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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재 May 22. 2019

당신은 파이프를 보았지만 나는 파이프를 그리지 않았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시각적 인지는 종종 당신을 배반한다. 당신의 모든 통찰은 '경험적 배경'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교묘함이 바로 그 도구가 된다. 오늘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싶다.


1장 : 봤다고 하여 본 것은 아닙니다


 처음 미술관에 갔던 자신을 떠올려보자. 일단 나의 경우엔 먼저 내 앞의 그림을 발견하곤 전체적인 모습을 흘겨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솔직히 그림만 봐서는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현대 예술전'이었으니 초등학생의 어린 나는 도대체 어떤 형상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곧 '해설'로 눈을 돌렸다. 해설은 세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작품명, 작가,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미술관의 해설은 꽤나 친절하며 유익하다. 전문가들의 감수를 거친만큼 핵심이 쏙쏙 들어오도록 정리되어 있다. 이처럼 해설을 보고 난 후엔 곧 자신만만해진다. 마치 이 작품을 꿰뚫어보는 듯한 거만함도 느낀다. 시대적 배경부터 출발하여 작가의 일생까지, 참 많은 부분에서 작품을 다시 읽게 된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극단적이지만 한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미술관 그림에 파이프가 실물에 가까운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당신은 그림을 보자마자 그림이 '파이프'라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래를 보니 이게 왠걸. 뜬금없이 '다리미'라는 표제가 붙어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가?


 당연하게도 당신은 이를 '다리미'라는 표제를 가지고 재분석할 것 이다. 그림을 조목조목 다시 뜯어보며 어떤 의미에서 '다리미'였는지를 재해석할 것이다. 다리미에 대한 당신의 경험적 배경(지식 등)을 다시 끄집어내어 대조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끝내 그림의 본 의미를 깨닫고는 유레카!를 외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표제'와 '해설'이라는 '문학적 요소'가 당신의 인지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앞선 사례에서 '다리미'라는 표제가 없었다면 '다리미'라는 추론의 결과는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문학적 키워드가 제공해준 정보때문에 감상자가 해당 방향으로 유도된 것에 가깝다. 즉, 시각예술이 문학적 요소에 의존적이었다는 것이다.



2장 : 예술과 문학 사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

 예로부터 예술과 문학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작가의 아이디어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평론가들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평가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건축사 수업을 수강하던 중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건축가들의 가장 중요한 소양 중 하나가 문학성이라는 말씀이었다. 실제로 교묘한 글솜씨로 작품을 잘 서술함에 따라 작품의 위용이 변하기도 한다. 적어도 예술가 중에 글솜씨가 서툰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항상 예술을 분리하여 생각하지만 사실 철저하게 분리된 예술이란 찾기 힘들다. 많은 작품들에는 작가의 철학적 의도가 가미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문학적 요소를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중 바그너라는 음악가는 이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사람이다. 그는 서사성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독자적인 서사적 음악의 영역을 창조하였다. 회화에서도 문학적 서사성이 간혹 드러나곤 하는데 알레고리와 같은 그림이 주로 그렇다. 


 현대예술로 오면서 문학성의 비중은 더욱 커지고 있다. 갈수록 대중과 괴리가 커지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Xenakis와 같은 작곡가의 경우에는 별도의 해설서가 없으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조차 힘겹다. 문학적 요소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온 것이다. 



3장 : 인지의 배반 - 의존적 시각예술을 정의하다


 나는 오늘의 고찰을 통해 '의존적 시각예술'이 존재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근본적으로 현대 시각예술은 작품 자체로만 성립할 수는 없으며 문학적 뒷받침이 어우러져 비로소 참 의미를 찾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독자의 수준을 높이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기존의 평면적 인지를 넘어서 다방면의 인식을 종합적으로 어우르는 '입체적 인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난해한 예술의 등장의 예술의 대중성을 떨어뜨리긴 했으나 인류 지적활동의 최전선을 넓혀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당신이 본 게 무엇이든 '인지'를 과신하지 말 것. 또한 문학적 요소들이 뒷받침되어 현대 예술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 이 두가지로 오늘의 담론을 끝맺을 수 있을 것 같다. 관심이 있다면 마그리트의 작품을 추가로 검색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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