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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진 May 25. 2020

세상에 대한 감정ㆍ필리다 발로우

Phyllida Barlow

[진화론]을 쓴 찰스 다윈이 고조할아버지이고, 할아버지는 빅토리아 여왕의 내과 의사였다. 화려한 가문의 이력을 가진 그녀는 런던 한복판 깨끗한 고급 주택에 살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온갖 나무와 철제가 가득한 먼지 나는 작업실에 하루 종일 머문다.


필리다 발로우 Phyllida Barlow. 아마 우리에게는 낯선 작가이다. 발로우 작품을 보려면 전통적 조각 이미지들을 버려야 한다. 1960년대 첼시 아트 스쿨을 다니던 20대 초반 드로잉을 시작했다. 창문, 평평한 면, 기하학적 무늬, 그것들은 자연이나 일상에서 본 모양들이었다.

Phyllida Barlow, Untitled, 2003Acrylic paint on paper558×760 mmⓒPhyllida Barlow

두꺼운 붓질로 아이 그림처럼 친숙한 느낌을 준다. 비슷한 크기와 모양들을 반복적으로 쌓거나 겹친다. 그녀의 드로잉은 조각적 드로잉 Sculptural Drawings이었다. 드로잉은 조각을 위한 것이었다. 발로우에게 드로잉은 작품 과정에 중요한 요소였다. 조각을 완성하기 전 머릿속에서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이런 드로잉을 이십 년 이상 계속했다.

Phyllida Barlow, Untitled, 1999 Acrylic paint on paper 637x897mm Tate소장ⓒPhyllida Barlow

드로잉 속 모양들은 조각 작품에 언어로 사용되었다. 1960년대 이후 그녀는 다룰 수 있는 물질 신체적 경험에 집중했다. 쌓고, 병렬했다. 대형 조각들은 전시실 안 공간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전시실 동선을 방해한다. 카펫, 시트, 마분지, 로프 끈 같은 생활 자재들을 사용했다. 이들 재료들은 콘크리트, 목재, 폴리스티렌, 포미카와 같은 것들로 고정했다. 전통적인 조각 작업이 아닌, 축적과 배열의 작업이다.


나는 내 작품에서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시간, 무게, 균형감과 같은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 있기 때문이다. 붕괴와 파괴, 접힘과 펼쳐짐, 늘어남과 줄어듦 등에 관심 있다.

Phyllida Barlow, untitled: upturnedhouse2, 2012 Softwood, plywood, hardboard, steel, expanded polyurethane foam, cement render and paint, 5000×4750×3225 mmⓒPhyllida Barlow, Photo:itsnicethat.com     


이 거대한 작품 <Untitled:upturnedhouse2>는 나무, 강철, 폴리우레탄, 시멘트로 만들었다. 겉은 패널 여러 겹이 들어갔다. 닫힌 모양은 전체적으로 균형 잡혀 보인다. 중간에 돌출된 블록이 보인다. 빨강, 노랑, 주황, 분홍, 회색 다양한 색상으로 칠했다. 이 작품은 조각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보여준다. 비싸지 않은 재료들과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을 쌓고 병렬하는 과정을 통해 물질을 변형시킨다.


1990년대 그녀는 오브제 사이의 공간에 집중했다. '그 공간이 관객에게 무엇을 주는가.' '어떻게 관객을 작품 주위로 움직이게 만드는가.' '서로를 어떻게 발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내 작품의 첫 관람객은 나 자신이다. 어떻게 내가 신체적으로 공간과 대화하는가는 작품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나의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사용할 공간이다.


Phyllida Barlow: untitled: 겹겹이 쌓인 의자 courtesy Hauser & Wirth Photo:itsnicethat.com

발로우는 우연성을 사용한다. 머릿속에서 계속 무엇인가 찾으려 한다. 우연성, 사건, 실수, 이런 것들을 모은 비논리적인 것을 좋아한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설계하지 않은 작품들이다. 조각은 건축물 안에서 장식이나 배경 역할을 하지만, 그녀의 조각은 건축물을 압도한다.

Phyllida Barlow:,untitled: dock: 5 stacked crates, courtesy Hauser & Wirth Photo:itsnicethat.com

나무가 철판 위에 꽂아있다. 짐들이 가득 쌓여 있다. 곧 쏟아질 듯 가득 차 무게를 겨우 견디고 있다. 발로우는 할머니의 선반을 기억한다고 했다. 할머니는 항상 선반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재사용했다. 할머니 선반은 초, 고무줄, 주전자 등으로 가득했다. 모든 것은 버릴 것 없이 사용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50년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사물들은 살아있는 물건이고 그것에는 버려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매끄러움도 부드러움도 없는 판자 더미 숲이다. 관객은 작품 주변을 배회하거나 몸을 숙인다. 때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아 아래로 지나가기 꺼려한다.

Phyllida Barlow, Untitled, photo:itsnicethat.com

발로우가 한 살 때 세계 2차 대전이 끝났다. 아버지는 여섯 살 꼬마 발로우를 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갔다. 파괴된 건물들을 보여 주었다. 폭탄 맞은 건물들은 그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은 기억 속 파괴된 건물들을 재현했다. 한쪽은 쏟아질 것 같은 덩어리들, 다른 한쪽은 이미 파괴되어 쌓여있는 잔해들처럼 보인다. 관객은 쓰러진 건물 앞에 서 있어 보지 못한 경험을 그녀 작품을 통해 느껴본다.  


65세 은퇴할 때까지 많은 후배들을 가르쳤다. 그중 레이첼 화이트리드 Rachel Whiteread처럼 세계적인 작가도 나왔다. 하지만 정작 발로우 작품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구매하는 사람도 없었다. 단지 몇몇 소수만이 작품을 보길 원했다. 은퇴할 때쯤 2000년 초반이 돼서 미술계는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봤던 큐레이터들이 초대장을 보냈다. 2014년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Tate Britain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2017년 73세 나이로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 작가가 되었다.

Phyllida Barlow, untitled: dock: emptystaircasehoarding, Courtesy Hauser & Wirth, Photo:itsnicethat.com     


왜 그렇게 늦게 미술계는 그녀를 알아봤을까? 저명한 터너상을 주는 영국 미술계도 나이 든 여성 예술가들을 평가하는데 소홀했다. 그들은 참신하지 않다고 고착화시켜 평가했다. 1900년대 초반 태어난 여성 미술가가 상을 받고 대형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질 확률은 남성에 비해 적었다.


열아홉 살 그녀가 런던 슬레이드 미술 대학에 들어갔을 때, 예술가로 성공한 서른 살 교수는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내 나이쯤 되면 집에서 아이 낳고, 쨈 만들고 있을 거야." "그게 뭐 잘못됐나요?" 그녀는 되물었다. 교수는 답하지 않았다. 1960년대 예술계는 남성이 대다수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여성은 특별한 존재였다. 발로우는 결혼 후 아이 다섯을 키우며, 조각을 가르쳤다. 조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했던 작품 중 일부분의 모습

Part of Barlow's installation at the British Pavilion in Venice. Photo:Ruth Clark/British Council /Courtesy the artist / Hauser & Wirth, photo from the Guardian


발로우는 사물을 보는 대신, 이해하라고 한다. 그녀의 조각은 혼란스러운 세상처럼 시각적으로 어지럽게 놓여있다. 가지런함은 없다. 대리석처럼 화려함을 주는 재료 대신 텅 비고 어두운 조각을 내밀며 겉을 보지 말고 내면을 경험해 보라고 권한다. 그녀의 조각은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거대한 거리와 시간의 요소들이다. 그녀는 빨간 점퍼를 보지 말고 그 안 솜털에 집중하라고 한다. 세상을 바꾸고 해석하는 방식은 예술가들에게 항상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그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미술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 안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집중하며 묵묵히 사십 년을 걸어왔다. 일 속에 '자기'가 없으면 욕망도 성취도 없다. 개인이 행복한 일들과 그런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사회를 바꾼다.



예술가의 역할은
세상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표현할 수 있고,  
세상에 대한 나만의 반응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 경우는
내 가족과 작업실이 나의 세상이다.
다른 것들에 비하면 작은 경험이다.

-발로우-






참고문헌

-Oliver Basciano, 'Feature: Phyllida Barlow' Art Review, no.39, March 2010, p.72

-Royal Acadmy of Arts documentary, When Lynn Barber Met Phyllida Barlow BBC Documentary 2017 - YouTube                                         

-https://www.tate.org.uk/art/artworks/barlow-untitled-upturnedhouse2-2012-ar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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