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RAVEL VOL.29
난드가온 | 인도 | 이경택
델리에서 세시간 남짓 떨어진 작은 마을 난드가온의 정상. 그곳에 위치한 힌두교 사원엔 이미 흥건한 물감으로 얼룩진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지도자로 보이는 한남자의 나지막한 신호가 울려 퍼지자 세상은 온통 빨간 가루로 뒤덮였다. 다른 관광객이 2층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나는 홀리 의식의 현장 한가운데 그 얼룩진 남자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빨간 안개로 가득 찬 사원 안에서 한 두 명씩 실루엣을 드러냈고, 나는 허겁지겁 렌즈를 닦으며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이윽고 물감이 온 사방에 뿌려지고 붉은 전장에는 색을 가득 머금은 전사들이 가득 찼다.
인도 달력에서 마지막 보름달이 지면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봄이 시작된다. 이를 기념하는 인도인의 의식이 바로 홀리 축제다. 매년 2~3월 사이, 인도 전역과 인근 힌두교 국가에서 시작되는 힌두교 최대의 축제는 봄을 상징하는 다양한 색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힌두교의 최고의 신 중 하나인 카리슈나의 신명에 취해 그 해 풍년을 기원한다. 계급과 성별을 떠나 서로에게 축복을 나누며 축제의 열기는 고조된다. 인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축제지만 진면목을 보려면 수도 델리에서 조금 벗어난 마투라 지역으로 가는 게 좋다. 이곳의 마투라 축제와 인근지역 라트마르 축제가 가장 열광적인 원형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곳은 좀 싱거울 수 있다.
이 놀라운 축제를 위해 여행자가 준비할 것은 별 게 없다. 그날 입고 버릴 옷과 그 누가 다가와 "해피 홀리!"라고 외치며 당신의 얼굴을 물감 범벅으로 만들어도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충분하다. 물론, 날아오는 물세례에 당황스럽겠지만 처음 한 두 번이 문제지 이내 누구라도 마음을 놓아버리게 된다.
델리에서 남동쪽으로 120km 떨어진 인도북부 우타르프라데쉬주 난드가온 마을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일주일 먼저 축제가 시작되었다. 전날 바르사나 마을과 함께 라트마르 홀리축제를 시작한 나드가온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 마을로 이동하여 공수 교대하듯 물감 세례를 주거니 받거니 퍼붓는다. 어제 바르사나 사원으로 간 난드가온 마을 사람들은 유독 파우더 세례를 많이 받았다. 오늘 자신의 마을에서 바르사나 마을 사람들을 맞이하는 그들은 거대한 드럼통에 가득 물감을 채운 후 바르사나 사람들이 사원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바르사나 사람들은 아주 지독하게 물감 범벅이 되고 말 것이다.
홀리 축제의 하루는 그렇게 온 마을이 물감으로 물드는 날이다. 화려한 색의 파우더를 던지기도 하고 양동이에 물감을 가득 타 지나가는 사람에게 뿌리기도 한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는 건 물총.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호와 함박웃음을 담아 물총을 겨눈다. 홀리 축제가 한창인 인도 거리의 모습이다.
보통 오후 4시를 기점으로 마을의 사원에서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지만 이미 마을은 오전부터 시끌벅적이었다.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물총세례와 파우더 세례를 받는다. 그렇게 인도인의 축복세례를 한두 번 받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몸에 베여있던 경계를 허문다. 그리고 그때부터 입가에 그들과 같은 미소가 맴도는걸 느낄 수 있다. 34도의 더위를 날려버리는 순간이다.
골목 골목마다 매복해있는 어린 힌두전사들의 물감세례를 받으며 언덕으로 올라가면, 서서히 구름 같은 인파와 함께 사원에 입성하게 된다. 평소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사람들은 소년들이 연주하는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힌두 사제들에게 성금을 하고 대신 물감세례를 받는 사람들, 그 뿌려진 물감 바닥 위를 구르며 기도하는 사람들, 마을 주민끼리 행운을 빌며 물감을 뿌려주는 행위까지 각양각색이다.
오후 4시, 본행사의 시작과 함께 분위기는 최고조로 달아오른다. 바르사나 마을 사람들이 난드가온 사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난드가온 사람들을 도발하는 노래를 부르면 거대한 색의 향연은 정점을 향한다. 난드가온 사람들은 이 순간을 위해 커다란 양동이를 수십 개나 준비했다. 비록 짓궂고 광적이지만 수십 개 양동이에서 쏟아지는 물감 세례를 맞는 사람들의 표정에선 기쁨과 행복이 피어오른다.
붉은 색은 힌두인들에게 행운의 색이다. 색의 축제에서는 많은 색이 쓰이지만 그중 하이라이트는 바로 붉은색. 축제가 진행되다 보면 바닥은 언뜻 피바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화합의 증표다. 비록 얼굴은 파우더 범벅이 되고, 옷은 물감에 축 늘어져 무거워졌지만 한 차례 씻겨나간 듯 마음 한구석 자리 잡고 있던 불필요한 걱정이 허물어 지는 듯 하다. 그날 밤 숙소에서 하염없이 씻어 내려간 붉은색 물감을 보며 잠시 나는 내 여행의 가난과 편견과 환희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렇게 조금씩 씻어 낸다면, 나는 언젠가 여행자다운 여행자가 될 수 있는가.
글│이경택
사진│이경택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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