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영화 《미몽》의 애순의 평행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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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남(1912-1998) 감독의 1936년 영화 《미몽 迷夢》(1936)은 현재 필름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입니다. 주인공 애순은 중산층 가정주부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허영심이 심하고 가정에 소홀합니다. 급기야 남편과 딸이 있지만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죠.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참다참다 결국 애순을 내쫓습니다. 집을 나온 애순은 이 때다 싶어 내연남인 창건과 호텔에서 동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창건은 빈털털일 뿐만 아니라, 범죄자이기도 합니다. 이를 알게 된 애순은 호텔 직원을 통해 남편을 경찰에 밀고하고 그렇게 내연남과의 관계를 정리합니다. 애순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이번에는 젊은 무용수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이 젊은 무용수는 얼마 안 가 애순을 떠납니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썸남을 잡기 위해 애순은 택시를 잡아 탑니다. 무용수가 탄 기차를 따라 잡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과속운전을 종용하던 중 하필 애순의 딸 정희가 그 택시에 치이고 맙니다. 남자 때문에 어린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를 오가게 되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애순은 결국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느 걸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미몽》은 단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성영화라는 중요성만 가진 건 아닙니다. 《미몽》을 통해 애순 역을 맡아 열연한 북한 영화계의 대모(大母)로 추앙받는 문예봉(1917-1999)이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의 전성기 시절의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미몽》은 계몽적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당시 한국 영화계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1920·30년대 한국 영화계는 노동과 저축, 도덕적 가치들을 강조하며 사회 교화와 근대적 가치를 확산할 목적의 계몽적 성격의 영화들이 속속 제작됩니다. 영화 《미몽》에서 애순의 외형은 한복을 입고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은 당대 전형적인 중산층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모범적인 중산층 가정주부와는 딴판입니다. 비록 영화 말미에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지만 그녀의 행동은 당대의 사회적 관념에 의하면 교화될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결국 양주남 감독, 더 넓게는 남성 중심의 당시 사회가 그녀에게 내린 결론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회로부터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와 같은 타락한 여성에게는 교화마저도 사치일 뿐입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이러한 불합리한 여성관은 당시의 일반적인 도덕관념이었습니다. 《미몽》에서는 남자에 정신이 팔려 자신 때문에 과속한 택시에 자신의 딸이 사고를 당하는 현실에서는 실제로 발생하기 어려운 상황이 연출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사건을 제시함으로서 영화 《미몽》은 여성들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현모양처(賢母良妻)로 대변되는 남편의 보호 아래에서 집안일을 하면서 가정에 머물고 남편과 자식들, 그리고 시부모 부양을 하는 여성으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에게는 비극이, 그리고 그 비극으로 인한 단죄는 오직 자결(自決)하여 사회를 완전히 떠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경고입니다.
이런 스토리의 영화가 제작될 수 있었던 건 전통적인 여성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국 여성들이 늘어났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 왕조는 500년 동안 억압적인 여성관을 정착시켰습니다. 그렇지만 19세기 말, 정식으로 문호가 개방되어 상황은 급변합니다. 서구의 문물과 사상, 철학, 교육 등이 유입되면서 조선 사회에도 억압적인 여성관에서 벗어나 여성에게도 교육을 받을 권리, 사회 활동의 권리가 있다는 서구식 여성관이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많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외형을 유지하면서 근대식 여성관을 수용하였지만 일부 여성들은 한복과 쪽진 머리를 거부하고 단발머리에 서양식 의복을 입는 이른 바 모던 걸(modern girl)로 거듭났습니다. 근대식 교육을 받으며 바깥 활동을 허락받은 전통적인 외형을 유지하는 여성들이나 서구식 외형을 착용한 모던 걸 모두 여성을 남성의 부속품으로 여기며 가정에 속박시키는 전통적인 여성관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개화기 초반에만 하더라도 전통적인 여성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여성관을 지닌 여성들은 서양식 교육을 받은 일부 여성들에 국한되었지만 1930년대가 되면 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억압적인 기존의 여성관이 불합리하다는 인식이 퍼져 여성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에 저항합니다. 1936년 《미몽》이 등장한 건 일부 여성들이 아닌 당시의 여성 전체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 그 이면에는 현모양처로 사는 여성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현실이 숨어 있습니다.
새로운 가치관이 사회에 확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의 가치관과 규범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선지자적인 인물을 필요로 합니다. 한국에서 기존의 여성관에 최초로 전면적으로 도전한 인물은 나혜석(1896-1948)입니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모던 걸이자, 페미니스트, 문학·비평·미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며 여러 부문에서 최초의 한국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비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선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 1930년대부터 나혜석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몰락이 시작될 즈음 나혜석은 고향 수원으로 내려와 화가로서의 전환기를 맞이하고자 분투합니다. 영화 《미몽》이 제작되던 1935년에서 1936년 사이 나혜석은 <수원 서호>(1935-1936)라는 작품을 제작합니다. 그림에서는 노을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두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두 여인이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했고 그저 둘 중 한 명은 나혜석일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과연 이 두 여인은 누굴까요? 나혜석과 영화 《미몽》의 주인공 애순은 아닐까요? 나혜석은 실존인물, 애순은 영화 속 허구의 인물이지만 모두 억압적인 여성관을 강요받던 시대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추구한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실제로 나혜석의 삶 역시 영화 《미몽》의 여주인공 애순처럼 비극적인 삶으로 귀결됩니다.
- 이야기는 2부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