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누리는 건 당연한 게 아니다

뺏기고 후회하지 말고 뺏기지 않게 정신 똑바로 차리자.

by 수다인

1988년 초등학교, 당시로서는 국민학교를 들어갔던 그 해에 새로운 대통령이 그 해 2월 25일 취임했다. 고작 8살의 어린 애가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이나 정치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그에 대해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건 당시의 대통령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 종종 등장했다는 거다. <코미디 1번지>에서 코미디언이 현직 대통령으로 분장해서 현직 대통령이 강조했던 그 말, "저는 물같은 사람입니다." 혹은 "저는 보통사람입니다."라는 걸 똑같이 성대모사했던 게 기억난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린 나는 그게 그냥 웃기고 재미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나의 부모님과 같은 당시 어른들에게는 이는 파격 그 자체였을 거다. 대통령하고 비슷하게 생긴 연예인은 방송에 나올 수조차 없었던 상황에서 대놓고 대통령으로 분장해서 현직 대통령이 하는 말을 마치 개그맨이 인위적으로 유행어로 만들려던 건 대통령을 하늘이 내려준 절대권력자라는 걸 힘의 원리에 보여줘 왔던 시대를 살아왔던 그 분들께는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1988년 2월 25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제14대 대통령으로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총재가 1993년 2월 25일 취임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할 정도로 대중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그의 이름의 이니셜을 따 <YS는 못말려> 라는 만화 시리즈가 당시 <최불암 시리즈>와 더불어 대단히 인기를 끌었다. 국가 최고 존엄인 대통령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재현되는 것을 넘어 현직 대통령을 캐리커쳐로 하여 그가 일상에서 좌충우돌하는 코믹스가 유행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임기 말 외환위기가 발생하며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고, 그의 평생의 라이벌인 제15대 대통령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전임 정부에서 발생한 IMF 구제금융 국난 극복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평생 한국의 민주주의에 헌신한 김대중 역시 그의 오랫동안 대한민국 사회를 지속했던 권위주의를 해체해 나갔고, 지방분권으로 중앙정부의 권력 집중을 더욱 줄여나가고자 하였다. 다행히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동안 IMF로부터의 해외 차관은 거의 다 갚을 수 있었고 외환위기는 거의 극복될 시점이었다. 권위주의의 해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확대, 지방분권 확대 등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지만 최우선 과제가 경제 위기 극복이라는 국가적 재난 극복에 있었으므로 국민의 정부가 이룩해야 할 변혁은 차기 정부의 몫이 되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으로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2월 25일 임기를 시작하였다. 제16대 대통령은 내가 처음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투표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재임이 시작되자 마자 나는 공군에 입대했고 그렇게 29개월의 시간을 군대에 있었다. 그 사이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당시 괴로운 개인사를 보내던 나로서는 그가 왜 탄핵을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의 군생활이 끝나고 보니 대통령의 임기가 반이 지났다. 하지만 분명한 건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시기와 비교하면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시대는 불과 채 20년이 되지 않았지만 한국 사회가 대단히 개방적, 포용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아마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었을 거다. 황제를 황제로, 왕을 왕으로, 교황을 교황, 추기경을 추기경으로 부르는 게 불경의 소치이듯, 대통령 역시 대통령으로 부르는 게 대단히 국가 존엄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겨지며 대통령을 각하라고 부르던 시대는 제16대 참여정부에 사라져 있었다. 뉴스와 각종 언론매체에서 대통령은 대통령, 영부인은 여사라고 부르는 게 이 시기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맞나??) 호칭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호칭이 본질을 결정한다고 보는 나로서는 이는 권위주의를 철저히 해체하겠다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여겨졌다. 아울러 대통령은 말로만 "저는 보통사람입니다."를 외친 게 아니라. 대통령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인물로서 국민들을 대신하는 존재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존재며 대통령이나 청소 노동자나(이 분들에 대한 비하가 아님을 알아 주길 바란다) 전혀 다를 게 없고 사회에 각자의 방식으로 기여하는 존재라는 걸 강조해 왔다. 그렇게 한국은 불과 20여 년만에 전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한국은 어느 순간 아시아, 아니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힐만한 높은 수준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수준을 이룩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그 이후 다시 보수적인 정권이 제17대, 18대 정부를 구성하였다. 보수적인 정부 하에서는 그랬듯, 2000년대 초중반 이룩한 한국의 높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수준은 다소 후퇴하였다. 아무래도 보수적인 정부에서는 반대 성향의 정부보다는 아무래도 다소 경직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어쩌면 당연할 수 있는 결과였다. 제18대 정부는 끝내 정해진 5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그 이후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의 자리에서 탄핵 당하여 자리에서 공석이 된 대통령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5월에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고 2017년 5월 10일 제19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제18대 정부로 인한 국정 문란을 수습하고 국가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것이 목표였고 아울러 제17대와 제18대 정부 동안 대한민국의 후퇴한 자유주의, 민주주의 수준을 회복하는 것도 관건이었다. 그 이후 20대 대통령이 2022년 5월 10일 제19대 대통령의 뒤를 이었고, 오늘날 현재를 사는 모두가 아는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1981년 제12대 대토령의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전두환이 그 전 해에 개헌을 하여 성립된 제5공화국 시절에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 제6공화국, 오늘날 표현대로라면 87 체제 안에서 알아가고 있다. 나보다 선배 세대들은 제4공화국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심지어 내 아버지는 광복 전에 태어나셨으니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지금까지를 모두 경험 중이시다. 한편 내 후배 세대들 중 많은 수는 아마 제6공화국만을 경험했을 거다. 내가 말로는 제5공화국 시절부터 경험했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제5공화국 시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인근에 살았어서 어린 시절 매운 최류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우리 동네까지 번져 왔던 거는 기억한다. 어렸을 때는 그 냄새가 너무 맵다는 것만 알 뿐 그게 뭔지도, 왜 그런 게 바람을 타고 내 코까지 전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 더 컸을 때 서울특별시 시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게 아니라 시민들의 투표로 결정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훗날 그걸 지방자치제도라고 하는 것도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야 알 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민선 1기 서울시장으로 조순 시장이 당선되는 것과 그리고 조금 더 커져 고건 총리가 제2기 서울시장이 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이런 모든 변화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바로 그 해인 1988년 2월 25일 수립된 제6공화국, 일명 87체제가 수립되었던 그 이후였다.


이런 변화들을 뚜렷하게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기억하다보니 아마 나는 2030의 후배 세대들과는 다소 다른 가치관을 가진 것 같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들, 온갖 유형의 자유, 투표를 통해서 국가 총 책임자와 한 사람 한 사람이 의결 기관인 국회의원들을 뽑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된 민주주의, 내가 사는 지역의 단체장과 의원들을 뽑을 수 있는 지방자치, 지자체가 자기네들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곳곳에 공공도서관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는 지자체의 의사결정 권한이 보장받는 지방분권 등등은 자연스러운 권리가 아닌 우리 선배 세대들, 그 선배 세대들 중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안위,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는 희생을 하신 분들 덕분에 누리고 있는 거라는 걸 제6공화국, 지금의 87체제가 시작된 시점부터 봐왔던 나로서는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런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느끼는 이런 것들은 절대 당연한 게 아니라, 국민들이, 아니 나 같은 무임승차자가 아닌 행동하는 적극적 투사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고 나와 우리 부모님들은 그저 그걸 무임승차로 누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제6공화국만을 경험한 후배 세대들 역시 결국 마찬가지인 셈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면서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은 언제든지 쉽게 없어질 수도, 빼앗길 수도 있는 것들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고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따라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하루 아침에 뺏길 수 있다.


2025년 6월 현재,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느끼는 권리, 자유는 그저 얻어진 게 아니다. 그리고 그건 선배 세대의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얻게 된 거고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걸 아무런 비용 없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권리, 자유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가? 이러한 것들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그걸 뺏겨서 이를 더 이상 누릴 수 없을 때다. 그런데 그렇게 한 번 뺏긴 것을 다시 되찾아 오는 건 쉽지 않다. 다시 되찾아 오려면 과거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 큰 희생과 댓가라 필요할 수 있다. 그러니 제발 지금 2025년 6월 현재,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와 자유는 1988년 2월 25일부터 시작된 87체제, 제6공화국이 지난 약 40년 동안 오랫동안 공들여 이룩한 것들이라는 걸 잊지 않기를 나와 나의 후배 세대들이 꼭 알아주고 두고 두고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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