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낙선전: 새로운 역사를 쓴 외젠 부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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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63년 《낙선전》
1863년 5월 15일 프랑스 파리(Paris)의 산업궁(Palais de l’Industrie: 현재의 그랑 팔레(Grand Palais))에는 그해 살롱 전시회(Exposition de Salon)에 입선하지 못한 작품들만을 별도로 모아 전시회가 개최됩니다. 살롱 전에 떨어진 미술가들은 나폴레옹3세(Napoléon III, 1808-1873)에게 자신들의 그림이 대중에게 공개되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탄원합니다. 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낙선전 Salon des Refusés》이 개최됩니다. 여기에는 366명의 화가들과 64명의 조각가 및 다수의 판화가와 건축가들의 약 780점이 전시되었습니다. 입선에 들지 못한 작품들의 수가 이 정도였다는 건 살롱 전시에 참가하는 미술가들이 대단히 많았음을 의미합니다. 《낙선전》은 살롱 전에 입선하지 못한 작품들만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전시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미술이 대중 스캔들의 원천이 된 최초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낙선전》에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1863)가 전시되었습니다. 파리 근교의 어느 숲속을 배경으로 총 네 명의 젊은 남녀가 등장합니다. 숲속에서 젊은 남녀가 휴식을 취하는 건 이미 지오르지오네(Giorgione, 1477-1510),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1576)의 “아르카디아(Arcadia)”에 뿌리를 둔 오랜 전통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전라 혹은 반(半) 전라의 인물이 등장한 적은 있지만 신화 속 인물이나 알레고리(allegory)가 아닌 동시대 인물이 이렇게 나체로 등장한 예는 마네의 그림이 처음입니다. 누가 봐도 당시의 파리 여성(Parisienne)으로 보이는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등장하지만 그녀와 함께 앉아 있는 남성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의복을 갖춰 입었습니다. 심지어 이들 뒤에서 물에 들어가 멱을 감는 여성마저도 옷을 입고 있습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목욕을 할 때에도 여성은 저렇게 옷을 입은 채로 목욕을 하는 게 관례였고 자연 수원에서 목욕하는 것도 문제될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풀밭에 앉아 있는 여성이 왜 완전히 벗고 있는지 그 곁에 앉아 있는 남성들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전혀 개의치 않아 보이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은 어떠한 부끄러움이나 수치심도 없다는 듯 정면을 바라보기 때문에 오히려 관람자에게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선사합니다. 온통 수수께끼같은 이 그림은 당시 파리 중상류층의 도덕관념과 완전히 어긋난다는 이유로 대중들로부터 온갖 지탄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마네는 프랑스 미술계 최고 유명인사이자 난봉꾼이 되어버렸습니다.
1863년 《낙선전》에서 논란을 일으킨 건 제임스-맥닐 휘슬러(James-McNeil Whister, 1834-1903)의 <흰색의 교향곡 1번: 하얀소녀 Symphony in White, No.1: The White Girl>(1862)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살롱 전시회는 프랑스의 미술 이벤트지만 프랑스 미술가들만이 참가할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파리는 이미 당시에 유럽의 문화와 미술의 수도로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도 모여든 미술가들이 활동하였기에 누구나 출품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영국의 휘슬러는 그렇게 1863년 살롱 전에 <흰색의 교향곡 1번: 하얀소녀>를 출품합니다. 이 그림은 내용과 전혀 무관한 <흰색의 교향곡 1번>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 역시 특정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하거나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전달하며 완벽한 테크닉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덕적 의미나 교훈을 전달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캔버스 대부분을 흰색으로 덮어버린 이 그림을 처음 본 당시의 살롱 심사위원들은 이 그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난감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은 특정 대상의 재현이 아닌 색채를 활용하여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현대미술의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흰색의 교향곡 1번>은 modern art 역사에서 높이 평가됩니다.
1863년 《낙선전》에는 마네와 휘슬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실주의의 대표자인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훗날 인상주의 풍경화의 대표자로 평가받는 까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 등의 그림이 전시되었습니다. 팡탱-라투르는 마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와 귀스타브 까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와 같이 사실주의 계열의 인상주의 미술가입니다. 전위적(avant-garde)인 미술가·문학가들이 대거 등장하는 그의 대표작 <들라크루아에 관한 오마쥬 Hommage à Delacroix>(1864)에서 확인되듯, 그는 아방가르드한 예술가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토대로 프랑스 modern art 발전에 동참하였습니다. 팡탱-라투르가 평생 존경한 미술가가 있습니다. 그는 1898년 파리의 미술상인 귀스타브 탕플라에르(Gustave Tempelaere, 1840-1904)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었지만 1863년 《낙선전》 이래로, 늘 그를 존경해 왔습니다.”
앙리 팡탱-라투르가 말한 그는 1863년 《낙선전》에 참가한 미술가 외젠 부댕(Eugène Boudin, 1824-1898)입니다. 팡탱-라투르는 부댕의 부고 소식을 접한 후 탕플라에르에게 편지를 쓴 겁니다. 1863년 《낙선전》은 미술가 에두아르 마네의 전설이 탄생한 사건이자 모던 아트의 진정한 시작점으로 여겨집니다. 서양 미술의 한 획을 그은 사건에 부댕 역시 동참했고 이를 계기로 팡탱-라투르가 그를 존경하게 되었음은 부댕이 modern art 발전에 상당히 공헌했음을 시사합니다. 과연 부댕은 어떤 화가였을까요?
2. 어촌 마을의 시골뜨기 화가 부댕
외젠 부댕은 1824년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190㎞ 정도 떨어진 옹플뢰르(Honfleur)에서 태어났습니다. 옹플뢰르는 노르망디(Normandie) 지역의 칼바도스(Calvados)주의 작은 어촌입니다. 그가 11살이 된 1835년 가족은 노르망디의 센느-마리팀(Seine-Maritime)주의 항구도시 르 아브르(Le Havre)로 이주합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2살에 미술 공부를 시작합니다. 부댕은 1845년 르 아브르로 이주한 프랑스 자연주의 회화의 대표자인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와 친분을 쌓습니다. 당시에는 밀레가 아직 농촌마을 바르비종(Barbizon)에서 농부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낸 <이삭 줍는 사람들 Des glaneuses>(1857)이나 <만종 L'Angélus>(1859-1860)과 같은 걸작들을 쏟아내기 전이었습니다. 밀레는 자신처럼, 작은 시골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미술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부댕에게 파리 유학을 권유하였습니다.
결국 르 아브르 시의 장학금을 받는 데 성공한 부댕은 1851년 파리로 떠납니다. 그는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였을 뿐만 아니라,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의 학생 모사가(student copyist)에 선발됩니다. 외젠 부댕은 외젠 이자베이(Eugène Isabey, 1803-1886)의 문하의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자베이에게 지도를 받은 기간은 길지 않지만 이자베이는 부댕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자베이는 판화와 수채화 작업을 하였으며 유화로 풍경화를 전문적으로 그렸습니다. 이자베이의 영향으로 부댕은 풍경화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부댕은 파리 유학 불과 2년 만에 가족이 있는 르 아브르로 돌아옵니다. 당시 급격히 산업화·도시화 되어 가며 인구가 급증하던 파리의 번잡하고 각박한 생활은 한가로운 작은 어촌 마을 출신의 부댕에게는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부댕은 르 아브르의 바닷가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합니다.
3. 부댕의 1859년 살롱 전 데뷔
르 아브르로 돌아왔다고 화가로서의 꿈을 포기한 건 아닙니다. 그는 1859년 화가로서의 성공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살롱 전시회에 생애 처음으로 참가합니다. 살롱 전시는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 이벤트로서 살롱 전시에서 입선하면 프랑스 및 유럽 미술계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부댕은 다른 미술가들보다도 살롱 전시에서의 입선이 간절하였습니다. 부르주아 집안 출신의 마네, 드가나 까이유보뜨 혹은 중산층의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와 달리,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별도의 작업실조차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미술을 공부하고 살롱 전시에 처음 작품을 출품한 것도 35살로서 젊은 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선배 화가인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3-1824)가 불과 19살의 나이로 살롱 전에 처음 출품하고 심지어 대상까지 수상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부댕의 살롱 전 데뷔가 얼마나 늦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살롱 전시회의 입선이 간절했습니다.
1859년 부댕이 살롱 전시회에 출품한 그림은 <생뜨-안느-라-빨뤼의 청원 Le Pardon à Sainte-Anne-la-Palud>(1859)입니다. 그림은 가로 146.5㎝, 세로 86㎝로서 부댕의 그림 치고는 비교적 크지만 제리코가 살롱 전에 출품한 <군대를 지휘하는 기마병 Officier de chasseurs à cheval de la Garde impériale, chargeant>(1812)(가로: 266㎝, 세로: 349㎝)이나,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 The Stonebreakers>(1849)(가로: 257㎝, 세로: 165㎝), <오르낭의 매장 Un enterrement à Ornans>(1849-1850)(가로: 668㎝, 세로: 315㎝)과 비교하면 작습니다.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치하인 1667년 처음 개최된 살롱 전시는 루이15세(Louix V, 1710-1774) 시기인 1737년 왕실의 적극적이고 안정적인 후원을 받으며 정규화 되었습니다.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살롱 전시는 프랑스, 나아가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공모전으로 완전히 자리 잡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다수의 작품들이 출품됨에 따라 살롱 전시회가 개최되는 루브르 궁(Palais du Louvre)의 대화랑(Grande Gallerie)은 출품작들로 뒤덮혔습니다. 눈에 띄기 위해, 출품작들은 점점 대형화 되었고 주제는 더 극적이고 강렬해졌습니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560㎞ 정도 떨어진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의 작은 시골인 생뜨-안느-라-빨뤼(Sainte-Anne-La-Palud)에서 지역 주민들이 전통적인 종교 행사를 벌이는 장면은 특별히 흥미로운 소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화면 전체에서 사람들의 비중이 큰 것도 아닙니다. 그림의 절반 정도는 파란색 하늘과 지역을 상징하는 생뜨-안느-라-빨뤼 예배당(Chapelle Sainte-Anne-la-Palud) 및 주변 풍경 묘사가 차지합니다.
그림의 전면에는 대화를 나누거나 음식을 먹는 등 다양한 모습의 지역 주민들이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에 넓게 퍼져 있지만 이 그림은 이 종교 행사 동안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다는 생뜨-안느-라 빨뤼 예배당과 이 시골마을의 맑고 깨끗한 자연풍경이 중심인 그림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인물들이 배제된 순수하게 풍경만을 그린 풍경화는 아니지만 <생뜨-안느-라-빨뤼>는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처럼 풍경과 당시 민초들의 평범한 일상이 동시에 제시된 전통적인 풍경화 계보를 따릅니다. 묘사된 사람들의 모습으로 관람자들의 시선을 좀 더 붙잡아 둘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제리코의 <군대를 지휘하는 기마병>,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이나 <오르낭의 매장>과 달리, 인물들이 화면 전체를 장악하지 않기 때문에 <생뜨-안느-라 빨뤼의 청원>은 이목을 끌기에 불리했습니다.
그럼에도 부댕의 작품은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로부터 호평을 받습니다. 시인이자 살롱 전시회의 공식 비평가로서 활동한 보들레르는 오늘날 「현대적 삶의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1863)라는 에세이로 19세기 modern art 미학의 선구자로 칭송받습니다. 그 글에서 보들레르는 현대사회의 미술은 동시대의 삶을 주제로,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내야 한다는 파격적인 예술론을 제시합니다. 그의 주장은 1859년 살롱 비평을 비롯한 이전의 비평문에서 이미 나타납니다. 보들레르는 1859년 살롱 전의 무수한 작품 중 <생뜨-안느-라 빨뤼의 청원>에 주목합니다. 대기와 물에 대한 표현이 독창적이며 마치 마법을 보는 것 같다고 평가한 보들레르는 부댕이 현대사회의 화가가 될 수도 있다고 기대합니다.
<생뜨-안느-라-빨뤼>는 부댕이 1856년부터 사실주의 화풍을 수용하였으며, 1859년에는 쿠르베와 친분을 쌓았다는 걸 입증해주듯, 사실주의 혹은 그 이전의 신고전주의처럼 윤곽에 대한 묘사가 뚜렷합니다. 그가 구현한 색채는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변하는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의 그림들을 연상시킵니다. 파리 유학 시절 루브르 박물관의 학생 모사가 발탁은 그가 푸생의 그림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왕실이 소장한 미술품들을 기반으로 형성된 미술관입니다. 1648년 프랑스 왕실은 미술 전담 부처인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를 설립하며 고전주의를 목표로 푸생의 미술을 프랑스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설정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프랑스 왕실은 루이14세 시대부터 푸생의 작품들을 꾸준히 수집하였으며, 루브르 박물관은 개관 초기부터 푸생의 양질의 컬렉션을 구축하였습니다. 부댕은 학생 모사가 자격을 얻어 푸생의 작품들을 직접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었고, 그가 푸생의 그림들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음은 부댕이 1859년 살롱 전시회에 출품한 <생뜨-안느-라-빨뤼>를 통해 드러납니다. 이처럼 부댕은 커리어 초반, 푸생의 고전 양식에서 19세기의 당대의 사실주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회화의 영향을 골고루 수용했습니다.
4. 더 세련되고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야 해!
1859년 <생뜨-안느-라-빨뤼의 청원>이 보들레르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프랑스 살롱 전시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였지만 부댕은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부댕은 <생뜨-안느-라-빨뤼>가 결점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기가 원래 의도했던 대로 그림이 완성되지 못했다며 더 세련되고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질책합니다. 이러한 자기비판은 부댕이 1860년대 새로운 도전을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살롱 전시에서 한 번 성공했다고 미술가로서의 향후 성공이 완전히 보장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당시 프랑스 미술계는 치열했으며 부댕은 다른 누구보다도 화가로서의 성공을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화가로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는 화가로서의 커리어를 지속할 수 없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부댕은 1860년대 서양미술 사상 최초로 해변가에서 여가를 즐기는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는 실험을 감행합니다.
- 이야기는 2부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