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그림으로 프랑스 미술계를 사로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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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변 그림으로 미술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외젠 부댕: https://youtu.be/m7FWVoNEB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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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63년 살롱전: 아직은 떄가 아니야...
1860년 외젠 부댕(Eugène Boudin, 1824-1898)은 최초로 파스텔(pastel)로 해변 풍경을 그리고 1862년에는 해변에서 여가를 즐기는 도시 부르주아들을 그린 최초의 유화 작품인 <옹플뢰르 해변 Beach Scene on Honfleur>(1862)을 완성합니다. 1863년 2월 12일 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변에서 여가를 보내는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그해 파리 살롱 전시회(Exposition de Salon)에 출품하기 위해 작업한다고 밝혔습니다. 편지 내용에 따르면, 해변에서 보트 경기의 일종인 레가타(regatta) 경기가 벌어지는 풍경화였습니다. 하지만 부댕은 1863년 살롱 전에는 전통적인 해양풍경화(marine painting)인 <옹플뢰르 항구 The Port of Honfleur>(1863)를 제출합니다.
부댕은 레가타 경기가 진행되는 풍경화를 제출하지 않은 이유를 그림이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라 밝히지만 이유는 그 뿐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당시까지 해변 풍경, 특히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파리 및 도시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그린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게 큰 요인이었을 겁니다. 부댕은 보수적인 살롱 전시회의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기 위하여 안정적인 주제인 <옹플뢰르 항구>를 제출했지만 아쉽게도 1863년 살롱 전에 입선하지 못하였습니다. <옹플뢰르 항구>가 1863년 《낙선전 Salon des Refusés》에서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1863)와 함께 전시되면서 부댕은 확신하였을 겁니다. 마네와 같은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다는 걸.
2. 1864년 살롱전: <트루빌 해변>을 출품하다!
부댕이 1864년 살롱에 출품한 그림은 소실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부댕은 1869년 그림을 똑같이 다시 그렸다고 합니다. 로랑 마뇌브(Laurent Manoeuvre, 1956-)는 현재 미네소타(Minnesota)주 미니에폴리스(Minneapolis)의 미니에폴리스 미술관(Minneapolis Institute of Art)의 <트루빌 해변 Beach on Trouville>(1869)이 1869년 다시 제작된 1864년 살롱 출품작임을 밝혀냈습니다.
<트루빌 해변> 역시 기본적인 구성은 1859년 살롱 데뷔작인 <생뜨-안느-라 빨뤼의 청원 Le Pardon à Sainte-Anne-la-Palud>(1859)과 동일합니다. 풍경화가답게 그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상단부는 하늘 풍경 및 자연 풍경을, 하단 부에는 사람들이 수평으로 넓게 배치되어 있어 풍속화적인 풍경화입니다. 노르망디(Normandie)의 작은 바닷가 마을을 선택했지만 그림에서 바다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그렇지만 <생뜨-안느-라 빨뤼>와 비교하면 풍경의 비중이 대단히 커졌습니다. <생뜨-안느-라 빨뤼>에서 풍경은 그림의 절반 정도이지만 <트루빌 해변>은 2/3가 하늘 풍경입니다. 1860년 고향 옹플뢰르(Honfleur)로 돌아가 풍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풍경화가로서 정체성이 공고해졌음을 <트루빌 해변>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인물들의 비중은 그림 전체에서 줄어들었지만 인물은 <생뜨-안느-라 빨뤼>와 <트루빌 해변>과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생뜨-안느-라 빨뤼의 청원>은 작은 어촌 마을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현지 주민들이 지역의 전통 종교 축제에 참가한 모습입니다. 반면 <트루빌 해변>을 통해 부댕이 포커스를 맞춘 대상은 지역 주민들이 아닙니다. 그림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전통 복장을 입은 지역 주민들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노르망디의 작은 바닷가 마을로 피서를 즐기기 위해 파리 혹은 도시에서 몰려 든 부르주아들입니다. 현지인들의 전통적인 삶의 모습에서 파리 사람들의 여가 문화로 부댕의 회화적 관심이 바뀐 겁니다. 1860년 옹플뢰르에 정착하면서 어촌의 풍경과 어촌에서 생업을 하는 지역 주민들의 모습과 해변을 배경으로 여가를 즐기는 도시 외지인들의 모습을 동시에 그렸던 부댕은 1860년부터 자신이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주제를 1864년 살롱 전시회를 통하여 처음으로 공개하였고, 1864년은 해변에서 여가를 즐기는 도시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미술계에 공개적으로 처음으로 등장한 해입니다.
3. 노르망디 작은 어촌 마을들의 극적인 변화
트루빌(Trouville)의 정식 명칭은 트루빌-쉬-메르(Trouville-sur-Mer)로서 파리(Paris)에서 북서쪽으로 200㎞ 떨어진 노르망디 지방의 어촌 마을입니다. 트루빌 역시 옹플뢰르와 마찬가지로 칼바도스(Calvados) 주에 속하며 옹플뢰르와는 남서쪽으로 16㎞ 떨어져 있습니다. 영국의 소설가 캐서린 매쿠이드(Katherine Macquoid, 1824-1917)는 1877년 트루빌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곳은 40년밖에 되지 않은 역사가 매우 짧은 지역이다. 그리고 에트르타(Etretat)와 마찬가지로, 화가들과 작가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바닷가로 쏟아져 나온다. 트루빌은 이자베이 씨가 그림을 그리고 알렉상드르 뒤마가 지역에 관한 글을 쓸 때만 하더라도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하였다.”
매쿠이드의 증언에 따르면 트루빌은 19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18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트루빌은 작은 어촌 마을이었으며 도시 사람들이 거의 찾을 일이 없는 한적한 시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1830년대에서 1870년대 사이 트루빌은 부댕의 스승인 미술가 외젠 이자베이(Eugène Isabey, 1803-1886), 『삼총사 Les Trois Mousquetaires』(1844), 『몬테크리스토 백작 Le Comte de Monte-Cristo』(1844-1846) 등의 소설로 19세기 프랑스의 대문호로 평가받는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와 같은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이자베이와 뒤마는 한 살 터울로 이들이 예술가로서 맹활약을 펼쳤던 시기는 1840년대입니다. 맥쿠이드의 증언대로, 이자베이와 뒤마가 트루빌에 관한 창작 활동을 하던 1840년대만 하더라도 트루빌은 아직까지 작은 어촌이었습니다.
1839년 이자베이가 완성한 <트루빌의 어선들 Les Ecores de Trouville>(1839) 속 트루빌은 매쿠이드의 기록처럼 그저 경치 좋은 평범한 어촌 마을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거의 찾지 않는 한가로운 어촌마을에는 파도 소리, 물이 육지와 닿을 때 나는 소리, 갈매기나 물새들이 내는 소리만 들릴 뿐, 이 그림에서 사람들이 내는 왁자지껄한 소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자베이의 제자인 부댕이 25년 후에 완성한 <트루빌 해변>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의 유쾌한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자연이 발생하는 소리를 압도할 것 같은 활발한 분위기입니다. 이자베이의 그림에서 재현된 트루빌은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은 존재하지 않는 평범한 바닷가입니다. 그렇지만 부댕의 그림에서는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자베이와 부댕의 그림 모두 트루빌을 그린 그림이지만, 이자베이의 그림은 바닷가 그림(seascape) 혹은 해양풍경화(marine painting), 부댕의 그림은 해변 그림(beach scene)으로 전혀 다른 그림입니다. 같은 장소지만 25년의 격차를 두고 두 미술가가 전혀 다른 트루빌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었던 건 그 사이 트루빌이 평범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파리 및 도시 부르주아들이 여가를 즐기는 해수욕장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1830년대 말에서 1840년대 초반 평화롭고 한가로운 트루빌을 소재로 작업 활동을 했던 이자베이와 뒤마는 트루빌이 파리 사람들에게 여가 휴양지로서의 매력을 널리 알린 장본인들입니다. 이자베이는 파리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왕정복고 시기 1830년 프랑스 국왕의 자리에 오른 루이 필립(Louis Philippe, 1773-1850)의 궁정화가를 역임한 진정한 파리지엥(Parisien)이었습니다. 뒤마는 비록 파리 출신은 아니지만 1822년 파리로 이주하였고 소설가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후에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즐긴 신흥 부르주아의 전형입니다. 이자베이가 트루빌을 방문해 <트루빌의 어선들>을 그릴 당시만 하더라도 트루빌에서 세련된 파리지엥의 모습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자베이의 그림, 뒤마의 글을 통해 트루빌의 아름다운 풍경이 알려지면서 1850년대부터 트루빌은 파리지엥들의 사랑을 받는 휴가지로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4. 파리지엥들의 새로운 여가 문화의 탄생
에릭 샬린(Eric Chaline)은 『처음 읽는 수영의 세계사 Strokes of Genius: a history of swimming』(2017)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해안가 리조트가 될 지역으로서) 가장 성공한 곳은 해수요법과 모래사장, 그림 같은 풍경과 상쾌한 바닷바람, 거기에 유행하는 스파와 오락 시설, 사치스러운 숙박 시설이 모두 합쳐진데다가 (영국의) 브라이턴과 디에프처럼 자동차나 기차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유행하던 공중목욕과 수영을 이교도들의 난잡한 문화의 상징이라며 맹비난하였습니다. 실제 로마의 공중목욕탕에서는 성매매와 성행위가 자행되고, 수영은 보통 알몸으로 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목욕과 수영의 비도덕성을 주장하는 것도 억지는 아니었습니다. 나체 자체가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목욕은 옷을 입은 채 진행되어야 하며 수영은 아예 잊혀 졌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목욕이 전염병을 퍼뜨리는 주범이라고 주입하면서 사람들이 물과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바다 역시 어업과 무역 같은 생계 행위나 이동이나 전투 등의 이유가 아니면 내지인들이 굳이 찾아갈 곳이 아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는 고대의 문화가 복원되면서 물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었습니다. 먼저 담수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며 뒤이어 바닷물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바닷물은 질병의 치료나 예방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학적인 이유로 18세기 영국에서 계몽주의가 시작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합니다. 1730년대 영국의 작은 어촌 마을인 브라이턴(Brighton)에 지배계층의 해수 치료를 목적으로 리조트가 설립되면서 18세기 말에는 해안가가 해수요법을 위한 공간으로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바다 목욕이 1820년대가 되어서야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당시에도 사람들이 기대하고 올만한 해변이 없다는 이유로 리조트 개발은 수 십 년 동안 진전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185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프랑스에서도 해수욕을 즐기기 위한 해수욕장 개발이 시작되어 파리와 가까운 노르망디 지역이 주목을 받게 됩니다.
에릭 샬린의 지적대로, 철도 산업 붐은 19세기 중반 해수욕장 발전의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1830년대 철도산업을 부흥시킨 경험으로 1830년대 말, 프랑스에서의 철도 건설 사업을 주도합니다. 1837년 파리에 기차역인 생-라자르 역(Gare Saint-Lazare)이 개통되었으며, 1843년 파리에서 약 100㎞ 정도 떨어진 센마리팀(Seine-Maritime) 주의 주도인 루앙(Rouen)과의 철도가 놓입니다. 1847년에는 파리와 르 아브르(Le Havre)가 연결되었습니다. 르 아브르에서 옹플뢰르는 약 25㎞, 트루빌은 44㎞로 거리로서, 파리와 르 아브르와의 철도 개통으로 파리 시민들의 옹플뢰르와 트루빌 접근은 더욱 쉬워졌습니다. 철도 개통 전까지 수 세기 동안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나 지중해 연안을 선호하였으며 파리에서 더 가까운 노르망디 지역으로는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리-르 아브르 노선이 개통되면서 옹플뢰르와 트루빌과 같은 노르망디의 작은 어촌 마을에 관한 접근성이 대단히 개선되었으며 옹플뢰르, 트루빌을 비롯한 노르망디 지역의 풍경이 재발견되며 해변과 해수욕장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비교적 저렴한 철도 요금과 가까운 거리로 시간적 부담마저도 적음에 따라 파리의 부르주아들은 주말동안 노르망디의 루앙, 르 아브르, 트루빌, 옹플뢰르와 같은 곳들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곤 했습니다.
5. 해변 그림으로 1864년 살롱 전에 입선한 부댕
1850년대부터 파리와 노르망디 지역의 철도 개발로 파리지엥들의 여가 문화가 변하면서 작은 어촌 마을의 풍경마저 바뀐 상황을 부댕은 민감하게 알아차렸으며 자신이 관찰한 결과인 <트루빌 해변>을 1864년 살롱 전시회에 출품합니다. 그 결과 부댕은 해변 풍경 및 해변에서 여가를 즐기는 파리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그린 첫 번째 화가이자 이러한 주제를 대중에게 처음 선보인 화가라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트루빌 해변>은 까다로운 심사위원들의 기준을 통과하며 1864년 살롱 전시회에 입선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그렇지만 <트루빌 해변>은 단지 부댕이 여름철 무더위를 피해 해변에서 해수욕과 여가를 즐기는 도시 부르주아들의 모습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처음으로 살롱 전시회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했다는 미술사적인 중요성만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이 작품은 그가 왜 진정한 “인상주의의 아버지(Père de l’Impressionisme)”인지를 증명해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 이야기는 4부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