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풍경을 그린 서양 최초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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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변을 그린 최초의 서양 화가 외젠 부댕
2025년도 더위 잘 버티셨나요? 9월 중순까지 더울 전망이지만 더위도 막바지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오래 지속되는 무더위로 인해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은 9월 14일까지 연장 개장할 예정이며 하루 평균 10만 명 정도가 방문할 걸로 추정됩니다. 무더위를 피해 계곡이나 산으로 떠나는 분들도 많지만 바다로 떠나는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해수욕장의 인기는 줄어 들었다고 하지만 해수욕장은 여전히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휴가지입니다. 해수욕장과 바닷가는 무더위를 피하는 최고의 장소로 생각되지만 해수욕장은 현대 문명의 산물이며 바닷가로 피서를 떠나는 문화 역시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문화라는 거 알고 계신가요? 해변에서 더위를 피하는 바캉스(vacances) 문화는 현대인에게는 매우 익숙하지만, 이러한 문화는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한 현상입니다. 해수욕 문화가 유행하면서 해변과 해수욕장이 개발되던 시기 외젠 부댕(Eugène Boudin, 1824-1898)은 해변의 풍경과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피서객들의 모습을 서양 미술 최초로 그린 화가입니다.
2. 1860년: 해변 풍경에 처음 주목한 부댕
1859년 살롱 전시회에 <생뜨-안느-라 빨뤼의 청원 Le Pardon à Sainte-Anne-la-Palud>(1859)을 출품하며 살롱 전의 공식 비평가인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파리 화단에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지만 부댕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풍경화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생뜨-안느-라 빨뤼>를 통하여 드러난 색채와 빛의 광학 효과 표현의 미흡함을 개선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1859년 살롱 전시 참여로 잠시 파리로 돌아왔지만 1860년 다시 파리를 떠나기로 합니다. 파리 유학 후에 그는 가족이 있는 르 아브르(Le Havre)로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출생지인 옹플뢰르(Honfleur)로 돌아갑니다. 옹플뢰르 역시 노르망디 지방의 영국해협에 위치해 있지만 르 아브르는 항구 도시, 옹플뢰르는 그보다 훨씬 작은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1835년 11살의 나이로 가족을 따라 르 아브르로 이주한 후 성인이 되어 다시 찾은 옹플뢰르에서 부댕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습니다. 옹플뢰르라는 작은 어촌 마을의 가난한 항해사의 아들로 태어나 르 아브르로 이주한 후에도 바닷가에서 작은 상점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부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그에게 바다는 가장 익숙한 장소였습니다. 바닷물의 색채, 빛과 대기, 구름의 미묘한 변화는 바닷가 출신이 아니면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생뜨-안느-라 빨뤼의 청원>을 완성한 후 마주했던 미술가로서의 한계를 자신에게 익숙한 바닷가 풍경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바닷가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해양화가(marine painter)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860년 옹플뢰르에서 그는 최초로 해변가 풍경을 그리는 시도를 합니다. 바닷가와 해변은 구분됩니다. 바닷가는 바다와 육지가 맞닿는 지형을 폭넓게 지칭합니다. 반면, 해변(beach)은 바닷물과 맞닿아 모래나 자갈 등이 퇴적된 지형이자 해수욕을 즐기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바닷가가 해변의 상위 개념이죠. 그는 1860년 처음으로 파스텔(pastel)을 이용해 옹플뢰르의 해변 풍경을 그립니다. 그러나 파스텔화로 해변가를 그렸다는 건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연습 작업이었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파스텔화와 수채화(watercolor)는 유화(oil painting)로 최종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연습용이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완성된 예술 작품으로 인정되지 못하였습니다. 유화는 여러 번 덧발라 수정할 수 있지만 매우 비싼 재료였습니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수채물감이나 파스텔로 미리 최종 작품을 그려봅니다. 이렇게 만든 수채화나 파스텔화의 몇몇 부분을 수정·보완한 후 캔버스에 유화로 최종 작품을 완성합니다. 수채화나 파스텔화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술애호가(amateur)의 수집이나 구매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였고, 심지어 미술가 자신조차도 굳이 보관할 필요를 못 느끼곤 하였습니다. 결국 대부분 최종 완성작인 유화만 남아 있어서 유화로 최종 작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수채화와 파스텔화가 활용되는 작업 과정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긴 역사로 인하여, 수채화나 파스텔화 작업을 하는 미술가들도 상당했지만, 미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수채화나 파스텔화 작업만으로는 미술가로서 인정받기 어려웠습니다. 미술가로서 인정받으려면 부댕의 스승이었던 외젠 이자베이(Eugène Isabey, 1803-1886)처럼, 수채화와 파스텔화 작업을 하면서도 유화 작업을 병행해야만 했습니다. 확실한 인정을 받는 건 유화 작품을 파리 살롱 전에 출품하고 입선시키는 겁니다. 당연히 살롱 전시에서는 수채화나 파스텔화는 출품할 수 없었으므로 해변가 풍경은 부댕에게 새로운 소재 발굴로서의 의미는 있지만, 파스텔화로만 제작되고 유화 작업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부댕이 해변 그림으로 파리 미술계를 공략할 의도는 적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1862년 <옹플뢰르 해변>: 유화로 된 최초의 해변 그림
1861년 잠시 파리로 떠났던 부댕은 1862년 다시 옹플뢰르로 돌아옵니다. 1862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옹플뢰르의 어촌과 항구 풍경과 함께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변가 풍경 그림을 병행합니다. 1862년 그는 처음 유화로 해변가를 그립니다. 미국 워싱턴 D.C.(Washington D.C.)의 내셔널갤러리(National Gallery of Art)에는 당시 부댕이 그린 해변 그림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비록 캔버스가 아닌 나무에 그렸지만 부댕은 유화로 옹플뢰르의 해변 풍경을 그렸습니다. 기본적인 구성은 이전의 <생뜨-안느-라 빨뤼>와 유사합니다. 그림은 크게 상부와 하부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채 상부에는 대기와 구름의 풍경이, 하단 부에는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생뜨-안느-라 빨뤼>와 비교하면 부댕의 색채 구사력이 보다 부드러워지고 감각적으로 진화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생뜨-안느-라 빨뤼>에서 대기와 광학적 효과의 구현에서 자신의 단점을 토로했던 그는 <옹플뢰르 해변 Beach Scene on Honfleur>(1862)에서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양한 명도를 지닌 구름을 세심하게 묘사하였습니다. 구름으로 절반 이상이 덥혀 있는 하늘 역시 빛과 구름으로 인하여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른 채도를 보여줍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바닷물의 색깔 역시 빛과 바람에 의하여 발생한 파도로 다채로운 색채를 보여줌으로서 그의 미술가로서의 테크닉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대단히 발전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옹플뢰르 해변>에서 주목할 요소는 그의 그림에서 최초로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도시 부르주아들의 모습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생뜨-안느-라 빨뤼의 청원>처럼, 그의 풍경화에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평범한 일상 혹은 지역의 전통 행사에 참여한 현지인들이 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1862년 옹폴뢰르로 되돌아 와 모래사장이 펼쳐진 지역의 해변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부터는 <옹플뢰르 해변>처럼 지역 주민들이 아닌 세련된 도시 부르주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 그림에서는 지역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흰색의 드레스에 짙은 초록색 숄을 두르고 푸른색 양산을 든 여인, 붉은색 셔츠에 무릎 높이의 반바지를 입고 파나마 모자를 쓴 채 강아지와 산책하는 남성, 아기와 함께 모래사장에 앉아 있는 젊은 아기 엄마, 양산을 쓴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성과 서 있는 여성들, 그림 오른쪽에 세 명의 남녀 등은 모두 세련된 복장으로, 더위를 피하기 위해 파리에서 북서쪽 바닷가로 여가를 즐기러 온 파리 혹은 도시의 부르주아 사람들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해변가에서 바닷바람이 선사하는 시원한 바람을 쐬거나 강아지와 산책을 하거나 바다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눕니다. 네 개의 간이 탈의실, 그리고 그림의 중앙에서 약간 벗어난 채 탈의실 뒤쪽에 홀로 서 있는 여인은 바다에서 수영을 하거나 물장구를 치려는 인물입니다. 노란색 수영모자, 흰색의 긴 원피스는 당시 여성들의 전형적인 수영 복장이었기 때문이죠. 그림의 왼쪽 후경에는 증기를 내뿜은 채 항해하는 배가 시선을 사로잡지만 그 오른편 앞쪽에는 해수욕을 즐기는 세 명의 모습이 작게 등장합니다. 오늘날 여름철 해수욕장에서 피서객들은 해수욕을 즐기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선탠을 하거나 산책을 하기도, 사람들과 앉아서 대화를 하기도, 아기들은 모래가 신기한 듯 모래 놀이를 하죠. 부댕의 <옹플뢰르 해변> 속 사람들의 행태는 해수욕장을 방문한 오늘날의 피서객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 그림은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옹플뢰르 해변에 더위를 피해 바캉스를 즐기러 온 도시의 부르주아 사람들을 그린 부댕이 처음 시도한 주제의 유화 그림입니다.
4. 1863년 《낙선전》: 부댕이 해변 그림으로 돌아선 계기
<옹플뢰르 해변>으로 부댕은 미술가로서의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해변에서 여가를 즐기는 당대의 파리 시민들의 모습이라는 전혀 새로운 주제를 개척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1863년 살롱 전에 이 새로운 회화를 출품하지 않았습니다. 부댕은 <옹플뢰르 항구 The Port of Honfleur>(1863)로 1863년 살롱 전에 도전합니다.
현재는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서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옹플뢰르 항구>는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에서 비롯되어, 클로드-죠셉 베르네(Claude-Joseph Vernet, 1714-1789)로 이어지는 해양풍경화(marine painting)의 계보를 따른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클로드-죠셉 베르네는 프랑스의 실제 풍경들을 묘사하면서 18세기 프랑스 풍경화, 그 중에서도 특히 해양풍경화의 전통을 확립한 미술가이자 카를 베르네(Carl Vernet, 1758-1836)와 오라스 베르네(Horace Vernet, 1789-1863)의 3대에 걸쳐 100년 동안 프랑스 화단을 주름 잡았던 미술 명문가를 이룬 장본인입니다. 파리 유학 시절 학생모사가로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을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었으므로 그는 바다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린 클로드-죠셉 베르네의 작품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연구하였을 겁니다. <옹플뢰르 항구>는 학생 시절의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입니다.
부댕은 클로드-죠셉 베르네의 계보에 따른 해양 그림인 <옹플뢰르 항구>를 제출함으로서 보수적인 살롱 전시회의 심사위원들을 공략하고자 하였지만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그 해 살롱 전시회에 입선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살롱 전시회에서 탈락한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1863), 제임스-맥닐 휘슬러(James-McNeil Whister, 1834-1903)의 <흰색의 교향곡 1번: 하얀소녀 Symphony in White, No.1: The White Girl>(1862)와 함께 부댕의 <옹플뢰르 해변>은 1863년 《낙선전 Salon des Refusés》에서 사람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야심차게 출품한 작품의 수상 불발은 가난한 미술가인 부댕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지만 그는 감당해야할 시련이라며 담담히 받아들였습니다. 좌절하지 않은 부댕은 1864년 또 다시 살롱 전에 도전합니다. 이번에는 보다 과감한 도전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 이야기는 3부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