지구 북쪽의 마지막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깊고 적막한 숲이었다. 그리고 숲과 밤하늘 사이에 아른아른 거리는 무엇. 거기에 미끄러지듯 살랑거리는 묘한 초록빛이 있었다.
여우다. 틀림없는 불의 여우다. 전설 속에 살다 까마득하게 잊혀져 버린 그 여우가 툰드라를 달리는 거다. 너무 세차게 꼬리를 흔든 탓에 북극 나무에 불이 붙은 것이다. 간질거리던 초록 불이 하늘 위에 금세 와락, 하고 환하게 피어오른다. 버스 안에 여행자들은 모두 창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하얀 입김이 유리 창마다 뽀얀 성애를 피웠다.
고작 작은 빛의 뭉치 같았던 오로라는 이젠 정말 거대한 여우의 꼬리처럼 하늘 한편을 다 덮으며 살랑거리고 있다. 나무 끝에 걸친 구름인가 싶은 뿌연 것들이 천천히 밝아진다. 3분쯤 지났을까? 그 뿌연 것이 흐느적거리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빛의 실타래로 변하며 동쪽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한 마리의 여우가 자취를 감추면 금세 다른 하늘에 불의 꼬리를 흔드는 또 다른 한 마리의 여우.
여행을 통해 신화를 만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 여우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났던 아주 오래된 민족의 아주 오래된 사냥꾼들과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만나는 가슴 뛰는 일. 마종기 시인은 알래스카에서 지내는 동안 오로라를 목격하고, 꼭 지상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의 혼이 하늘로 밀려 올라가고 죽은 사람들은 하늘을 열고 나오며 만나는 빛과 같았다고 썼다. 그는 그 여행에서 살거나 죽은 모든 것들의 넋으로 오로라를 이해하는 어느 민족의 어느 전설을 들었던 것일까?
수천, 수만 킬로미터의 광채. 이 곳이 지구의 끝이다.
저 빛 너머에 신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