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RAVEL. 28
훈자 | 파키스탄 | 변종모
재채기를 참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늘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다고 우겨야 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꽃 사태. 바람이 툭 쳤을 뿐인데 와르르 쏟아지던 그날의 전부. 어쩌면 그 봄의 모든 것.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일은 불가능이다. 그런 마음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는 익숙한 모든 것들이 매일 처음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고, 욕심은 났지만 죄의식은 없었다. 어느 날 너는 "식사는 했냐고" 물었을 뿐이지만, 나는 이미 너의 과거까지 다녀온 사람이 되고 싶어서 꽃처럼 수줍었던 일. 모든 처음은 과장되거나 황당할 것이라 여겼다. 어느 봄에 너와 내가 처음이었다가 순식간에 이별이었다면, 이 산등성이 아래의 모든 봄은 절대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 온 채로 날마다 처음이다. 처음이란 것은 단 한 번의 시작을 말하지만, 너에게만큼은 매번, 매일 처음이고 싶다. 더 이상 깊어지지 않아도 흐르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 홀로 깊어져 너에게 흐르는 일. 또는 이곳에서 멈추어 너를 기억하는 일. 내일도 나는 너를,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처음이 아니었다. 10년 사이 세 번째다. 어떤 때는 24시간이 걸렸고 어떤 때는 27시간이 걸렸다. 되돌아 갈 때면 다시 오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다짐했지만 소용없었다. 봄을 본 적이 없었으니. 여름과 여름이 끝나가는 계절을 오래 지내봤지만 봄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훈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가 봄이었으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탐스러운 살구가 온산을 뒤덮고 있었다. 너무 늦어버렸다. 여행의 시간을 조절하거나 계획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다만, 잦은 충동이 있었다.
갈수록 좋아지고 있는 세상과 상관없이 순전히 운이 닿아야 몸도 닿을 수 있는 곳. 훈자행 버스를 탈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운이다. 나의 의지로 시작되지만,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내 탓이 아닌 곳. 다시 달려간다. 봄을 맞이하러 간다. 단지 봄을 보기위해 모든 걸 접어두고 배낭을 꾸렸다. 이 호사스런 충동을 버스에 싣고 흔들리며 간다. 깊은 밤, 아스라한 히말라야의 허리를 돌고 도는 동안 몇 번의 꿈을 꾸었지만 깊은 잠은 아니었다. 눈처럼 흩날리는 꽃송이를 쫓거나, 구름의 위치에서 바람처럼 거닐며 노래를 부르거나, 꽃잎을 덮고서 낮잠을 잔다. 꿈결 같은 상상으로 몇 번이나 다녀온 곳. 늘 꿈처럼 상상만 가능했던 일들. 몸살 앓는 소리를 내던 버스는 자주 잠꼬대처럼 허우적거렸다.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조바심을 줄이고자 검은 얼굴의 사내들과 담배를 나눠 피웠다. "훈자에 살구꽃이 피기 시작했을까요?" 아직 그럴 리 없다는 손짓에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전혀 이치에 안 맞는 대답이라는 것을 알지만 상관없다. 이미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
어둠에 감금당한 풍경들이 환하다. 만년설로 뒤덮인 봉우리들과 계곡 아래로 담배연기를 불어넣는 검은 얼굴의 눈동자들이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어둠이 감출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곧 날이 밝았고 선명한 히말라야의 오후가 기울어 다시 늦은 밤이 되어서야 훈자였다. 달밤에 눈발이 희끗하게 날리고 있었다. 자칫 꽃잎이라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끝내 닿고야 말았다. 10년을 기다린 봄. 마치 처음 닿은 것처럼 호들갑스러운 마음은 꽃을 보기 전까지 인내해야 하는 일만 남았다. 마음을 감출 수 없어서 손톱보다 작은 봉우리에 입맞춤을 했다. 모든 것이 익숙했지만 처음이었다.
정확한 약속 날짜도 없이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갈비뼈 사이로 터져 나오는 그리움들로 천연색의 물감을 만들어 상상화를 그리는 것처럼 덧없다. 매일 밤, 꽃의 잉태를 점쳤다. 정전이 자주 되던 밤에 별빛은 더욱 빛이 났고 간혹 심하게 바람이 불 때면 걱정이 앞섰다. 꽃의 탄생을 방해하는 모든 요인들을 걱정하며 보내던 이상한 마음들 그리고 밤들. 차가운 공기로 빚은 3월의 마지막 밤. 등을 쓰다듬는 숨결 같은 인기척이 어둠을 두드렸다. 먼 곳의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을까? 아니면 내가 나를 불러내는 소리였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밤의 방문을 열고 어둠의 바깥에 홀로 섰다. 등 뒤의 창가엔 촛불 한 자루가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그다지 효력이 없다. 그 순간 뜰과 뜰아래 계곡으로 이어진 허공 사이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봤다기보다 발견했다. 발견했다기보다 느꼈다. 어둠의 경계가 없던 풍경 속에서 점점이 새어나오는 빛들. 검은 세상에 뚫린 구멍처럼 선명하지 않았지만, 단단하게 맺힌 봉우리가 하얗게 갈라지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술렁거리는 마음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단정하고 고요했다. 그래서 비명은 지를 수가 없었다. 꽃이 피기까지는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말을 신용하지 않았던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10년을 기다리고도 날마다 초조했다. 밤부터 피기 시작한 꽃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피어났다. 꽃의 폭력. 누군가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아름다운 문장이 떠올랐다. 힘을 가하는 주체가 달라졌을 뿐, 꽃의 속도가 과하다. 거세다. 한 번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더니 사태가 지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꽃의 속도에 짓눌린 마음이야 보상 받을 필요도 없겠지만, 놀랍도록 변해가는 풍경은 누구에게라도 쥐어주고 싶었다. 순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가하는 최대치의 아름다운 폭력은 속도다. 이 순간을 발견하지 못하면 또 다시 꼬박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집집마다 여러 그루의 살구나무가 있고, 집 밖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온통 살구나무로 시작해서 살구나무로 군락을 이룬다. 봄의 훈자에는 하늘과 설산과 살구꽃뿐이다. 가끔 그 사이를 오고가는 꽃과 같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마저도 꽃이 만개하는 시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 보이는 것, 아니다 그것만 보려고 애쓰는 것. 그런 버릇은 어쩌면 영원히 치유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봄의 훈자에서는 더욱 그랬다.
너에게 처음이었다. 내 모든 것이 꽃가루처럼 혼미하게 흔들리던 일. 봄비가 오던 늦은 오후의 충무로에서 꽃잎처럼 환하던 얼굴. "식사는 하셨어요?"가 첫 인사였고, 그 이후의 날들로부터 날마다 너는 내게 처음이었다. 여러 날이 흘렀지만 늘 내게 처음이었던 모든 일. 어쩌면 우리가 아주 먼 훗날까지 함께 하더라도, 너는 내게 날마다 처음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단지 가능성 없는 과한 말들이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 너를 위해 발설한 말이니 거짓말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거짓말이라면 너와 나 사이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좋은 현상들을 제외하면 그것이 유일한 거짓 같았다. 처음이라서, 마음이 서툴러서라는 변명은 하지 않겠다. 아름답고 좋은 것을 보고도 참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여겼다. 근거가 없지만 그날의 모든 것은 사실이다. 꽃이 피는 시기를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한 번 피기 시작한 꽃을 막을 방법은 없으므로. 그 누구도 그래야할 이유가 없으니까. 내게 처음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너의 방향으로만 흐르던 내가 과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 이유를 너는 모르고 나만 고집했던 이유로, 너와 나는 잠시 피었다 떨어진 꽃처럼 짧은 과거만 있다. 그래도 너는 내게 한 때 꽃이었으니 그걸로 좋았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 너의 반대편에서 꽃의 속도를 바라보는데 너무나 익숙하다. 그래서 낯설다. 네가 나에게 꽃이 되던 속도가 지금도 생생하게 쏟아지는데, 그것을 다시 보려 먼 길을 달려온 이 마음은 낯설다. 한동안 이 곳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 번은 너로 인해, 또 한 번은 꽃으로 인해.
"당신이 천국에 가기 전 이곳을 다녀간다면 이미 천국은 낯선 곳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런 거짓말을 하고 싶어졌다. 너도 나도 천국은 확인할 길이 없고, 이곳을 천국이라 소개했을 때 부정한 사람을 못 만났으니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격렬한 것은 언제나 장렬하게 끝이 나고야 만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오로지 비루한 마음뿐이다. 꽃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밤. 배낭을 꾸리다가 가로등 곁에 자리 잡은 늙은 살구나무에 기대어 오래도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그랗게 번져가는 꽃잎들 사이로 별빛이 쏟아졌다. 탓할 상대가 생각나지 않는다. 만만하게 토로하고 싶은 얼굴하나 떠올리지 못하고 자꾸만 밤이 깊어 간다. 누구라도 붙잡고 투정부리고 싶은 밤, 투정부릴 상대 하나 없는 이 모든 서운함까지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치명적으로 다가오거나 멀어졌던 모든 일들은 단 한 번으로도 족한데, 죽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안다. 모든 처음은 그런 식으로 기억하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눈을 감고서도 모든 것이 또렷해질 때까지, 혹은 꿈결에서도 팔을 뻗어 닿을 때까지 지치도록 보고 싶었고 지겹도록 보고 싶었다.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꽃의 문신을 새기듯 한 잎 한 잎, 이 산중의 모든 꽃잎을 기억하고 싶었다. 돌아서는 너의 왼쪽 어깨라던가 한 번도 돌아본 적 없는 낮은 허리라던가 그런 사소한 것들이 활자처럼 명확하게. 자꾸만 욕심이 커지고 있다. 처음이란 그렇게 거대하다. 편안한 와중에도 긴장이 몰려온다. 이 꿈 같은 시절이 꿈으로 끝이 날까봐. 오래도록 훈자의 봄을 상상해온 이후 현실이 되었을 때의 첫 감정은 상상력의 부재였다. 내 빈약한 상상의 질량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비한다면 꽃잎 한 장의 무게만큼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상상이란 결국 현실을 근거로 꿀 수 있는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경험해보지 않고서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만 함부로 상상하기엔 이곳의 봄은 도가 지나치다.
처음이었다. 일본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거나 봄이 되면 흔하게 발견되는 벚꽃에서 느낄 수 있는 아기자기하거나 아름다운 꽃무리가 아니다. 거칠거칠한 설산에 함락당한 꽃의 삶은 오히려 애틋하거나 절박한 듯하다. 이 척박한 산중에서 피어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 그리고 꽃처럼 웃는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꽃의 본질. 꽃이 감당할 수 없는 표정들이 사람에게 다시 피는 곳. 만개한 꽃나무들 사이사이에서도 천연덕스럽게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 바라보는 꽃이 아니라 살아가는 꽃의 군락지. 이 안에 처음으로 존재하는 나. 이것을 보러 천 길을 돌아온 것이다. 험준한 길 위에서 꼬박 두 번의 밤 끝에 겨우 도착하는 곳. 삶의 어떤 부분도 쉬웠던 적이 없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곳까지 닿는 시간이야 말로 고작이다. 꽃을 보러 왔다가 꽃의 무덤까지 보고 돌아서는 길. 언젠가 다시 시작될 꽃의 탄생. 그때는 오늘처럼 또 처음일 것이다. 내 마음이 그렇다고 거짓말 할 것이다. 거짓말의 거짓말을 빌어서라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 내 속에 아직도 꽃잎만한 사랑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시 한 번 그날처럼 크게 부풀려 눈앞의 모든 것을 꽃밭으로 여길 수 있지 않겠나. 내게 오는 모든 것을 대하는 일들이 꽃처럼 환한 마음이라면 어떠한 거짓말이라도 죄 없는 거짓이 될 것이다.
지금 돌아서는 나는, 너를 본 적도 꽃을 만난 적도 없다. 그래서 다시 올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호들갑스럽지 않게, 마치 처음처럼 다시 올 것이다. 너를 닮은 모든 것들은 내게 언제나 처음일 것이다.
Zero Point
꽃씨 하나를 심었다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곳에
꽃씨 하나를 심었다
훗날 꽃으로 피는 게 아니라
너로 필 것이다
그때 너와 함께 설자리에
꽃씨 하나를 심었다
이곳이 아니어도
그 어디라도 상관없는 곳에
꽃씨 하나를 심었다
꽃이 필 때를 기다려
너를 보러 갈 것이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지구상에 처음 피는 꽃씨 하나를 심었다
글│변종모
사진│변종모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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