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 vs. 부댕: 인상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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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네주의자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는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탄생을 예고한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1863년 파리의 살롱 전시회(Exposition de Salon)에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1863)로 마네는 전위적인(avant-garde) modern art의 시대를 개창합니다. 이후 아방가르드 미술은 인상주의(Impressionism),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를 지나 20세기에는 야수파(Fauvism), 큐비즘(Cubism) 등을 거쳐 20세기 말에 이르면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로 이어집니다.
인상주의는 작게는 특정 미술 운동을 지칭합니다. 하지만 넓게는 인상주의 운동에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인상주의와 유사한 표현 양식을 보이는 미술가들을 통칭합니다. 미술 운동으로서의 인상주의는 18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지만 마네를 비롯하여 인상주의 운동을 주도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 등은 그 이전부터 살롱 전시회에 출전하며 파리 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마네라는 화가가 벌인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번에 프랑스 미술계의 악동으로 떠오른 마네는 자신의 악명을 즐긴다는 듯, 연이어 문제작들을 발표합니다. 선배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뒤를 이어 마네는 프랑스 미술계의 권위에 도전하며 기존 미술 헤게모니의 균열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마네의 도발적 행동에 영감을 받은 그 주변의 미술가들 역시 과감한 도전을 시도합니다. 마네를 비롯한 젊은 미술가들의 그림은 대상의 불분명한 윤곽 표현, 세련되지 못한 투박하고 거친 붓질 등의 표현적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이러한 표면적 특성에 주목하여 1860년대에서 1870년대 초반까지의 비평가들은 이들 미술가들을 마네주의자들로 불렀습니다. 당시 파리 화단에서 마네가 가장 유명 인사였기 때문이죠.
2. 비슷한 듯 다른 마네와 인상주의자들
마네를 유명인사로 만들어 준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본질적으로는 인상주의와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당시 파리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 건 단지 당대의 파리지엔(Parisienne)으로 보이는 여인이 부끄러움도 없이 전라의 상태로 남성들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모자라 당돌하게 관람자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불분명한 윤곽 처리, 세련되지 못한 투박하고 거친 붓질 등은 그림의 완성도 부족의 이유로 질타의 주요 요인이었습니다. 마네가 이런 표현 전략을 채택한 건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는 고전주의 특유의 매끈하고 마치 잘 빚은 도자기 같이 미술가의 붓질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림들에 환멸을 느꼈고 그림에서는 화가의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일부로 붓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도록 거칠고 투박한 붓질을 사용하며 주요 대상이 배경과 구분되기 어렵게 처리하였습니다.
모네를 비롯한 피사로, 시슬레, 르누아르 등 전형적인 인상주의자들이 거칠고 투박한 붓질로 윤곽을 불분명하게 묘사한 건 마네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인상주의자들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빛과 대기의 탐구에 몰두하였습니다. 빛과 수증기의 농도,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같은 대상이라도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발견한 인상주의자들은 대상에는 절대적인 외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시시각각 변화는 광학적인 인상(impression)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은 어느 시간, 어느 각도, 어떠한 조건에서 관찰하느냐에 따라 대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그림으로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자연에서의 광학적 효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회화 장르는 풍경화입니다. 인상주의자 중 상당수가 풍경화가이며 풍경화가 인상주의 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빛과 대기의 광학적 효과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미술가들은 터너(J.M.W. Turner, 1775-1851),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과 같은 19세기 초반 영국의 미술가들이었습니다. 경험주의 철학이 발달하고 계몽주의가 시작된 영국답게 19세기의 영국 미술가들 역시 과학의 시각에서 그림에 접근하였습니다. 광학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자가 실내에서 암실을 조성하여 실험하듯, 미술가들은 자연에서 직접 자연을 관찰하고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캔버스로 재현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미술은 과학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터너와 컨스터블은 자연을 관찰한 결과를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하여 캔버스를 들고 나가 야외에서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야외에서 이젤에 세워둔 캔버스 앞에서 유화로 그림을 완성하는 미술가의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완성한 1860년대 초반의 프랑스에서만 하더라도 이는 흔치 않았습니다. 물론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를 비롯해 이미 르네상스 시대에도 미술가들은 사실적인 자연 풍경을 담기 위하여 실경을 직접 관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케치북에 펜으로 스케치를 하거나 수채물감이나 파스텔로 간단하게 실경을 그릴 뿐, 최종 작업은 반드시 실내에서 유화로 작업하였습니다. 야외에 이젤을 세워두고 현장에서 유화로 그림을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자연은 주요한 요소이지만 마네 역시 전통 방식에 따라 실내에서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일명 인상주의자들은 마네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터너와 컨스터블처럼 광학적 효과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을 바로 캔버스에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림을 스튜디오에서 완성하는 건 큰 의미가 없었고 현장에서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바뀌기 전에 바로 완성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유화에서 단 한 번도 강조된 적이 없었던 속도(speed)가 처음으로 중요한 요소로 대두된 겁니다.
빠른 시간 내에 그림을 즉석에서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 드로잉은 시간만 잡아먹을 뿐 전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드로잉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림에서 드로잉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인상주의자들은 붓에 유화를 묻힌 후 바로 캔버스에 색을 덧칠하면서 윤곽을 구체화 시켜나갑니다. 4-5시간 안에 현장에서 그림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세밀하고 꼼꼼한 붓질, 매끈한 마감 처리 역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디테일에 신경 쓰면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현상의 시각적 특성이 사라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죠. 인상주의자들은 빛의 방향뿐만 아니라, 바람의 움직임까지 포착하기를 원했습니다. 바람에 의하여 흩날리다보면 대상의 외형은 흐트러지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에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이 거칠고 투박한 붓질을 활용하여 배경과 대상이 거의 구분되지 않는 표현 방식으로 나아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마네가 그림에서 미술가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한 화면을 요구해 오던 기존의 회화 질서를 도전할 목적이라면, 인상주의는 광학적 관심에서 출발하여 실시간으로 바뀌는 외부의 인상을 현장에서 즉석으로 완성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연에서의 “수렴 진화(convergence evolution)”처럼 유사한 표현 방식을 지향하게 된 겁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 후 1869년 살롱 출품작인 <발코니 Le Balcon>(1869)와 <아틀리에서의 아침식사 Petit déjeuner aux ateliers>(1869)에 이르기까지 마네는 실내에서 그림을 완성합니다. 1869년부터 마네는 외부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도를 하였으며, 인상주의가 등장한 후에는 다른 인상주의자들처럼 광학적 효과에 관심을 가지며 실외를 배경으로 자연광이 돋보이는 그림들로 완전히 넘어갑니다.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인 인상주의를 촉발시킨 건 마네지만 마네는 인상주의가 탄생한 이후에는 오히려 인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게 됩니다.
3. <트루빌 해변>: 부댕이 인상주의의 아버지인 이유
1864년 살롱 전시회에 출품된 외젠 부댕(Eugène Boudin, 1824-1898)의 <트루빌 해변 Beach on Trouville>(1869)은 1863년 발표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완전히 다릅니다. 1860년 고향 옹플뢰르(Honfleur)로 돌아간 후, 부댕은 풍경화가답게 빛과 대기에 의한 광학적 효과를 본격적으로 탐구합니다. 그 성과는 이미 1862년의 <옹플뢰르 해변 Beach Scene on Honfleur>(1862)에 나타나며 <옹플뢰르 해변>에서 자신의 연구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은 결과가 1864년의 살롱 출품작인 <트루빌 해변>입니다.
비록 해변에서 여가를 즐기는 파리 부르주아들의 모습이라는 전혀 새로운 주제를 보여주지만 이 작품은 풍경이 더 중요한 그림입니다. 그림에서 풍경이 차지하는 부분은 2/3로 살롱 데뷔작인 <생뜨-안느-라 빨뤼의 청원 Le Pardon à Sainte-Anne-la-Palud>(1859)이나 1862년의 <옹플뢰르 해변>보다 더 높습니다. <옹플뢰르 해변>에도 역시 구름이 상당히 껴 있지만 군데군데 구름이 끼지 않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트루빌 해변> 속 하늘은 구름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는 잔뜩 흐린 날입니다. <옹플뢰르 해변>에서 부댕은 구름이 낀 하늘의 전체적인 인상에 주목한 반면, <트루빌 해변>은 구름 그 자체를 보다 깊게 연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트루빌 해변>에서 구름이 하늘을 온통 덮고 있지만, 구름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그림 중상부는 흰색이지만 상부는 회색이 주를 이루는 짙은 어두운 색의 구름입니다. 그림에서 풍경과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물에 먼저 시선이 가기 마련입니다. <트루빌 해변>에서 가장 먼저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화면에 길게 배치되어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림의 2/3을 차지하는 하늘, 그 하늘마저도 구름으로 완전히 덥고 있는 풍경은 관람자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림의 2/3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구름에 관한 묘사이지만 그 구름은 그저 하얗지만은 않습니다. 구름은 어느 방향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명도가 미세하게 다릅니다. 이는 구름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구름이 머금은 수증기의 양, 그 위의 태양빛의 투과율, 바람에 의한 산란 효과 등을 유심히 연구하지 않으면 포착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트루빌 해변> 속 하늘을 온통 뒤덮은 구름은 부댕이 1860년대 빛과 대기, 바람에 의한 광학적 효과에 상당히 몰두했으며 이를 그림으로 재현하기 시작했음을 입증합니다. 부댕은 인상주의가 태동하기 무려 10년 전부터 인상주의가 추구한 회화적 실험을 전개해 나간 겁니다.
4. 부댕의 <트루빌 해변>이 르누아르의 <퐁데쟈르>에 미친 영향
<트루빌 해변>은 눈높이 시점에서, 절반 이상은 하늘과 풍경을, 그 아래의 나머지 절반은 넓게 펼쳐진 지상에서의 모습을, 가로로 긴 파노라마(panorama)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이 구도는 르누아르가 1867년에 완성한 <퐁데쟈르 Pont des Arts>(1867)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부댕은 파리로부터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노르망디(Normandie)의 해변을 그렸다면, 르누아르는 휴양지가 아닌 센강(la Seine)이 흐르는 대도시 파리(Paris)의 풍경을 선택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르누아르의 <퐁데쟈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한 익명의 동시대 파리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 역시 부댕의 <트루빌 해변>과 동일합니다.
르누아르는 부댕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가 1863년 《낙선전 Salon des Refusés》에서 부댕의 <옹플뢰르 항구 The Port of Honfleur>(1863)를 접한 이후부터 부댕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어도 평생 부댕을 존경해 왔다고 고백한 것처럼, 르누아르 역시 부댕과 개인적 친분은 없었더라도 부댕의 그림에 영감을 받거나 적어도 부댕의 그림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르누아르가 <퐁데쟈르>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부댕으로부터 충분히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트루빌 해변>이 1864년 살롱 전시회에서 입선하여 대중에게 공개되었기 때문에 르누아르는 1867년 <퐁데쟈르>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트루빌 해변>을 참고하였을 수 있습니다. 비록 부댕과의 개인적인 친분도, 부댕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르누아르의 <퐁데쟈르> 자체가 부댕이 후에 인상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후배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 그 자체입니다.
부댕의 <트루빌 해변>은 르누아르에게만 영향을 준 건 아닙니다. 다른 동료 및 후배 미술가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퐁데쟈르>에서 르누아르는 부댕이 <트루빌 해변>에서 구현한 파노라마 시점에서 익명의 동시대 도시 사람들을 멀리서 관찰하는 기본 구성에 영향을 받았다면, 마네와 드가와 같은 미술가들은 부댕이 개척한 그림의 소재 그 자체에 주목하였습니다. 마네와 드가 등은 1860년대 말·1870년부터 해변에서 바캉스(vacances)를 즐기는 파리지엥(Parisien)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 이야기는 마지막 5부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