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싶지만 글은 쓰고 싶어

born to write or to be an author

by 수다인

지난 1년 동안 내 삶에 꽤 변화가 발생했다. 미술사,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원고를 작성하고 그 원고를 바탕으로 영상을 제작하고, 그 원고를 다시 이 브런치스토리에 올리는 관련 작가, 글쟁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2006년 미술과 관련한 글을 쓰는 미술잡지 기자가 되고 싶어서 2007년 미술사학으로 대학원 석사 과정에 진학하였다. 2009년 2월 석사학위를 취득할 때 쯤 목표는 서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연구자나 학자가 되는 걸로 바뀌었다. 미술에 관한 보다 학술적인 글쓰기와 연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하여 2012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책 정책연구기관에서 위촉연구원으로 일을 하게 되면서 현실과의 타협으로 문화 정책 연구자로 진로를 변경하였다. 그렇게 미술과 관련한 글 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 외면, 혹은 잊고 살다 작년 2024년 5월 더 늦어지기 전에 서양미술에 관한 유튜브를 하기로(youtubing)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미술과 관련한 원고를 쓰면서 차곡차곡 콘텐츠를 쌓아 나가는 작업을 1년 넘게 해오고 있다. 결국 그 당시, 20대 중/후반 정도에 하고 싶었던 걸, 40대 중반이 된 지금에서야 다시 하고 있는 거다. 안타깝게 그게 직업이 되어 경제적 소득을 창출하지 못하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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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에 관한 모든 수다, 수다인: www.youtube.com/@hysudain



나는 10대 후반 시절부터 무언가 글을 쓰는 걸 좋아했다. 과거 모뎀 시절, 나우누리의 음악 감상 동호회에 가입하여 대중음악의 음반에 관한 감상편을 꾸준히 올렸다. 당시 대중음악 산업은 CD가 주류인 음반 중심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싸이월드가 생겨나면서 지금의 개인 SNS, 블로그와 같은 매체가 등장하며 나만의 공간이 생겨났다. 그 곳에서 음반 감상평이나 영화감상, 혹은 전시회 후기 등을 올렸다. 그러한 행위는 이후 네이버 블로그가 등장하자 매체만 바꾸면서 이어나갔다. 내 20대는 그렇게 음악, 영화, 미술이나 미술전시 등 문화와 관련한 글 쓰기에 나름 몰두하였다.


30대가 되자 그러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한 활동이 경제적 수익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30살이 넘었는데 안정적인 직장이 없다 보니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면서 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마쳤던 나로서는 그 이후는 더 이상 부모님께 의지할 수 없었고 수익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생존에 필요하지 않은 활동들에 대한 지출을 줄여 나가는 게 가장 먼저이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전시장에서 전시를 보는 것도, 좋아하는 뮤지션을 음반을 사는 것도, 그렇다고 유료로 다운로드를 하거나 스트리밍 사이트에 유료 결제로 듣는 것도 포기했다. 문화와 관련한 인풋이 없는데 그 인풋을 바탕으로 한 경험으로 아웃풋을 생산해 내는 건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그렇게 문화 생활 없는 삶을 사는 게 익숙해지다 보니 나름 그 삶에 적응이 되었다. 다행히 음악은 유튜브라는 고마운 매체가 청취 본능을 충족시켜 주었지만...


30대에서 40대 초반에도 어쨌든 무언가 글을 쓰는 행위를 멈추지는 않았다. 문화와 관련한 다소 감상적인 글을 쓰는 20대 시절과는 달리, 30대에서 40대 초반에는 연구원이라는 직업때문에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고, 재능이나 능력이 1도 없는 전혀 다른 분야로 박사과정에 들어가 논리적이며 dry한 글을 완성하려고 발악을 하기도 했다. 물론 아쉽게도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연구 실적이나 그렇다고 박사학위논문이라는 박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도 아니니... 이 시기를 어떻게 보면 "잃어 버린 10년, 15년"이라고 해야 하나?


가시적인 성과물은 부족하지만 이 시기가 완전히 무쓸모했다고 하기도 어렵다. 논리적이고 나름 이성적인, 그리고 데이터에 기반을 둔 글을 쓰려고 노력으로 20대 시절의 글쓰기와 달리 지나치게 감성적이지 않게 글을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글을 어떻게 하면 사회과학적인 글처럼 쓸 수 있을까에 대해서 늘 고민을 해왔고, 인문학적 글에서 사회과학적 냄새를 풍기는 글을 쓰고 싶다는, 글쓰기의 전체적인 목표가 바뀌었다. 감성적이지만 지나치게 감성적이지도 않으면서 이성적인, MBTI에서 F유형이지만 T유형하고 착각이 들 정도의 딱 내 MBTI 유형에 걸맞게 INFJ 같은 문체를 유지하는 게 목표가 되었다.(INFJ는 F유형 중에서 가장 T유형적인 사고를 하는 유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20년의 시간을 지나 2025년 지금 이렇게 40대 중반의 찐 포티가 되었다. 20대 시절에 쓰고 싶었던 글을 쓰면서도, 그 글의 문체가 글쓰는 방식은 지난 "잃어버린 10년, 15년" 시절의 습성이 조화가 된 것 같다는 나름의 자평을 하고 싶다. 그 사이 <어떻게>는 바뀌었지만 <무엇을>은 바뀌지 않았다. 그 <무엇을>이 바뀌지 않은 채, 나름 순수했던 20대 시절의, 그 하고 싶은 거, 쓰고 싶은 거 쓰면서 사니, <무엇을> 자체가 바뀌었던 지난 "잃어버린 10년, 15년"의 30대, 40대 초반 시절과는 다르게 글 쓰는 게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게 느껴진다. 그래 나라는 사람은 어쩌면 글을 쓰는 거, 그 중에서도 20대 시절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했었던 그런 걸 쓰는 게 나의 존재 이유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텀블러에 커피 마시면서 맥북으로 작업하는 안경 쓴 30대 한국인 남자.jpeg


가끔은, 아니 꽤 종종, 내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새로 출발하기에도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무언가 경력이나 커리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봤을 때 그저 20년 동안 아무 것도 한 것도 이룬 것도 없는, 그렇다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가정을 꾸려 생계를 반드시 책임져야 할 가족 부양의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전 세계 80억 명의 인구에서, 아니 지구라는 단위까지 갈 필요도 없이, 5,000만 명의 대한민국 전체 인구에서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사라져도 아무 아쉬울 것 없는, 혹은 내가 오늘 당장 죽는다고 해도 아직 살아 계신 양친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슬퍼하지 않을 만한 그런 있으나 마나, 존재하나 마나 한 그런 인간이다. 말 그래도 죽지 못해 사는,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없이 비겁하기 때문에 그저 하루 하루 생존을 이어나가는 데, 그 삶이 결국 내 몸 혼자 생계를 온전히 책임질 수 최소한의 생산 활동 능력도 없는 낭비적, 잉여 인간일 뿐이다. 가혹하고 잔인할 수는 있지만 그게 나에 대한 객관적으로 판단 결과이다.


그렇게 날이 밝고 꾸역꾸역 또 다른 날을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그나마 유튜브를 하거나 혹은 유튜브를 하기 위해 원고 작성을 하는 것이야 말로 나의 가장 유일한 생산적인(productive) 활동이다. 1년 동안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는데 고작 구독자 150명 정도를 모았으면 남들이 봤을 땐 미련한 인간으로 보일 것이다. 그건 내가 유튜버로서 명백하게 실패했다는 증거이니 그냥 채널을 접고 다른 보다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만한 다른 일을 하거나 채널을 처음부터 아예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을만한 콘텐츠로 다시 시작하거나를 추천하거나. 수익 창출, 유튜버로서의 성공/실패 라는 관점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유튜브, 보다 엄밀하게는 유튜브를 하기 위해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미술과 관련한 글쓰기를 하는 그 작업 자체가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는 게 이 작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래 접을 땐 접더라도 하던 이 얘기는 마저 끝내야지 라던가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얘기는 하고 죽어야겠어 뭐 이런 생각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는 글을 쓰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최종 결과물이 나왔을 때는 나에게 놀랄만한 mental therapy를 선사한다. 아무리 내가 썼지만 어떻게 여기서 이런 얘기를 끄집어 내면서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지? 라고 하면서 조금 과한 자의식에 빠질 때도 있다. 남들에게는 웃길 수 있지만 글쓰기, 특히 미술과 관련한 글쓰기는 뭐랄까? 내가 삶을 지속할 수 있을만한 뭔가 원동력이자 내가 그래도 지구 상에서 아직 살아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 같다. 인간 개개인에게 삶의 특별한 존재 mission이 주어진다는 다소 종교 철학적 관점을 대입한다면 아마 내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건 이 얘기를 전달해서 최소한 한 두 명의 사람들에게라도 이를 알리라는 보다 더 큰 우주적 과업 때문인 건 아닌가? 이는 대단한 억측과 비약이라는 걸 잘 알지만 적어도 내 개인이 하루 또 하루를 살아내는 데 큰 힘이 되어주곤 한다.


161722.jpg Claudel, <L'Âge mûr: he Age of Maturity> (1898)


다른 사람은 죽고싶지만 혹은 우울하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고 한다. 나에게는 죽고싶지만 혹은 우울하지만 글은 쓰고 싶어 혹은 이 말은 하고 싶어, 이 글은 쓰고 싶어가 나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닐테지만 사람들 중 일부는 반드시 무언가를 하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는,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작곡을 하기 위해, 아이작 뉴턴(Issac Newton)과 알베르트 아이슈타인(Albert Einstein)은 물리학을 하기 위해,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와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는 철학을 하기 위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otti)와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은 조각을 하기 위해,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cellio)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소설을 쓰기 위해. 그렇다 내가 나열한 이들은 모두 특별한 사람들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나는 특정 누군가의 선민의식이나 특권성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들만 특별한 게 아니다. 평범한 누군가의 엄마, 아빠, 자녀는 그저 누군가의 엄마, 아빠 혹은 아들, 딸이 되어야 하는 그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할 수도 있다. 나에게는 평범한 충청도 출신의 남성과 전라도 출신의 여성 사이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나야 하지만 미술과 관련한 글쓰기를 해서 한 두 명의 사람들에게도 읽히라는 이유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로 나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나고,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닐까?


작가가 뭘까? 작가라는 개념에는 그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개념, 즉 생산자(producer)의 입장에서 출처하게 생산 과정(producing process)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가 쓴 글이 얼마나 읽혀지는지, 어떠한 반응일 불러일으키는지의 소비자(consumer)의 관점에서 소비에 관한 개념은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누가, 얼마의 사람들이 보고 어떠한 반응을 일으키는지와 상관없이 지금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글을 쓰는 나는 작가라는 개념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작가가 맞다.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맞는 거다. 어쨌든 10대 후반에서 지금까지 어떠한 형태의 글쓰기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으니. 그러니 나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이다. 그게 나의 정체성이다. C'est ma vie.


맥북으로 도서관에서 작업하는 짧은 머리의 30대 후반 한국인 남자.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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