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의 <수원 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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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가운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수원 서호와 나혜석: https://youtu.be/Au_NyGFlpQM
▶ 미술에 관한 모든 수다 공식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art_sudain
1.
화면의 뒤쪽으로는 원만한 기울기의 산이 그림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그 앞으로는 나루터가 보입니다. 나루터를 사이에 두고 강 혹은 호수가 그림의 앞쪽까지 이어집니다. 그림의 앞쪽에는 두 명의 여인이 위치합니다. 한 명은 서 있고 나머지 한 명은 화면 왼쪽에 절반 정도만 보이는 정자의 발치에 걸터앉아 있습니다.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여성은 화면 왼쪽을 향하고, 정자에 앉아 있는 여성은 반대로 화면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두 여성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모르는 사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둘 다 물가를 바라보고 두 여인의 눈높이가 거의 같아 마치 앉아 있는 여성이 서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걸고 있는 장면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두 여인 모두 흰 저고리에 옥빛 치마, 비녀를 꽂은 쪽진 머리로 외형이 거의 같은 것 역시 이들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두 여인이 서로 아는 사이라면 이들은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요? 이 공간이 두 인물들의 어떠한 대화로 채워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해질녘, 이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물가와 산 넘어 잿빛 하늘은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2.
이 풍경화의 제목은 <수원 서호>(1935-1936)입니다. 서호는 수원의 대표적인 인공 호수이자 생태공원입니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천도를 목적으로 신도시 수원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도시 경계에 따라 군사 방어시설인 화성(華城)을 축조합니다. 정조(1752-1800)는 수원 화성 바깥에 농업이 번성할 수 있도록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인공 호수 건립도 명령합니다. 1799년 인공호수인 축만제(祝萬提)가 완공되면서 수원은 비로소 그 명성에 맞는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축만제는 수원 화성의 서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서호(西湖)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이후 제국주의 일본은 한반도에 일본식 농법을 이식한 후 경기권의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수탈하기 위해 1906년 서호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설립합니다. 광복 이후 1946년부터 2003년까지는 그 자리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위치해 한국 농업 기술 연구를 선도해 왔습니다. 이후 서울대 농생명과학대학이 서울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서호는 서호공원이라는 생태공원으로 거듭나며 수원시민들의 여가와 휴식 공간으로 재탄생합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원화성, 대한민국 사적 제478호인 화성행궁(華城行宮) 등이 오늘날 수원특례시를 대표하는 문화 유적이지만 서호, 즉 축만제 역시 수원시의 역사를 개척한 정조 대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수원을 대표하는 귀중한 문화 유적지 중 하나입니다.
3.
그림 앞쪽의 왼편 절반은 정자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정자는 오늘날 서호공원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항미정(杭眉亭)입니다. 항미정은 오늘날의 화성시장에 해당하는 화성유수(華城留守)였던 박기수(1774-1845)가 1831년 건립한 정자입니다.
이 정자의 명칭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인 소동파(蘇東坡, 1037-1101)의 시(詩) 《음호상청후우·기이 飲湖上初晴後雨·其二》 중 “욕파서호비서자 欲把西湖比西子”, “담장농말총상의 淡妝濃抹總相宜”, 즉 “서호(西湖)를 서시(西施)에 비유한다면”, “화장이 옅든 짙든 모두 아름답다네”라는 구절에서 유래합니다. 이 시구에서 “서자”(西子)는 춘추시대 말기 월나라(月)의 서시(西施, ?-?)를 지칭합니다. 그녀는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서 소동파는 당시 송나라의 수도 항저우(杭州)의 서쪽에 있는 호수인 서호(西湖)의 아름다움을 서시의 아름다운 외모에 빗대어 표현하였습니다. 소동파의 시는 조선의 식자들에게도 유명하였고 화성유수 박기수는 수원 서호의 아름다움을 소동파의 《음호상청후우·기이》에서 영감을 받아 “서호는 항주(杭州)의 미목(眉目)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축만제, 즉 수원 서호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박기수는 자신이 건립한 정자에 ‘항주의 눈썹을 닮은 정자’라는 뜻의 항미정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항미정은 수원 서호의 아름다움을 완성한 화룡점정(畵龍點睛)입니다. 항미정에서 바라보는 수원 서호의 석양은 ‘서호낙조’(西湖落照)라 불리며 수원8경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해질녘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수원 서호와 항미정의 명성은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었으며 서호공원으로 거듭난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종합하면, <수원 서호>는 수원8경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친 서호의 낙조, 즉 호숫가 맞은편에 위치한 여기산(麗岐山)과 서서히 저무는 노을빛이 물에 반사돼 아름다운 정취가 배가 되는 해질녘의 경이로운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항미정에 나온 두 명의 여인이 등장하는 서정적인 분위기의 풍경화라 할 수 있습니다.
4.
낙조, 일몰, 해질녘은 아름다운 자연 현상이지만 찬란했던 빛이 어둠에게 그 자리를 내주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으로 인류 보편적으로 소멸과 상실, 멜랑콜리와 같은 감정들과 연결되었습니다. <수원 서호>는 일몰을 감상하는 두 여인이 등장하는 평범한 풍경화로 보이지만 작품의 제작 배경을 확인하면 그림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풍경화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의 그림입니다. 나혜석은 1896년 지금의 경기도 수원특례시 팔달구 신풍동 일대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혜석은 1910년 9월 서울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난 지 25년만인 1935년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옵니다. 귀향한 나혜석은 한국 최고의 서양화가 자리를 되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고 <수원 서호>는 그런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작품입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성 최초의 해외유학파 미술가이며 모던걸인 나혜석의 일거수일투족은 당시에 대단한 뉴스거리였습니다. 1931년 그녀는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이었던 김우영(1886-1958)과 이혼하면서 또 한 번 세간의 화재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당시에는 이혼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대단히 좋지 못하였으며 그녀는 양육권과 위자료 등 어떠한 것도 얻지 못하고 이혼 당했지만 뛰어난 그림 실력과 글 솜씨로 이혼 후에도 스스로 생계를 꾸릴 능력이 있었습니다. 나혜석은 1933년 3월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원을 개설해 후학을 양성하며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나혜석은 작가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여러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글을 연재해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나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을 합니다. 나혜석은 잡지인 『삼천리』 1934년 8월호와 9월호에 2회에 걸쳐 「이혼고백장」을 기고합니다. 이 글을 통해 나혜석은 부부 관계가 파경을 맞은 이유를 대중들에게 낱낱이 공개한 게 문제가 됩니다. 이혼이 흔치않던 당시 상황에서 당사자 중 남성이 아닌 여성의 입장에서 부부 관계가 끝나게 된 이유가 대중매체에 공개된 건 한국에서 나혜석의 「이혼고백장」이 최초입니다. 10대 말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셀럽의 삶을 살았던 나혜석이었기에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은 일반 여성이었다면 치명적이었겠지만 워낙 파격적인 삶을 살아왔던 그녀였으므로 이혼 자체는 그녀에게 치명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월간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고백장」이 그녀가 몰락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그렇게 세간의 온갖 비난을 받게 된 나혜석은 서울을 떠나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수원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미술가로서 재기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5.
나혜석의 그림에서 수원의 풍경이 등장하게 된 건 이 때가 처음입니다. 화가가 되기 전 이미 서울로 유학을 떠났고 그 이후로도 서울에 기반을 두어 활동했기 때문이죠.
수원 시기 나혜석은 수원의 여러 풍경들을 화폭에 담아냈고 <수원 서호>는 이 시기의 대표작입니다. 정금희 교수는 나혜석은 이혼을 비롯한 개인적인 사건들을 자신의 미술에 반영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개인사를 미술의 주제로 선택하거나 표현하지 않았을 뿐 간접적으로 자신의 고단한 삶을 드러냈습니다. <수원 서호>가 대표적입니다. ‘서호낙조’는 수원의 대표 풍광이지만 나혜석의 <수원 서호>는 전혀 그렇게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서호에는 오직 두 여인만이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러 나와 있을 뿐입니다. 그녀들의 옷차림과 호수 건너편의 여기산의 모습을 통해 그림의 계절적 배경은 초봄이나 초가을로 여겨집니다. 이 시기는 일몰을 감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때죠. 그럼에도 수원8경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그림 속에는 두 여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물어가는 태양은 마지막으로 붉은 석양빛을 내뿜지만 나혜석의 그림은 명도가 낮고 그림의 전체 분위기는 지나치게 차가워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저물어 가는 태양과 서호의 아름다움을 두고 두 여인들 간의 활발한 대화가 오고가기 보다는 그저 쓸쓸한 침묵과 말 줄임만이 이곳을 채우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두 여인들은 아마 자신들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고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가끔씩 그 때의 추억들을 교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그림에서 등장하는 두 명의 여인이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하였고 그저 둘 중 한 명을 나혜석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그림 속 인물이 나혜석이거나, 적어도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원 서호를 찾아 항미정에서 서호낙조를 화폭에 담아내던 나혜석은 아마 자신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을까요?
그저 나혜석이 가부장적인 시대에 자신의 이혼 배경을 고백한 글을 발표했기 때문에 급격하게 몰락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혼의 귀책사유가 그녀에게 있었던 게 몰락의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당시는 나혜석의 잘못을 포용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고 그녀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야 할 파렴치한 여인일 뿐이었습니다.
- 이야기는 3부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