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바람핀 남편을 내용으로 방영되는 드라마가 인기다. 그 드라마를 보지 않는 나조차도 연일 올라오는 기사 때문에 알고 있다. 예술계에도 전 세계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삼각관계가 있다.
로댕의 연인. 뮤즈. 비운의 천재 조각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버림 받은 여인. 그녀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첫 아들을 낳았다. 태어난지 이주 만에 아들을 잃었다. 둘째도 아들을 원했지만 딸이었다. 실망한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기리는 의미로 중성적 이름인 카미유라는 이름을 딸에게 붙였다. 어머니는 평생 딸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고, 애정도 주지 않았다.
여동생 루이즈와 남동생 폴이 태어나고 가족들은 프랑스 북동쪽 빌르뇌브-슈흐-페흐 지역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다. 숲과 바위가 많은 자연 속에서 소녀 카미유는 작은 칼을 항상 들고 다녔다. 뭐든지 깎았다. 진흙으로 만들기도 하고, 바위조각을 조각해 얼굴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에게 카미유 조각들을 보여줬다. 알프레드 부셰Alfred Boucher(1850-1934)는 카미유 재능을 알아보고 기초적 조각 기법을 가르쳤다. 부셰는 그녀가 콜라로시Colarossi 아카데미 입학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 당시 파리 국립 에콜데자르 예술 학교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
17살 카미유는 콜라로시에서 여자 친구들을 만났다. 제시 립스콤Jessie Lipscomb, 에밀리 포싯Emily Fawcett, 에이미 싱어 Amy Singer. 친구들과 함께 몽파르나스 뒷편 노트르담 데 샹 가Rue Notre dame des champs길에 작업실을 얻었다. 에이미 싱어가 사는 영국으로, 제시가 사는 피터버러Peterborough에 놀러 다녔다. 이 시기 카미유는 여신<Diana>흉상, 집에서 일하는 하녀를 모델로 <헬렌>을 조각한다.
부셰는 삼년 정도 학생들을 가르치다 공모전에 당선 되 로마로 떠난다. 카미유를 포함한 제자들을 로댕 작업실에 맡긴다.
첫 만남
19살 카미유가 로댕 작업의 작업실에 갔을 때 로댕은 43살이었다. 유부남은 아니었다. 대신 24살부터 동거해온 로즈 베뢰가 있었다. 로즈 뵈레는 로댕이 무명 조각가로 수입이 없을 때 돈을 벌어왔다. 벌어온 돈으로 마구간 세를 얻었다. 로댕 첫 작업실이었다. 로댕이 마구간에서 모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떠나지 않았다. 로즈 뵈레가 아들을 낳았지만 로댕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좌) 19세 카미유 (우) 로댕
카미유가 로댕 작업실에 들어갔을 때 로댕은 <지옥의 문>을 시작한지 3년쯤 되었을 때였다. 카미유는 <지옥의 문> 조수로 함께 작업한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 때부터 카미유는 로댕의 모델이자 뮤즈, 손과 발로 옆에 있었다. 로댕이 카미유의 아름다움에 빠졌을 때, <Crouching woman>, <Je Suis Belle>, <The Kiss>, <Eternal Springtime>등을 조각했다. 카미유는 로댕의 <입맞춤> <칼레의 시민>(1884~1895)작품에 조수로 함께 작업했다. 카미유는 <지옥의 문>과 <무릎 꿇은 목신의 요정>에 모델로 섰다.
1886년 봄 카미유는 Lipscobs에 머물다 여름에는 영국 남부 해안가 아이러브화이트로 간다. 9월 가을. 파리에 머물다 돌아온 카미유는 로댕이 다른 여자와 만나지 않을 것을 각서를 받는다. 로댕은 모델로 서는 여자들과도 계속 관계가 복잡했다. 여전히 로즈 베뢰와도 함께 지냈다. 카미유는 모든 여자들을 정리하고 로댕과 결혼하길 바랬다.
"전시화가 끝나면 우리는 이탈리아로 떠나 그곳에서 적어도 여섯 달 동안 머무를 거야. 그리고 흔들림 없는 관계를 시작해 훗날 카미유는 나의 아내가 될 것이야." - 로댕이 카미유에게 쓴 편지-.
사쿤탈라
로댕에게 각서를 받은 카미유는 <사쿤탈라>에 집중한다. <사쿤탈라>을 여러가지 재료로 만들었다. 테라코타와 점토, 석고를 이용했다.
190x110x60cm의 거대한 크기로 카미유 혼자 완성한 첫 작품이다. 23살 완성된 <사쿤탈라>는 로댕과 다르게 섬세함이 독보이는 수작으로 꼽힌다. 1888년 로댕이 <지옥의 문>을 완성 하던 해, 카미유는 이 작품을 Salon des Artistes Fraceis (1888) 살롱전에 출품해 대상을 받는다.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좌) 카미유 클로델 사쿤탈라1886-1889 (우) 로댕 키스 1888-1889ⓒmusee-rodin.fr
"나는 두 인물상을 조각하고 있어. 실제 사람 크기만 해. 오전에 여자를 하고, 오후에는 남자를 작업해. 내가 얼마나 피곤한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하루에 열두 시간씩 조각을 해.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집에 돌아오면 서 있을 힘조차 없어 곧바로 침대로 들어가지." - 카미유가 친구에게 쓴 편지 -
로댕의 <키스>는 카미유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원래 지옥의 문 오른쪽 아래 조각하려고 했으나 어울리지 않아 뺐다.
(좌) 카미유클로델 Young Girl with a Sheaf 1887년전 Photo © ADAGP, Paris,2012 (우)로댕Galatea1889
둘은 연인이었지만,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는 동료였다. 비슷한 스타일로 때로 누구의 작품인지 헷갈리기 쉽다.
카미유 클로델 <왈츠> 1893-1900 청동, 46.5cm ⓒchristies.com 사랑의 감정을 왈츠로 표현했다. 카미유에게 또 하나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춤추는 모습을 순간 카메라에 담은 듯 생동감이 넘친다. 첫 작품은 회반죽으로Plaster 만든 누드였다. 평론가 아몬드 다요Armand Dayot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춤추는 표현과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그러나 누드를 대중에게 전시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카미유는 하체 부분에 드레스를 휘감아 두 번째 버전을 제작했다.
"더 이상 나를 배신하지 않으셔야 해요." - 1891년 카미유가 로댕에게 쓴 편지
버림받는 것은 끔찍해
1892년 로댕은 카미유가 아이를 지우는 것을 원했다. 낙태한 그녀를 돌보지 않았다. 로즈 뵈레를 떠나 자신과 결혼하기로 한 각서 따위는 지켜지지 않았다. 카미유는 다섯 번 정도 임신 했었다. 로즈 뵈레는 여전히 로댕의 집에 살고 있었고, 로댕은 몇 개월 카미유의 집에 머물다 갔다. 8년간 지속된 삼각관계의 끝이 왔다.
1893년 카미유는 로댕과 멀어지기를 결심하고 작업실을 나온다. 새로운 방향과 '삶의 스케치'시리즈를 시작한다. 그 해, 로댕은 무돈에 있는 빌라villa des Brillants를 빌려 로즈 뵈레와 이사를 하고 2년 후 그 빌라를 구입해 거주한다.
카미유 클로델<클로토 Clotho> 1893ⓒwikimedia 혼자 남겨진 카미유는 공포와 절망의 <클로토>를 만든다. 늙고 벌거벗은 여인이다. 가슴은 늘어졌고 앙상해진 뼈가 보인다. 이도 빠져버린 여인은 바닥에서 자라고 올라온 자신의 머리카락에 휘감겨있다. 클로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름이다. 운명의 세 자매였던 클로토(과거), 라케시스(현재), 아트로포스(미래) 중 클로토를 말한다. 카미유는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1895년 프랑스 정부가 Puvis de Chavannes연회를 기념하는 대리석 작품을 의뢰한다. <성숙의 시대 The Maturity age>가 탄생한다. 흔히 '중년'이라고 불린다. 로즈 베뢰에게 냉정히 돌아선 로댕을 끝까지 잡아보려 했던 그녀의 모습이다.
카미유 클로델 <중년> 1893년 청동, 131x195x78cm 파리 오르세미술관 팔꿈치와 손끝 비스듬히 기운 머리에 애절함이 흐른다.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린 남자의 어깨와 얼굴에 냉정함이 묻어난다. 로댕은 이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 두려워 정부에 의뢰를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로댕은 이미 조각가로서 거장이었다. 그의 압력으로 의뢰는 취소된다.
혼자 있는 작업실
1898년 카미유는 연인으로서 동료로서 15년간의 관계를 정리한다. 로댕을 완전히 떠나 부르봉 강가 근처에 방을 얻는다. 그녀의 첫 작업실 방에는 침대 하나, 의자 몇개, 석고상뿐이었다.
1898년 마티아스 모하르트 (Matthias Morhardt)가 처음으로 카미유에 대해 쓴 글이 [Le Mercure de France]에 출간된다. 카미유는 퉤렌 Rue de Turenne 63번가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로댕은 카미유와 관계를 정리했지만, 모하르트에게 가끔 돈을 전달해 보냈다. 그녀의 재정적인 면과 예술계에 활동을 지지했다. 카미유는 이것 또한 로댕의 계약이라고 믿고 거절한다.
카미유 클로델 <Profonde pensée> 1898 wikimedia 온 힘을 다해 막고 있고 있는 것은 절망일까. 운명일까.
이듬해 1월 그녀는 다시 생루이 섬 Île Saint-Louis, 19 Quai Bourbon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서 19년을 머물며 마지막 작업실로 쓴다. 이곳에서 <울부짓는 사람> 등을 제작한다.
카미유 클로델 <울부짖는 사람> 1905년 청동, 27.9x36.8x21.3cmⓒ메트로폴리탄미술관 겨울 연료가 끊겨 추운 겨울을 보냈다. 운 좋게 외젠 블로 중개상의 도움으로 개인전을 열었지만 그녀는 술에 취해 한 점도 팔지 못했다. 많은 작품들을 만들었지만 스스로 부셔버렸다. 우울증과 로댕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져가고 또 속일 것이라는 피해 망상에 걸렸다. 남동생 폴이 중국에서 영사로 근무하게 되어 엄마와 여동생은 떠난다.
이 시기 로댕은 프랑스 밖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고, 미술 최고위원회 회원이 된다. 예나 대학, 글라스고 대학, 옥스포드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받으며 성공의 길을 간다.
슬픔이 나를 압도한다 - 30년간 정신병원에서 -
1913년 3월 3일 그녀에게 애정을 주었던 아버지가 사망한다. 4흘 뒤 가족들은 의사를 불러 카미유의 정신병에 대한 소견을 쓰게 한다. 3일 뒤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 시킨다.
일 년 후 일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여성 환자들은 프랑스 남부 지역 수용소로 이송된다. 17살 때 친구였던 제시가 정신병원에 찾아와 카미유가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다. 의사 역시 그녀의 상태가 괜찮아 나가도 좋다는 말을 했지만, 카미유의 엄마는 그녀를 병원에 두길 원했다. 평생 손으로 무엇인가 만들던 그녀는 병원에서 조각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산책뿐이었다.
동생 폴 37세 ©Musée Camille Claude/Marco Illuminati 카미유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4년 후. 로댕의 친구들은 로댕에게 로즈 뵈레와 결혼 할 것을 설득했다. 법적인 부부가 되어야 로즈 뵈레가 사망한 후 로댕이 국가 연금을 받을 수 있고, 정부 소유 비롱Biron 호텔에 들어가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감에 걸린 로즈 뵈레는 사망하기 이주 전 로댕과 결혼식을 한다. 로즈 뵈레는 평생 로댕을 '남편' 대신 '선생님'이라 불렀다. 결혼식을 올린 해에 로즈 뵈레와 로댕은 사망한다.
카미유는 49세에 들어가 30년 동안 병원을 나오지 못했다. 79세 그곳에서 홀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남동생 폴이 몇 년에 한 번 병원을 들렀을 뿐이었다. 가족 누구도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모하르트는 로댕에게 그의 작품을 소장 할 프랑스 정부 박물관에 카미유의 작품도 포함 시킬 것을 권했다.
로댕의 이름 아래 가려졌던 카미유의 작품들은 1980년대 이후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 주요 미술관에 90여점 정도가 남아있다. 로댕의 뮤즈가 아닌 모던 조각의 뮤즈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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