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 쿠아펠과 루이14세 시대 프랑스 고전주의 걸작 종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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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탄생을 그린 그림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로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미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중세 초기부터 기독교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미술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였기 때문이죠.
프랑스 북동부 로렌(Lorraine) 지역의 중심 도시인 낭시(Nancy)의 낭시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Nancy)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주제로 한 유화(oil on canvas)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화면의 가운데에는 붉은색 튜닉(tunic)을 입고 청녹색의 머리쓰개를 쓰고 있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 옆으로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노란색 망토를 걸친 신체 건강한 남성이 서 있습니다. 이 남성은 여인 쪽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남성의 표정은 젊은 여인의 평온한 얼굴과 대조되게 격양되고 놀라워하는 모습입니다. 이 남성은 무엇 때문에 놀란 걸까요? 답은 젊은 여성이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강보에 쌓인 갓난아이에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아이의 엄마로 추정되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도, 그 옆에서 놀란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남성도 아닌 이 갓난아기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탄생의 순간을 그린 <예수탄생 Nativité>(1667-1668)으로서 그림 속 등장하는 갓난아이는 아기예수, 젊은 아이엄마는 성모 마리아(Virgin Mary), 그 옆에 서 있는 젊은 남성은 성 요셉(St. Joseph)입니다.
2. 루이14세의 궁정화가 노엘 쿠아펠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노엘 쿠아펠(Noël Coypel, 1628-1707)입니다. 노엘 쿠아펠은 1643년 다섯 살의 나이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서 무려 72년 동안 왕좌에 올랐던 루이14세의 궁정에서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에게 봉사하며 프랑스가 유럽의 예술 헤게모니(hegemony)를 장악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노엘 쿠아펠의 이름인 노엘(Noël)은 프랑스어로 크리스마스를 뜻합니다. 노엘이라는 이름은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노엘 쿠아펠은 162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크리스마스와 밀접한 인연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노엘 쿠아펠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루이지 로시(Luigi Rossi, 1597-1653)의 오페라 <오르페오 Orfeo>(1646)의 무대 디자인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궁정화가인 샤를 에라르(Charles Errard, 1606-1689)의 눈에 띄며 왕실의 미술 작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경력을 쌓은 노엘 쿠아펠은 1663년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의 회원이 될 수 있었고, 1664년에는 아카데미의 교수직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1672년부터 1676년까지 프랑스 왕실이 이탈리아 로마에 설립한 왕립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고 1695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왕립 아카데미의 원장에 부임하였습니다. 노엘 쿠아펠은 루이14세 시대 때 왕실이 주도한 여러 건축 및 장식 사업에 대대적으로 참여합니다. 베르사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 뿐만 아니라, 파리의 루브르 궁(Palais du Louvre)과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을 장식하기 위한 천장화와 이젤화(easel)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혹은 프랑스 고전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과 그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17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즘을 완성한 르브룅(Charles Le Brun, 1619-1690)의 영향을 받은 화풍을 보여줍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는 샤를 르브룅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아카데미는 푸생이 완성한 고전주의를 프랑스 왕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미술로 정의하였기 때문에 왕립 아카데미의 일원이자 이후 아카데미 원장 직을 수행하게 되는 노엘 쿠아펠 역시 이 원칙에 입각한 인물인 건 당연합니다. 균형감 있는 안정적인 구도와 세밀한 데생을 기반으로 하여 명료한 표현을 추구한 푸생과 르브룅의 고전주의는 쿠아펠에게도 발견됩니다. 그는 루이14세의 다수의 미술 장식 사업에 참여하여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기반으로 한 세속적 그림 작업을 하지만 기독교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태어난 그였기에 기독교 주제를 한 종교화 역시 그의 예술에 중요한 한 축이었습니다.
1660년대 노엘 쿠아펠의 미술 세계에서 특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 그는 프랑스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교수에 임명되며 프랑스 궁정 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나는 일신의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재능이 인정받았다는 의미인데 이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직뿐만 아니라 회원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아카데미가 마련한 시험에 통과해야 하며 이는 노엘 쿠아펠이 이 시험을 통과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왕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는 왕실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더욱 세련된 회화 양식을 탑재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1660년대는 쿠아펠의 미술이 보다 세련되게 변화하는 급격한 과도기의 시대였음을 의미합니다. 낭시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예수탄생>은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서 쿠아펠의 미술이 보다 세련되고 프랑스 궁정 사회가 지향한 예술론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재정립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3. 100년 동안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 갈등의 흔적이 반영된 <예수탄생>
예수탄생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중세 이래로 기독교에서 매우 흔한 주제였습니다. 이야기의 순서상 예수탄생 직후 발생하는 목동들의 경배나 동방박사(Magi)의 경배까지 확장하면 예수탄생을 표현한 전통은 꽤 오래 되었으며 흔한 주제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탄생은 핵심인물인 아기예수와 성모마리아 그리고 성 요셉뿐만 아니라 성경에 근거하여 목동들이나 동방박사들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는 성경에 그 근거가 없는 가톨릭의 성인들, 이를테면 성모의 어머니인 성 안나(St. Anna)를 비롯하여 그림을 주문한 교회나 집단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성인들, 심지어 주문자 본인이 화면 속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1517년 독일 아우구스트회 수도사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촉발된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유럽은 100년 동안 구교와 신교가 격렬히 대립하였습니다. 신교는 성경에 입각한 근본주의를 주장하며 가톨릭을 맹공격하였습니다. 근본주의를 주장한 신교는 종교 미술은 성경에 서술된 그대로 재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탄생의 순간을 서술한 신약의 누가복음에서는 목자들, 동방박사들 이외의 인물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 외의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중세 이래부터 당시까지의 예수탄생은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발생 초기만 하더라도 기존의 전통과 관행에 문제를 삼지 않았지만 개신교가 이러한 부분들을 근거로 가톨릭을 맹비난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여(counter) 성경과 교리에 입각하여 이미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통제하게 됩니다.
16세기 동안 유럽 전역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갈등이 첨예하였지만 가장 심각한 종교갈등을 겪은 지역은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구교와 신교가 잔혹하게 서로를 죽고 죽이는 내전인 성 바르톨로메 축일의 대학살(The Masscre of the Saint Bartolomew's Day, 1572년)을 겪었고 구교와 신교의 갈등은 1598년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4세(Henri IV, 1553-1610)가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을 발표하며 겨우 봉합되었습니다. 이후 앙리4세의 손자인 루이14세 시대인 1685년 낭트칙령이 폐지되기 전까지 프랑스는 구교와 신교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프랑스의 가톨릭교회는 종교화 제작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요.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의 아버지 푸생은 모호함이 없는 명료한 표현을 중시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개신교는 기독교의 이미지 사용에 비판적인 입장인데 가톨릭은 개신교의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거나 혹은 모호한 해석의 여지가 없게 명료하게 그림을 그려야만 했습니다. 예수탄생의 순간을 묘사한 신약 속 누가복음의 2장4절에서 19절의 묘사에 따르면 예수탄생의 순간은 떠들썩한 축제가 아닌 오직 아기예수,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 요셉 등이 등장하는 역사적이지만 조용하고 경건한 순간입니다.
푸생 및 르브룅과 함께 프랑스 고전주의를 구축한 노엘 쿠아펠은 <예수탄생>이라는 작품에서 예수탄생을 신약에 등장하는 서술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경건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성 가족(Holy Family)을 축하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두 명의 천사만이 등장하고 이들 역시 나팔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대신 조용히 아기예수의 머리 위에서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성경에는 아기예수가 밤중에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구체적인 서술은 없지만 구교와 신교 모두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교리적으로 동의하기에 한밤중을 표현하듯 주위는 어둡고 마구간을 상징하듯 성모자와 두 천사들 뒤로는 어둠 속에 황소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피렌체와 로마의 이탈리아 중북부에서 발생한 르네상스 미술은 15세기 말에서 1510년대까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를 중심으로 정점을 이룹니다. 우아미(grace), 고요함의 미학과 적절성을 뜻하는 데코룸(decorum)은 르네상스 미학이 완성되는 핵심 가치입니다. 우아미, 고요함, 데코룸은 1520년대부터 균열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분위기는 17세기 초·중반까지 지속됩니다. 17세기 초·중반에 프랑스에서 푸생은 약 100년 동안 이어온 경향 대신 그 이전의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의 미학을 복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프랑스 고전주의의 아버지라는 찬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쿠아펠은 푸생을 본받아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에서 구현된 우아미, 고요함, 데코룸의 가치를 복원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노력은 1667년의 <예수탄생>에서 결실을 맺습니다.
4. 쿠아펠, 고전주의와 카라바지오를 넘어 국제양식으로
<예수탄생>에서는 쿠아펠이 선배 화가인 이탈리아 미술가 카라바지오(Caravaggio, 1571-1610)의 예술적 성과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을 입증해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쿠아펠의 <예수탄생>은 명암대비법, 일명 테네브리즘(tenebrism) 기법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테네브리즘은 카라바지오가 고안한 명암대비 기법으로서 그림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지녔습니다.
쿠아펠의 활동하는 1660년대에 이르면 카라바지오 식의 강렬한 테레브리즘은 구시대적인 표현기법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사건을 강조하거나 사건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효과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새 시대의 미술가들은 그림의 주제에 따라 테네브리즘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카라바지오나 그 이전 세대처럼 강렬한 명암대비법 대신 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명암대비 방식을 선호하게 됩니다. 쿠아펠 역시 <예수탄생>에서 새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한층 부드러운 방식으로 세련되게 테네브리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쿠아펠은 화면 왼편에 위치한 성 요셉이 왼손으로 불이 붙은 양초를 들고 있도록 연출하여 보다 정제되고 인위적이지 않게 명암대비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푸생 식의 고전주의와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장점을 훌륭하게 결합한 가톨릭의 종교화로서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 수준 높은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5. 프랑스 미술 엘리트 집안을 이룩한 노엘 쿠아펠
노엘 쿠아펠은 1707년 사망하였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장남 안투안(Antoine Coypel, 1661-1722), 차남 노엘-니콜라(Noël-Nicolas Coypel, 1690-1734), 안투안의 아들이자 노엘의 손자이기도 한 샤를-앙투안(Charles-Antoine Coypel, 1694-1752) 모두 화가로서 18세기 내내 프랑스 왕실을 위해 봉사하며 뼈대 있는 일가를 이룩하였습니다. 약 100년 동안 3대에 걸쳐 프랑스 미술계의 핵심 가문이 될 수 있었던 건 노엘 쿠아펠이 성공적으로 루이14세의 궁정에 입성하여 왕립 아카데미의 핵심 인물로서 프랑스 아카데미즘 구축에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미술사학자 토드 올슨(Todd P. Olson)은 자신의 저서 Poussin and France: Painting, Humanism, and the Politics of Style(2002)에서 1648년 프랑스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가 설립되고 17세기 동안 발전되는 과정은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헤게모니 싸움이자 루이14세를 중심으로 한 왕실주의자들의 승리의 역사라고 평가합니다. 왕실주의자들과 귀족주의자들 간의 다툼에서 왕실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왕립 아카데미가 프랑스 미술계의 주요 기관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데 노엘 쿠아펠은 상당한 공을 세웠고 살아생전 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667년에 제작된 <예수탄생>은 그가 단지 정치적 수완만 좋은 게 아니라 뛰어난 예술가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노엘 쿠아펠은 루이14세의 궁정에서 활동하며 프랑스 바로크 문화가 융성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루이14세의 유산은 그의 증손자인 루이15세(Louis XV, 1710-1774), 5대손인 루이16세(Louis XVI, 1754-1793)으로 이어지듯, 노엘 쿠아펠의 유산은 그의 장남과 차남을 지나 적손(嫡孫), 즉 종손(宗孫)으로 이어지면서 18세기 프랑스 미술의 역사를 써나갔습니다. 그렇게 17세기 프랑스 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노엘 쿠아펠.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그의 이름답게 노엘 쿠아펠의 미술가로서의 전체 커리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순간을 지닌 작품이 바로 <예수탄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