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RAVEL VOL.37
북아일랜드 | 송은정
반복해서 꾸는 꿈이 있다. 무슨 영문인지 이야기는 늘 같은 지점에서 시 작된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한다.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 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들 이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환대 속에서 나는 이따금 환하게 웃는다. 장면은 여기까지.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누 군가 스톱 버튼을 누른다. 벌써 5년째. 나는 이 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 ● ●
이직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여느 직장인이 그렇듯 더 나은 조건과 연 봉을 갖춘 회사를 갈망했다. 그러면 삶이 더 나아질 것만 같아서. 지 금의 모든 불평과 불만, 하다못해 잘 풀리지 않는 연애까지 자연스레 해결될 것만 같았다. 하루는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째서 이직만 고 집하고 있는 걸까, 계란말이를 우적우적 씹으며 느닷없는 의심에 빠 져들었다. 곧 의구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그날 온종일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사진을 공부하는 파리의 유학생이 될 수도, 50리터 배낭을 메고 세계 일주를 떠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대 학 졸업과 동시에 일을 시작한 자신을 위해 긴 휴가를 보내 보는 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수많은 선택지가 우수수 펼쳐졌다. 확장된 세계 안에서 나는 무엇도 할 수 있고,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짜릿했다. 나는 이토록 적극적으로 내 삶에 개입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 공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홀리듯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탄다. 그는 일탈이라곤 모르던 고지식한 성격의 교수다. 얼마 뒤 고심 끝 에 사직서를 냈다. 결정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게 이뤄졌다. 나는 내 삶의 다른 가능성이 궁금했다. 이직 대신 '캠프힐'이라는 장 애인 공동체에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떠났다. 지금과는 다른 삶이 저곳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 ● ●
나와 한집에 사는 토마스의 50번째 생일이다.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카인이 아침부터 부지런히 구운 케이크는 부드러웠고, 초대받은 손 님과 주인공 모두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토마스는 벌써 저녁 외출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의 쌍둥이 여동생을 비롯한 온 가족이 모여 함께 하룻밤을 보낼 예정이기 때문이다. 항상 발등 언저리에 시선이 고여 있는 그의 얼굴에서 옅은 미소가 느껴졌다. "Lucky you!" 온종일 친 구들의 축하가 끊이지 않는다.
빌리저(Villager, 캠프힐에 거주하는 장애인을 일컫는다) 가운데 가 족과 지속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 세월이 흘 러 자연스레 소식이 끊기거나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몇 년 전 어머니를 여읜 크리스틴은 미국에 사는 조카로부터 매년 생일선물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는다. 반면 그녀의 옆 방에 사는 헬렌의 우편함 은 늘 텅 비어 있다. 안나는 1년에 한번 그녀의 홀아버지와 함께 여 름 휴가를 보내러 집에 간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매번 종 잡을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 하지만 섣불리 울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마다의 삶을 긍정함으로써 예의를 갖추려 하지만 실은, 기뻐하는 토마스를 보며 오늘도 울컥하고 말았다.
뒷정리를 위해 접시를 한데 모으고 벽에 걸린 'HAPPY BIRTHDAY 50TH' 가랜드를 떼어 냈다. 다이닝 테이블 위에는 토마스의 친구들 이 가져온 생일선물이 가득 쌓여 있다.
● ● ●
"방에 옮겨 둘까요?" 내가 묻자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오며 가며 볼 수 있도록."
카인은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 안부를 묻는 친구의 엽서를 받으면 곧장 서랍 에 넣는 대신 거실 장식장이나 2층과 연결된 계단 창가에 가지런히 전시하곤 했 다.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에 싱싱한 꽃과 함께. 그것은 기쁨을 오래도 록 음미하는 그녀만의 사소한 습관이었다. 자연히 토마스의 생일선물과 카드 역 시 일주일간 다이닝 테이블을 지키게 됐다. 루브르 박물관의 우아하고 빛나는 장 식품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그 앞을 지나쳤다. 아마도 그때마다 다들 비 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 며칠 전이 토마스의 생일이었지!' '토마스가 벌써 쉰 살이라니!' 찰나의 행복은 그렇게 사람들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이튿날 가족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돌아온 토마스의 손에는 작은 액자 하나 가 들려 있었다. 지난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닮은 듯 닮지 않 은 중년의 형제들 사이에서 토마스는 여느 때보다 크게 웃고 있다. 그가 애정을 담아 일하는 축사의 어미 소에 관해 이야기할 때처럼. 사진 속 손에 든 꽃다발은 꼭 어느 대회의 트로피 같기도 하다. "어땠어요?" 내가 묻자 그가 "구-웃-!" 하 고 길게 늘어트리며 답했다. 토마스는 좀처럼 끝을 올려 말하는 법이 없다. 덩달 아 내 입꼬리도 올라간다.
"다이닝 테이블에 놓아두는 게 어때요?"
토마스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선물 상자 사이에 액자를 세웠다. 아마도 자신의 방 책 상에 가져가고 싶었던 게다. 그의 오래된 책상은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박물 관이다. 방으로 돌아가며 토마스는 내 쪽을 향해 양쪽 눈을 힘껏 찡긋했다. 그는 액자가 어울리는 자리가 어디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 ● ●
"티타임!"
누군가 외치자 사람들이 하던 일을 놓고 슬금슬금 티룸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루 두 번, 캠프힐의 시곗바늘이 멈추는 시간. 오븐에 넣어둔 브라우니, 썰다 만 오이, 면바지의 엉덩이 부근에서 멈춘 다림질도 한 잔의 홍차 앞에선 뒷전이다. 테이블 위에는 로열앨버트나 웨지우드의 우아한 찻잔 대신 사은품으로 받아왔을 법한 투박한 머그잔과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대용량 티백 박스가 놓여 있다. 컵 안쪽 테두리를 따라 찻물이 거뭇하게 물들어 있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따뜻한 김 이 피어오르는 홍차를 마실 땐 누구라도 지그시 눈을 감게 되고 말 테니까.
찻물이 서서히 식는 동안 캐슬린은 지난밤의 작은 사건 사고를 종알종알 늘어놓 는다. 그녀의 정보력은 조간신문처럼 빠르고 정확하다. 소파 끄트머리에 숨듯이 기댄 개리는 밀린 아침잠을 해소하는 중이고, 몇몇은 머그잔을 들고 잔디밭으로 나가 식물처럼 가만히 볕을 쬐고 있다. 5일 만의 햇살이다. 시간은 정직하게 흐른 다. 지나치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스마트폰을 뒤적이는 사람은 없다. 머그 잔을 내버려 둔 채 미처 끝내지 못한 일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저마다의 작은 몰 입의 순간.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30분의 휴식 동안 커피를 마시며 트위터 타임라인을 새 로고침하고 동시에 팟캐스트를 듣는다. 분절된 시간은 쉽게 사라진다. 언제나 시 간이 부족하다고 툴툴댄다. 몇 달 전 서울에서의 내 모습이 바로 그랬다. 파이 조 각처럼 시간을 쪼개 쓰는 데 익숙한 나는 지금도 가끔 발을 동동 굴린다. 빚다 만 쿠키 반죽이 신경 쓰여 싱크대 앞을 기웃거린다. 그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난 린이 내게 한마디씩 던진다. "뭐가 그리 바빠?"
● ● ●
위버리에선 언제나 양모의 고소한 보풀 냄새가 풍긴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티타임 자 리에 슬그머니 끼어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요청하지 않아도 내 몫의 밀크티 한 잔이 주어 진다. 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의자를 바투 당겨 앉아 귀를 기울였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화제는 금세 넘어가고 만다. 이번엔 핼러윈 코스튬 이야기인가 싶은 그때 헬렌이 내 곁으로 조용히 다가와 손에 든 물건을 내밀었다. 붉은색 계열의 양모를 섞어 만든 러그였 다. 내가 처음 위버리를 방문했을 때 베틀에 얼기설기 걸려 있던 낱낱의 털실은 어느덧 형 태를 갖춘 실용적인 작품이 되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혼란스러웠다. 오랫동안 동경했던 슬로우 라이프가 내게 주어졌음에도 기대 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캠프힐의 느슨한 일상은 나를 무기력에 빠트렸다. 때로는 스스로 게으른 사람 같이 느껴져 자괴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단기간에 최대한의 성과를 뽑아내야 하는 시스템 속에서 일했다. 방송국이나 출 판사 모두 야근과 주말 반납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뒤돌아볼 틈 같은 건 없었다. 언제나 다 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일과 일 사이에 또 다른 일을 끼워 넣는 데 능 숙한 사람이 됐다. 당장 오늘을 수습하기 바빴다. 과정은 늘 생략됐다.
매일 한결같이 베틀을 밀고 당기는 헬렌의 느린 손동작을 떠올렸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무언가를 완성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툴면 서툰 대로, 느리면 느린 대 로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경험이 내겐 없었다. 캠프힐 사람들의 얼굴에서 조급함 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서두른다고 해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여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저 매일 매일의 성실함으로 오늘의 일과를 마칠 뿐이다. 헬렌의 아름다운 러그에는 그녀가 통과한 지난 계절이 스며 있다. 그리고 한 잔의 홍차가 서서히 식어가는 동안의 휴식도.
● ● ●
북아일랜드에 도착한 첫날 버스터미널로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은 조였다. 캠프힐 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여긴 천국은 아니야. 하지만 살 기엔 꽤 괜찮은 곳이지."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쩌면 나는 다른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희망한 것일지도 몰랐다. 거절과 실패로 점철된 멍든 일상에서 벗 어나고 싶었다. 서울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괜찮을 것이라는 속단. 정작 캠프힐에 서의 시간은 쉽지 않았다. 낯설고 새로운 환경이 주는 해방감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언어, 장애, 인종, 국적, 사고방식 하물며 날씨와 식습관에 이르 기까지.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나는 유연하지 못했다. 그러니 환경이 바 뀌었다고 해서 내 안의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는 기적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 시간 동안 돈도 경력도 실력도 쌓지 않는 시간의 쓸모에 대해 생각했다. 30분간의 티타임이 만들어내는 하루의 여백에 대해서도. 산책길에 꺾은 들꽃 한 두 송이가 내 작은 방을 얼마만큼 풍요롭게 하는지도 알게 됐다. 캠프힐로부터 배운 것은 태도였다. 어쩌면 다른 삶이란, 나만의 정원을 만들겠다는 다짐과 같 은 게 아닐까. 싱크대와 옷장과 책상이 한 공간에 있는 원룸의 창가에 작은 화병 을 놓고 종종 티타임을 가지겠다는 마음. 거절과 실패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힘을 배낭에 싣고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어렴풋이 안다. 존재하지 않는 답을 좇아 지도에 없는 파라다이스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리움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꿈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일까. 이따금 나는 꿈을 찾아 떠난다.
● ● ●
글│송은정
사진│송은정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www.artrav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