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녀에서 국모로 그리고 희대의 악녀로 여전히 고통받는 여인의 이야기
본 내용은 유튜브 "미술에 관한 모든 수다, 수다인" 채널에서 영상으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마리-앙투아네트와 자녀들의 초상화" 그림 이야기: https://youtu.be/mtVMMhYEbzo
▶ 수다인 공식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hysudain
1.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 나타난 목잘린 귀부인
역대 올림픽들과 마찬가지로 2024 하계 파리올림픽 역시 호스트 국가와 도시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개막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올림픽 개막식은 과도한 PC주의가 어떠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벤트였다고 평가됩니다. 그런데 더 기괴한 건 로코코(Rococo) 풍의 빨간 드레스를 입은 목 없는 여인이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들고 립싱크(Lipsync)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아무리 문화와 예술의 나라로서 프랑스대혁명과 자유(liberté)를 자국의 자랑스러운 문화 유산으로 보여주려는 건 이해가 되지만 이는 단순히 기이함을 넘어 보기에 따라 불쾌감을 조성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한편,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은 것도 억울한데 2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프랑스와 전 세계에서 조롱과 웃음거리의 대상이 된 비(非)프랑스인인 프랑스 왕비가 불쌍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비록 10초 남짓의 분량이었지만 대부분은 이 목이 잘린 여성이 누구인지는 알아차렸을 겁니다.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지”라는 무지성 발언으로 역사상 가장 골빈녀 취급을 받는 마리-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1755-1793)입니다. 그녀는 부르봉(Bourbon) 왕조의 다섯 번째 군주인 루이16세(Louis XVI, 1754-1793)의 왕비입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발생한 이후 부군 루이16세 및 자녀들과 함께 베르사유궁(Château de Versaillles)에서 파리 튈르리궁(Palais des Tuileries)으로 강제 압송되었고 해외로 망명하려는 야밤도주가 실패하여 남편과 똑같은 방식으로 1793년 10월 16일 죽음을 맞이한 마리-앙투아네트는 프랑스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인 왕비에서 나라를 망친 요녀(妖女)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가장 비천한 여인으로 전락하였습니다.
2. 신성로마제국의 황녀, 프랑스의 왕비가 되다!
마리-앙투아네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녀였던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여성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황녀 시절 그녀의 본명은 마리아-안토니아(Maria-Antonia)로서 부황은 프란츠1세(Franz I, 1708-1765)이고 모후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마리아-테레지아(Maria-Theresia, 1717-1780) 여제입니다. 황제와 여제 사이에는 총 16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마리아-안토니아는 막내딸로서 황제와 여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프란츠1세의 붕어 이후, 마리아-테레지아 황후가 아들인 요제프2세(Joseph II, 1741-1790)와 공동통치하는 가운데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와의 오랜 적대 관계 청산을, 프랑스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양국의 협력이 불가피한 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결국 여제 마리아-테레지아는 자신의 막내 딸 마리아-안토니아와 프랑스의 왕 루이15세(Louis XV, 1710-1774)의 손자인 루이 왕세손(훗날의 루이16세)과 정략결혼을 합니다. 그렇게 1769년 당시 14세였던 마리아-안토니아는 자신보다 한 살 연상의 루이 왕세손과 결혼하기 위하 고향인 신성로마제국의 빈(Wien)을 떠나 프랑스로 결혼이민을 떠납니다. 루이 왕세손과 혼인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입성하면서 그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녀에서 프랑스의 세손빈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차기 국왕의 부인으로서 별세 이후, 비어져 있는 프랑스 왕비의 자리에 오를 여인이 되었습니다. 차기 프랑스 국모(國母)로서 프랑스에 뼈를 묻을 사람이었기에 마리아-안토니아라는 독일식 이름에서 프랑스식인 마리-앙투아네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본명보다는 마리-앙투아네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됩니다. 1774년 5월 10일 64세의 일기로 루이15세가 승하하자 예정대로 프랑스의 왕위는 왕세손 루이에게 계승되었고, 루이15세의 부인인 마리아-레슈친스카(Maria-Leszczyńska, 1703-1768) 왕비의 하세 이후 무려 6년 동안 비어져 있는 프랑스 왕비의 자리는 세손빈 마리-앙투아네트에게 무사히 넘어갔습니다.
3. 1778년 초상화: 젊고 아름다운 프랑스 새 왕비, 마리-앙투아네트
프랑스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었던 그녀는 여러 초상화를 남깁니다. 18세기 활동하였던 여성 직업화가 중 가장 유명한 엘리자베트 비제-르 브렁(Élisabeth Vigée-Le Brun, 1755-1842)은 초상화 전문화가로서 마리-앙투아네트의 초상화 작업에 여러 번 참여합니다. 어려서부터 미술적 재능을 보여온 엘리자베트는 아버지로부터 어깨넘어 미술을 배웠지만 그녀는 역경을 견뎌내고 직업 미술가가 될 수 있었고 1776년 화가이자 화상이었던 장-밥티스트-피에르 르 브렁(Jean-Baptiste-Pierre Le Brun, 1748-1813)과 혼인하며 남편의 성을 따라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렁이 됩니다. 초상화 부문에서 재능을 타고난 비제-르 브렁은 프랑스의 18세기 초상화에서 가장 뛰어난 미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 그녀의 재능을 마리-앙투아네트는 정확하게 알아보았으며 오늘날 마리-앙투아네트의 주요 초상화로 알려진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비제-르 브렁의 손에서 탄생하였습니다. 그만큼 마리-앙투아네트 왕비와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렁은 모델 혹은 후원자과 미술가 관계로서 18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계에서 가장 훌륭한 콤비를 이루었습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렁은 마리-앙투아네트 왕비의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1778년 제작합니다. 가로 193.5cm, 세로 273cm로서 엄청난 크기의 이 작품은 오늘날 미국 뉴욕시(City of New York)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왕비의 단독초상화로서 그녀는 파팅케일(farthingale)을 넣어 한껏 부풀려진 치마와 하늘 높게 치솟은 가발과 머리 장식을 한 모습입니다. 거대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실내에서 왕비의 뒤편의 단 위에는 루이16세의 흉상이 놓여 있습니다. 그 앞이자 왕비의 왼편으로는 붉은색 천이 덥힌 테이블이 있고 그 위로 왕관이 놓여 있습니다. 그녀가 프랑스의 왕비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화려한 의복과 루이16세의 조각상과 왕비의 왕관 등의 기물들로 보았을 때 이 초상화는 프랑스의 왕비인 마리-앙투아네트 드 부르봉에 대한 공식 초상화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4. 1786년 초상화: 평범한 엄마, 마리-앙투아네트
세월이 흘러 루이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 사이에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왕과 왕비는 부모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자녀들과 함께 하는 마리-앙투아네트의 초상화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1786년 스웨덴 출신의 베르트뮐러(Adolf-Ulrik Wertmüller, 1751-1811)는 엄마가 된 마리-앙투아네트의 모습을 그립니다. 1778년 루이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 사이에는 첫째 딸 마리-테레즈(Marie-Thérèse, 1778-1851) 공주가 태어납니다. 하지만 중세 시대 때 제정된 "살리카 법(Lex Salica)"로 인하여 프랑스는 여자가 상속을 받을 수도 왕위를 계승할 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불안한 후계 문제는 1781년 장남 루이-조제프(Louis-Joseph, 1781- 1789)가 태어남으로서 해결되었습니다. 당시에는 5세 이전의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는데 루이-조제프 왕자는 마의 5세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를 기념할 목적인 듯 베르트뮐러의 초상화에서 마리-앙투아네트 왕비는 장녀인 마리-테레즈 공주과 장남인 루이-조제프 왕세자와 함께 등장합니다.
왕비의 오른편에는 공주가 장미 꽃송이를 든 채 동생 쪽을 바라보고, 왼편에는 왕세자가 한 손에는 모자를, 오른손에는 어머니의 치마를 붙들고 서 있습니다. 마리 왕비는 왕자의 팔위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있으며 정면을 바라봅니다. 화려한 팔찌와 반지를 끼고 있으며 모자를 쓰고 있지만 1778년 제작된 공식 초상화와 비교하면 매우 수수하며 공식 의복도 아닙니다. 1786년 초상화는 1778년 왕비의 공식 초상화와 배경마저도 다릅니다. 마리-앙투아네트와 그녀의 딸과 아들은 녹음이 우거진 숲 한가운데의 실외에 나와 있습니다. 그림의 오른편 뒤쪽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코린트식(Corinthian)의 열주로 장식된 아이보리 색 건물이 보입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이 건물을 증거로 그림의 배경이 베르사유 궁전 권역 내 프티-트리아농(Petit-Trianon) 부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르사유 경내에는 별장식의 그랑-트리아농(Grand-Trianon)과 프티-트리아농이 존재합니다. 프티-트리아농은 소박한 르네상스식의 고전적인 건축 양식에 따라 설계되었으며 전면 파사드(facade)는 코린트식(Corinthian) 기둥으로 장식된 건물로서 1774년 루이16세는 프티-트리아농을 왕비에게 선물로 줍니다.
베르사유 궁의 번잡하고 허례허식과 가식적인 삶에 점차 환멸을 느낀 마리-앙투아네트는 프티-트리아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급기야 거의 본궁보다는 이 프티-트리아농에서 머물렀습니다. 프티-트리아농에서 그녀는 시골 아낙처럼 닭을 키우고 밭을 일구며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소박한 아낙네의 일상을 즐겼고 프티-트리아농은 그녀가 베르사유 경내에서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베르트뮐러의 그림은 마리-앙투아네트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에서 프랑스의 왕비가 아닌, 두 아이를 둔 평범한 귀족 여인으로서 살고 싶은 그녀의 욕망이 담긴 마리-앙투아네트에 대한 비(非)공식초상화입니다.
5. 1787년 초상화: 프랑스의 성스러운 국모(?), 마리-앙투아네트
베르트뮐러가 그린 그림이 마리-앙투아네트와 공주 및 왕세자에 대한 집단초상화가 그녀에 대한 비공식초상화라면 1년 후인 1787년 비제-르 브렁이 그린 집단초상화는 명백히 다른 성격의 공식초상화입니다. 1786년 집단초상화와 달리 이번에는 등장인물이 한 명 늘었습니다. 왕비는 의자 위에 앉아 있고 그녀의 무릎 위에는 갓난아이가 앉아 있습니다. 이 갓난아이는 1785년 태어난 루이-샤를(Louis-Charles, 1785-1795)입니다. 갓 태어난 둘째 왕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왕비의 오른쪽으로는 공주 마리-테레즈가 엄마의 오른팔에 안겨서 엄마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장남이자 왕세자인 루이-조제프는 모후와 누나, 동생과 조금 떨어져 의자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의자는 왕좌로서 초록색 천이 의자를 반쯤 덥고 있습니다. 초록색 천으로 반쯤 덥힌 옥좌, 그 뒤편 제단 위에 반 정도 묘사된 프랑스 국왕의 왕관 등은 아직 루이16세가 건재하지만 부왕의 사후 루이-조제프가 차기 프랑스의 국왕이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단초상화의 주인공은 마리-앙투아네트 왕비입니다. 그녀는 붉디 붉은 사틴 드레스를 입고 머리 위에도 깃털로 장식되고 쉬폰이 바닥까지 내려오는 화려한 붉은색 모자를 쓴 채 의자 위에 앉아 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이자 유럽의 유행, 패션, 사교의 중심지인 프랑스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답게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복장이며 붉은색 입술과 복숭아빛 볼터치로 공들여 단장을 한 모습입니다. 비제-르 브렁이 그린 1787년 초상화 역시 베르사유 궁의 실내를 배경으로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요소들이 화면 곳곳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그림이 마리-앙투아네트와 자녀들에 대한 공식초상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동시에 등장하지만 베르트뮐러가 그린 초상화와 달리, 비제-르 브렁의 초상화에서 마리-앙투아네트는 차기 국왕이 될 왕세자 그리고 얼마 전 태어난 왕자의 두 명의 아들을 낳은 프랑스의 왕비이자 공주와 왕자들의 모후로서의 공식 직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비제-르 브렁이 그린 두 점의 초상화는 모두 왕비에 대한 공식초상화이지만 각각 그 성격이 다릅니다. 1778년의 초상화는 프랑스의 왕비가 된지 4년 차가 된 스물 세 살의 젊고 아름다운 왕비의 아름다움과 건강함을 통하여 프랑스 왕국이 새로운 시대에 돌입했음을 선전하는 목적이라면, 1787년 초상화는 30대 초반의 성숙한 여인으로서 두 아들을 낳아 프랑스의 왕비로서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였고 프랑스의 국모로서의 이미지를 제시하려는 목적입니다. 의자 위에 앉아 갓난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 둔 모습은 당시 어린아이였던 루이-샤를 왕자의 모습까지 그리고자 할 때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지만 이는 의도된 선택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에도 여전히 기독교 권위와 전통이 강력하게 남아 있었고 당시 사람들은 의자 위에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 둔 모습에서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을 겁니다. 베르트뮐러가 그린 비공식초상화에서 마리-앙투아네트는 함박웃음까지는 아니지만 매우 행복한 듯 큰 미소를 보이지만, 비제-르 브렁이 그린 공식초상화에서 왕비는 작고 가볍게 희미한 미소를 보입니다. 자애롭지만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근엄함이 왕비에게서 느껴지고 왕비는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 즉 성모마리아에 비견될 정도로 보입니다.
모후 옆에서 모후의 오른팔에 기댄 마리-테레즈 공주 역시 어머니를 경외에 찬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데 공주의 모습은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를 찬양하는 종교화에서의 천사 혹은 아기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 집단초상화는 첫째, 새로 태어난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고, 둘째, 루이-조제프 왕세자가 차기 왕좌의 주인공이 될 예정임을 선전하며, 궁극적으로는 마리-앙투아네트 왕비가 프랑스의 성스러운 국모라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 그림입니다.
6. 루이16세는 폭군이, 마리-앙투아네트는 악녀가 아니다!
초상화를 통하여 마리-앙투아네트와 왕실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 메이킹 작업에도 불구하고 결국 1789년 혁명이 발생하고 폐위된 루이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폐위되어 목이 잘려 죽는 건 140년 전 잉글랜드의 찰스1세(Charles I, 1600-1649) 이후 처음입니다. 게다가 일반 백성들에 의해 왕정이 무너지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는 건 유럽 역사에서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쿠테타로 인하여 스페인의 이사벨2세(Isabel II, 1830-1904)가 망명하고 왕위를 아들인 알폰소12세(Alfonso XII, 1857-1885)에게 넘기거나 러시아에서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Романовы)의 니콜라이2세(Николай II, 1868-1918)가 폐위뒤어 총살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왕과 왕비는 프랑스의 루이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가 유일했습니다.
조선 시대 연산군(1476-1506)이 신하들의 반정(反正)으로 인하여 폐위 당하여, 로마 제국 시대의 네로(Nero, 37-68)나 카라칼라(Caracalla, 186-217)가 암살당하여 종신직인 군주의 자리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건 그들이 폭군이었기 때문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루이16세 역시 다른 군주들처럼 죽을 때까지 왕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다른 폐위 군주들처럼 폭군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게다가 그는 정치가들의 손이 아닌 백성들이 일으킨 혁명으로 인해 폐위되었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군주보다도 더 심한 폭군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폐위 당한 폭군들은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의 왕비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앙투아네트는 남편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한지 10개월만에 남편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 그녀를 흔히 희대의 악녀, 악녀 중의 악녀라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루이16세는 폭군이, 마리-앙투아네트는 악녀가 아닙니다. 마리-앙투아네트의 전기 작가인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루이16세가 기울어져 가는 왕국을 되살릴만한 능력은 부족했지만 폭군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매우 착하고 착실한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의 유럽의 왕들과는 달리 오히려 대단히 성실했습니다. 루이16세는 놀음, 파티와 파티와 같은 유흥을 멀리 했으며, 사냥과 같은 값비싼 취미 대신 소박하게 목공품을 만드는 취미를 즐기는 소박한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상들인 루이14세의 애인인 맹트농 후작부인(Marquise de Maintenon, 1635-1719)이나 루이15세의 연인이었던 퐁파두르 후작부인(Marquiese de Pompadour, 1721-1764)과 같은 공식정부(maîtresse-en-titre)는 단 한 번도 둔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다른 여성과의 혼외자도 없었고요. 그는 평생 오직 본처인 마리-앙투아네트만을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당시의 유럽의 군주들과 비교하면 대단히 가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마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왕실로 시집 간 이후 마리아-테레지아 여제는 편지로 딸에게 겸손과 검약을 끊임없이 조언하였습니다. 마리가 특별히 더 사치스러웠던 것은 아닙니다. 화려한 치장과 사치는 왕실만이 아닌 프랑스 귀족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재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재무대신들은 루이16세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당연히 왕비인 마리-앙투아네트도 알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왕실의 사치는 루이14세(Louis XVI, 1638-1715)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왕권은 가시적인 화려함과 사치로 돋보인다고 생각한 루이14세는 화려한 연회를 연이어 개최하고 사치스러운 의복을 걸치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루이14세 시대에 프랑스는 유럽 사교계를 주도하였으며 최첨단 유행과 패션의 종주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 왕실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유발하였습니다. 왕실의 이러한 전통은 18세기 루이15세 시대를 지나 루이16세 시대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약 100년이 넘게 누적된 재정 적자는 루이16세 시대 때 아무런 소득없는 미국 독립전쟁 지원 등에 참여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영국,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유럽의 패권국이었던 프랑스는 왕실의 재정이 여전히 굳건하다는 이미지 메이킹을 해야했습니다. 프랑스 왕실 여인의 화려하고 패션 아이콘으로서의 사치스러운 행동은 그 동안 프랑스 국왕의 공식정부들인 프랑스 출신의 여성들이 맡아 왔습니다. 하지만 루이16세는 공식정부가 없었고 그 동안 요부같은 프랑스인 왕의 애첩들 대신 외국인 왕비가 그.역할을 대신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존엄한 여인인 마리-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국가적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리아-테레지아 여제가 프랑스 왕실에 시집한 딸에게 딸에게 공부와 독서를 가까이 하라고 당부하였지만 당시의 왕족들과 귀족들은 노동뿐만 아니라 학문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특별히 그녀가 더 공부를 멀리하며 지능이나 학습 능력이 낮은 건 나이었습니다. 남편인 루이16세가 지극히 평범한 당시의 왕족들 중 한 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리-앙투아네트 역시 그저 유럽의 평범한 공주들 중 하나였습니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우월의식이 높았고 그 우월의식은 루이14세 이후 더욱 심해졌습니다. 루이14세의 왕비인 마리-테레즈(Marie-Thérèse, 1638-1683)는 스페인, 루이15세의 왕비 마리아-레슈친스카는 폴란드의 공주였지만 프랑스 궁정 사회에서 세련되지 못하고 아둔한 결혼 이주녀 정도로 취급되었습니다. 루이14세와 루이15세의 정실 왕비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두 왕의 첩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뮤지컬 <태양왕 Le Roi Soleil>의 중심 이야기는 루이14세와 공식정부인 맹트농 후작부인의 사랑 이야기이며, 루이15세의 공식정부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루이15세가 세련된 취향을 갖는 데 기여하며 18세기 프랑스 미술의 후원자/수호자로서 평가받습니다. 대조적으로 루이14세와 루이15세의 왕비들의 거의 거론되지 않습니다. 이 두 왕비들은 남편의 바람기에 관대하고 검소하였으며 후계자를 낳아 왕비로서의 본분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신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녀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며 보내 프랑스 사교계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나대지 않았다는 거죠. 그런데 마리-앙투아네트는 마리-테레즈 왕비나 마리아-레슈친스카 왕비와는 달랐습니다. 왕실의 후계자를 낳아 왕비로서의 본분을 다 하였지만 신앙심이 부족하고 놀기 좋아하여 적극적으로 사교계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뒤늦게 궁정의 가식적인 삶에 염증을 느껴 사교계와 거리를 둔 삶을 살았지만 이미 나빠진 이미지는 쉽게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7. 외국인 여자가 프랑스를 망쳤다!
외국인 왕비에게게 당대의 비극적인 사건의 책임을 덮어 씌운 건 마리-앙투아네트 뿐만이 아닙니다. 프랑스대혁명 발생 200년 전 프랑스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발루아 왕조(Valois) 시대에 구교와 신교의 극심한 종교갈등을 겪던 프랑스에서는 1572년 8월 24일 밤 파리에서 구교도가 신교도를 집단 학살하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Le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이 발생합니다. 오랫동안 이 집단 광기를 앙리2세(Henri II, 1519-1559)의 왕비이자 당시 프랑스 국왕인 샤를9세(Charles IX, 1550-1574)의 모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가 일으켰다고 알려졌습니다.
은밀하고 신중하지만 종교 문제에서만큼은 단호히 대처하려했던 그녀였기에 사람들은 성 바르톨레메 축일에 발생한 기묘한 대략 학살 사건의 책임을 그녀에게 떠넘겼습니다. 카트린 드 메디시의 전기 작가인 쟝 오리외(Jean Orieux)에 의하면, 그 사건의 배후에 카트린 드 메디시가 있음은 오해이며 프랑스 인들은 오래 전부터 기괴한 사건의 책임을 외국인 왕비에게 돌리는 습관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자국의 비극적인 사건에 관하여 특정 외국인의 잘못을 탓하는 게 프랑스 인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의 책임을 이탈리아 여자 카트린 드 메디시에게 뒤집어씌우듯, 프랑스대혁명의 책임을 오스트리아 여자 마리-앙투아네트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카트린 드 메디시 왕비가 사악한 마녀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듯, 마리-앙투아네트는 사치와 방탕, 무개념의 악녀 이미지가 덧씌여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위인이라고 떠받드는 사람들도 개인적인 삶을 들여다보면 알고 보니 상당히 이상한 사람이라는 게 오늘날에는 많이 알려졌죠. 모든 사람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마리-앙투아네트 역시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녀가 마리-테레즈, 마리아-레슈친스카 같은 프랑스의 전임 왕비들 보다 사치스러웠고 덜 어른스러웠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고 자식이 생기면서 철이 들고 자신의 행동을 고쳐나가듯, 그녀 역시 엄마가 되고 프랑스의 왕비로서의 삶에 익숙해짐에 따라 서서히 철이 들었습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스테판 츠바이트가 지적하듯, 그 시점이 늦었고 당시 프랑스 사회의 격변을 예상하고 감당하기에 그녀는 지극히 평범하고 어머니 마리아-테레지아 여제와 같은 비범함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평범한 마리-앙투아네트와 루이16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세상이었던 게 문제였습니다.
8. 여전히 고통받는 프랑스의 왕비, 마리-앙투아네트
오늘날에는 마리-앙투아네트에 대한 과거의 편견이 많이 바로 잡혔습니다. 그녀가 악녀도 아니고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으라는 말도 와전된 오해였음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 감독은 영화 <마리-앙투아네트 Marie-Antoinette>(2006)를 통해 외국인 왕비로서 마리-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실에서 겪었던 무시와 소외감과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에 집중하여 마리-앙투아네트에 관한 인식이 재고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들이 무색하게 프랑스 국민들에 의해 마리-앙투아네트는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올림픽 개막식에서 또 다시 전 세계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애롭고 위엄있는 프랑스의 국모로서의 모습을 담은 비제-르 브렁이 1787년 그린 초상화 속 붉은색 드레스와 같이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등장하면서요. 왕실이 몰락하고 프랑스가 혁명의 대혼란에 빠지는 데 그녀가 전혀 무관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녀의 과오보다 여전히 더 많은 비난과 고통을 받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프랑스의 비운의 왕비였던 마리-앙투아네트에 대하여 사람들이 더 이상 오해하지도, 희화화의 대상이 되지도 않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