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하는 사념으로부터 나의 꿈 지켜내기
타박 타인의 섞인 지적에 10대의 나는 주눅이 들기도, 20대의 나는 '그래서 뭐? 그게 난데 어쩌라고-'하며 뻔뻔하게 대꾸하기도 했다.
마치 그것이 나의 스페셜티라도 된다는 양.
사실 생각 많은 내 삶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지금까지도 나와 힘겨루기를 하는 중이다.
아침 7시. 동이 트는 아침의 목격자. 담배를 태우며 새로 시작하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이 여인 또한 생각이 참 많아 보인다. [Seven A.M., 1948, Edward Hopper],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직접 촬영.
늘 생각이 많던 '나'.
생각해보면 이런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내가 그렇게나 바라왔던 "다른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어준 것이 사실이다. 내가 그리던 삶을 살아가는데 그 덕을 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 생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팔락거리는 내 존재에 묵직한 무게감을 주는 것을 넘어서게 되고, 족히 수만 톤의 무게로 숨을 턱- 막히게 하기 시작했다.
이제 생각은 자극이 아닌, 스스로를 짓누르는 자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너무 많은 상황과 사람들을 신경 쓰며 살아가는 마음 고단한 삶을 자초하고 있었다.
넘치는 나의 생각은 내 삶의 자극과 스트레스가 되어 50:50의 아쌀한 밸런스를 유지하며 내 삶을 들었다 놨다, 탄력을 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아슬아슬한 밸런스는 점차 30:70이라는 언밸런스로, 점차 70 이상의 짓누름으로 변질되었고, 이내 곧 내 정신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 70은 생각해 봤자 별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혼돈에 빠진 나는 어느덧 '생각'에 지배당하고, 그것은 내 삶을 높이 들었다가 팽~하니 내동댕이 쳐 버렸다.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삶에 대한 자극'이라 믿었던 나의 소중한 30은 고속 낙하하는 사념의 무게를 미쳐 피하지 못하고 처절하게 부서져버렸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는데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라는 시간을 소요했다는 것.
그리고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복잡하게 사는 거,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너 참 피곤하게 산다?"라는 타박을 거세게 부정하며, 나를 헤쳐가면서까지 이런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고 말이다.
결국 지난해 말,
곪아 터진 자아는 내 주변 세상을 향해 소리치며 이전까지의 삶의 방식의 종식을 선언하게 된다.
"더 이상 복잡하게 살지 않겠다"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착한 사람으로 살지 않아야겠다"
"나는 철저히 나만 바라보는 삶을 살겠다"
하며 '생각 많은 삶'의 종식을 선언한다.
그렇게 선언한 뒤 내 마음은 한결 편해졌고, 잿빛이었던 내 의식 세계는 조금씩 선명한 초록으로 돌아오고, 점차 노란 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퍼의 작품에 스며드는 노란빛은 세상의 풍경이 갖고 있는 각자의 색을 더 유려하고 신비롭게 만들어준다. 내 삶에도 호퍼의 풍경과 같이 따사로운 볕이 좀 더 자주 들러주길, 그래서 삶의 컬러가 한층 더 풍부해지길 소망한다. [Seven A.M., 1948, Edward Hopper],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직접 촬영.
내가 수십 년간 기겁하며 부정했던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그들의 판단은 이제,
"Yes, You're right."
생각의 가지치기를 가장 잘하는 정원사는 꿈과 그를 위한 일에만 몰두하는 집중력.
덤불을 다 걷어내고 치고 자르고 한 길을 내어 가 보련다.
"단 하나의 생각으로."
왜 사는 것인가
라는 끊임없는 질문에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 입증하려고 살아간다 믿기엔 그 성취와 인정은 기나긴 인생 중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업의 족적이라는 것 만으로는 이 복잡한 삶의 의미를 다 설명하기 역부족.
차라리 "남들 다 아는 생각 몇 가지"를 스스로 깨닫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믿음이 설득력 있다.
내가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두 가지를 크게 깨달았다면, 100세 시대 많아봐야 고작 7개 정도.
아니, 앞으로 더더 어리석어진다면 전체 생에 지금까지 깨달았던 고작 한두 개가 전부일 지모 모를 테지.
이렇게 가끔은 자신을 드려다 볼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짧고도 긴 생, 더 많은 깨달음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 David Hockney], Metropolitan Museum of Art, 직접 촬영.
내가 떠나고 나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는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내게, '끝없는 성찰'이라는 기나긴 수련이 필요하겠다 싶다.
그릇은 작고, 생각은 많기에,
그릇을 키우고 생각을 줄인다면 결국 내가 원하는 것에 가까워질까?
휴. 나는 여전히 생각이 많구나.