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지금처럼 카메라와 영상기계가 없던 시절에는 움직임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사진기가 처음 발명되고 사진기 여러대를 사용해 움직이는 사진 수십장을 찍어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을 썼다. 이런 움직임에 관한 첫번째 선구자는 영국 사진작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였다.
서양미술사에서 여성 누드화가 에로티시즘을 담고 있는가, 아니면 여성성을 보여주는가 하는 문제는 19세기 이후 더 이상 논쟁의 주제가 아니었다. 이 논제를 넘어 더 나아가 예술가들은 움직이지 않고 포즈를 취하고 서 있는 모델이 아닌 움직이는 인체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더 나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사진기가 발명된 기술덕분이었다.
마네가 사망하기 3년 전, 1830년 사진과 예술계에 큰 영향을 주는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James Muybridge)가 영국에서 태어났다. 머이브리지가 태어나던 그 시기 영국은 산업혁명과 급속한 인구 증가로 변화를 맞고 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미국, 캐나다, 남아프리카, 뉴질랜드, 오스트리아로 이민을 떠났다. 경제적으로 신흥 부르주아 상인들이 나타나고 귀족, 왕족 봉건 체제가 무너졌다. 자본주의 시장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 사진기는 그중 하나였다.
에드워드 머이브리지 ⓒwiki 1867년 머이브리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진찍는 일을 시작했다. 풍경, 철길, 증기선 등 새로운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모습을 담았다. 태평양 연안의 다른 지역들과 머독 전쟁(Modoc War)의 기록했다. 중앙아메리카의 건축물 등을 조사하기도 했다.
당시 주지사였던 릴랜드 스탠퍼드(Leland Standford, 지금의 스탠퍼드 대학을 설립한 사람)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와인 생산지 포도밭 두 곳을 소유하고 미국 철도 사업에 후견인이기도 했다. 스탠퍼드는 말에 관심이 많았다. 1872년 스탠퍼드는 머이브리지에게 달리는 말 사진을 찍어달라고 의뢰한다. 사진을 찍어서 말이 달릴 때 네 다리가 허공에 떠 있는지 순간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 순간 말 다리는 어느 쪽을 향해 있는지도 확인해 달라고 의뢰한다.
머이브리지가 달리는 말을 촬영하기 위해 설치한 카메라들 ⓒfilmmakeriq.com 스탠퍼드의 의뢰에 답을 얻기 위해 머이브리지는 달리는 말 옆으로 길게 카메라 여러대를 설치하고 말을 달리게 했다. 연속 동작을 여러 카메라로 찍은 결과 말은 허공에 떠 있는 찰나에 네 다리가 안쪽으로 향해 있었다.
이후, 머이브리지는 사진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나무 박스 '주프락시크토프'를 만든다. 유리판 끝에 연속 촬영한 사진을 붙이고 회전시킨다. 회전하면서 말이 살아있는 듯한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장치였다. 이 장치는 훗날 영화 영사기의 시초가 된다.
에드워드 머이브리지 <말의 움직임> 연속 사진 1878
1887년에 출간된 사진집 [동물의 이동 운동 Animal Locomotion]에는 781장의 사진이 실렸다. 이미지 2만개를 이용해서 총 781장의 대형 콜로타이프 사진들을 완성했다. 이 책 안에는 동물과 사람의 다양한 움직임을 담았다. 출간 이후,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로 명성을 얻는다.
<말을 움직임>이 나오고 십 년 뒤, 토머스 에디슨이 1인 시청이 가능한 최초의 초기 영화 영사 장치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ape)를 발명했다. 이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 최초 영화를 1895년에 만들었다.
머이브리지가 영향을 준 화가들
머이브리지의 움직이는 사진은 뒤샹에게 영향을 준다. 오른쪽은 머이브리지의 계간을 내려오는 여성 사진이고 오른쪽은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작품이다. 계간을 걸어 뒤샹은 공간과 시간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한 시점이 아닌 여러 가지 시점에서 바라보는 큐비즘적 방법을 이용한다. 여기에 뒤샹은 한 가지를 덧붙인다. 바로 시간이었다. 여러 가지 시간을 한 캔버스 안에 담았다. 움직이는 사람을 영사기 대신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좌) 에드워드 머이브리지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남자 사진 (우) 뒤샹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1912 캔버스에 유화
1913년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뉴욕에서 처음 전시회를 열었을 때,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누드는 어디 있고, 계단은 어디 있는가? 이게 무슨 누드인가? 단지 인체가 수직과 직선, 원통 같은 모양으로 표현되었고, 검은 선은 평평한 평면들을 담았다. 베이지 색과 갈색톤들이 뒤섞여 있다. 왼쪽에 살짝 녹색이 보이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머리 팔다리로 나눠져 있다. 인체를 추상화한 것이다. 뒤샹은 이렇게 말했다.
"해부학적 누드는 존재하지 않거나 최소한 볼 수 없다. 나는 완전히 자연스러운 누드의 모습을 버렸다. 단지 스무 개의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추상적인 선들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뒤샹은 사망하기 일 년 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누드>는 에티엔 쥘 마레(Etienne Julies Marey)의 영향이었다고 말했다. 마레는 생리학을 연구하기 위해 인체의 움직임을 연구한 생리학자였다. 신기하게도 마레와 머이브리지는 태어난 날짜와 사망한 날짜가 같다. 그리고 둘 다 평생 움직임에 대해 연구했다.
에티엔 쥘 마레
(좌) 에드워드 머이브리지 수건을 들고 걸어가는 여성의 사진 (우)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머이브리지의 사진은 피카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피카소 역시 머이브리지의 사진을 보았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여성은 왼손에 손수건을 들고 오른손은 머리 뒤로 뻗치고 있다.
피카소의 큐비즘과 마레, 머이브리지의 사진 연구는 이후 이탈리아에서 미래주의 Futurism를 탄생시킨다.
하나냐 하라리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누드> 캔버스에 유화 188x96.5cm, 이미지:www.artnet.com
머이브리지는 미국 작가 하나냐 하라리(Hananiah Harari, 1912-2000)의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누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라리는 스무 살 때 파리로 이주해 페르난제 레제 아래서 2년 동안 공부했다.
(좌) 프란시스 베이컨 <Two figures> 1953 (우) 에드워드 머이브리지 <레슬링 하는 남자> 사진 중 일부분 1884-1885 머이브리지의 걸어가는 사람, 복싱, 레슬링 등 다양한 사진은 20세기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프랜시스 베이컨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왼쪽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Two figures>에 두 남자의 자세는 오른쪽에 머이브리지의 레슬링 하는 남자 사진에 영향 받았다. 두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고 시체처럼 푸른색 피부 그 위로 떨어지는 수직선들, 쾌락과 고통을 표현하는 듯한 벌린 입, 성과 본능, 더 나아가 죽음을 표현했다.
게이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절, 베이컨의 남자친구 피터 레이시 집에 베이컨이 머무는 동안 완성한 작품이다.
베이컨은 이렇게 표현했다. "미켈란젤로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가 함께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머이브리지로부터 자세를 배우고, 미켈란젤로로부터 인체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내 안에 얽혀 있는 머이브리지와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어떤 것인지 풀어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1950년대 미니멀리즘, 개념 예술의 대표적인 작가인 솔 르윗(Sol Lewitt)은 뉴욕에 머물면서 처음 머이브리지 사진집을 봤다. 사진집에 반한 르윗는 맨채튼 서점들을 들어가 머이브리지 사진들을 찾아 다녔다.
2019년 가을 뉴욕 크레이크 스타 갤러리 Craig F. Starr Gallery에서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와 솔 르윗> 전시회가 열렸다. 솔 르윗의 회화에 나타난 머이브리지의 영향을 보여주는 첫 번째 전시였다.
솔 르윗 <Muybridge I > 1964 검은색 칠해진 나무 243.8x26.7x26.7cm ⓒCraig F. Starr Gallery소장
르윗의 이 작품 이름은 <머이브리지 1>이다. 머이브리지 이름 딴 이 작품은 검은 나무에 작은 열개의 구멍이 뚫려있다. 관객은 작은 구멍을 가까이 대고 보면 여성의 나체 사진을 볼 수 있다. 르윗이 사진에 대해 관심 있게 실험하던 시기에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을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전시할 때, 박물관 관장인 엘리자베스 브룬(Elizabeth Broun)은 이 작품을 전시회에서 내렸다. 여성들에게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작품이라고 비난했다. 나중에 다시 작품을 반납하긴 했다. 당시 예술계는 성을 다룬 도발적인 작품들로 논쟁이 심할 시기였다. 이를 두고 르윗는 자신이 이 같은 공격을 받는 마지막 작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과 머이브리지가 사회적 비난을 받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솔 르윗 <Schematic Drawing for Muybridge II from Artists & Photographs> 1969 offset lithograph ⓒMOMA
머이브리지가 살아있을 당시, 머이브리지의 누드 사진 작품들은 필라델피아에서 금지되었다. 머이브리지는 과학자들과 다른 유명한 지성인들에게 자신의 사진은 포르노가 아니라는 탄원서에 서명을 받아야만 했다. 누드와 벌거벗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생활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것은 그 시대에 충격이었다.
솔 르윗 <달리기> 1962
머이브릿지는 많은 부분 연속적인 시리즈 작업이다. 개념적으로 작업한다. 그의 작업은 유럽, 미국, 파리, 런던을 오가며 만들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대 생활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은 첫 번째 선구자였다. 머이브리지의 업적은 순간 움직이는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인간과 동물들의 움직임을 연속적인 화면으로 이미지를 찍어냈다.
참고문헌
Alan J. Clayton Whiting with the Words of Others: Essays on the Poetry of Hans Magnus p.121
Bodo Rosenhahn, Reinhard Klette, Dimitris Metaxas, edits Human Motion: Understanding, Modelling, Capture, and Animation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2008 p.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